청계천이 2005년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된 것은 철저히 제작자 입장에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세금낭비이자 반환경적 반문화적이다. 더 큰 문제는 반민주적이라는 사실이다. 그 상징물이 청계천 시원지에 자리 잡은 소라껍데기다. 공공미술품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성과 문화적 역사적 맥락과 단절된 채 결정권자의 독단에 의해 선정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청계천의 상징인 수표교와 오간수교를 복원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성까지 무시했다(p.94).</BLOCKQUOTE>
마지막 장인 Z. 욕망은 이 시대의 엘리트들의 밑바탕을 파헤친다. 사적 이익과 공적 영역을 혼돈하는 이들에 대한 예리한 묘사가 나온다.
영어 공교육 강화의 명분이 기러기 아빠의 비애를 없애주자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기러기 아빠 이하의 가장과 가정은 보이지 않는다(한국지도층의 현실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영어 열풍은 교육적 접근보다 권력유지의 기능이 더 크다(p.120).
차기 정부나 그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영어’는 수출용이라기보다 ‘내수용’이다. 이걸 통해서 이득을 볼 당사자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영어를 잘하는 이들이다. 이를테면 의사소통 수단에 불과했던 영어가 졸지에 ‘영어 전문교사’라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경제적 수단’이 되는 것이다.
결국 차기 정부의 영어 정책은 ‘강남’으로 표상되는 한국 사회의 경쟁 질서를 더욱 공고하게 하면서, 이런 경쟁 구도에서 탈락할 위기에 놓인 중간 계급을 구원하기 위한 시혜이다.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과감하게 조기 유학을 보낸 ‘중간 계급 기러기’들은 훌륭하게 교육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기 뜻을 이루는 것과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정말로’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시사IN> 제23호, p.122에서 재인용).</BLOCKQUOTE>2008/07/28 – [A day in the life] – 집으로 가는 길.. 생각해보니,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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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한나 아렌트와, 조지 레이코프, 에리히 프롬부터 시작해서 강준만, 우석훈, 한홍구를 횡단해서 녹여 놓는다. 푸코식의 계보학 또한 등장하는 데, 그것을 적재적소에 잘 버무려 놓은 느낌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화학반응까지는 아직 가지 못했다는 생각도 좀 든다.
이를테면 노엄 촘스키와 조지 레이코프를 언어학자에서 정치학자로 점차 가게 된 것을 동류항으로 묶으려하는데, 사실 노엄 촘스키는 ‘프레임’보다는 그 언어 밖의 현실과의 괴리를 더 많이 말하는 편이고, 레이코프는 그런 급진적 현실을 크게 언급하지 않고 에둘러치는 편이다.
그리고 종종 들뢰지앙들이 쓰는 언어와 한나 아렌트,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바들이 섞일 때, 그들의 지적 배경 자체가 완전히 다른 점이 얼마나 인지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 더 조심스러웠어야 하지 않나?
<FONT color=#003366>치명적 미래를 막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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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개발주의는 공론영역의 시민이 아닌 사적영역의 근로자와 납세자만을 시민으로 인정할 것이다. 또한, 촛불집회와 같은 공론영역을 원천 봉쇄시켜 분열과 고립으로 해체시킨 후 개인의 성공만을 부추기며 계층 간의 갈등을 더욱 조장할 것이다. 그러면서 공간을 사유화하고, 언론을 장악하고, 인간존재의 근원인 지구까지 파괴할 것이다. ….(중략)…. 개발주의가 원하는 것은 자기 예언적인 패배주의다(p.157).
이런 시대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난, 아무래도 ‘감수성’에 대해서 자꾸만 이야기하게 된다.
2008/07/06 – [Reviews] –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2008, 오창익, 삼인) – 비릿한 한국사회의 모자이크
세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문제는 그걸 위해서는 최소한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물질적 여유가 중요하고 시간이 중요한 것이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빠듯할 때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하여서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문제’에 개입하지 못한다고(이를 테면 교육감 선거에 대한 불참) 그들을 힐난하거나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의 문제 또한 있다는 것이다.
그 ‘감수성’이라는 것을 살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난, 우석훈의 말처럼 ‘아방가르드’들의 탄생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이 ‘정책적’이고 ‘실질적’인(실용이라는 말이 욕이 되었으므로 ‘실질’로 바꾼다 substantial) ‘좌파’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장기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함께 구성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말이다. 음악이, 미술이, 그리고 연극과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꾸만, 그 아방가르드의 정신이 그리워진다.
뱀꼬리1. 이 책에는 생각보다 많은 오탈자가 있다. 비문도 깨나 많다. 1인 편집이었을까? 아니면, 영세한 출판사라서 그랬을까? 세심한 고려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읽다가 갑자기 멍해질 때가 있었다.
2. 이 책을 운동가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괜찮을 듯 싶지만, 공부하는 사람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더 많은 가다듬을 필요를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더 훌륭한 생각들의 정리가 되지 않았을까?
http://flyinghendrix.tistory.com<SPAN class=dtreviewed title=2008-08-06T11:31:55>2008-08-06T11:31:55</SPAN>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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