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신학자의 한국기독교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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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097227&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FONT color=#000000>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FONT></A> – <IMG alt=10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10.gif" border=0>
류상태 지음/삼인</TD>
<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91097227_1.jpg"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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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0000ff>착각의 늪에서 발 빼기</FONT>

이 책의 저자는 목사였다. 그것도 예장 통합쪽의 목사로 활동했었고, 대광고등학교의 교목이었으며, 숱한 고등학생에게 종교과목을 가르쳤던, 그냥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사회의 목회자였다. 하지만, 강의석 사태를 분기점으로 하여서 그 틀에서 벗어난 ‘이단아’가 되었고, 현재의 시점에서 그는 교목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다. 그냥 한 사람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갖는 이가 되었다.

보통, 평신도들에 있어서 교회에 지쳐 나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고, 주위에 수두룩하다. 교회에 가서 누리고 싶었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평안’ 등의 정신적 안위였다면, 교회에 가서 그걸 도대체 찾을 수 없는 요즘이기에 그들은 교회를 나오고야 만다. 보통 이런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깊이 탐구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부딪히는 현실과 괴리된 교회의 ‘몰상식’에 놀라거나 정서적 ‘황폐함’에 자괴감을 느끼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인 것이다.

다만, 이 책의 저자 류상태의 경우에 놀라운 것은, 그는 주류기독교가 주는 관념에 대해서 타협이든 동의이든 간에 그 신학과 신앙의 방향성에 발을 맞춰가던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들을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주위 사람에게 ‘선생’으로써 가르치던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보수적 한국 기독교 신학의 ‘Zealot’ 역할 만을 했던 것은 아니고, 나름의 고민에 비추어 가면서 그것들을 바라봤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의 요소에는, 그가 언급했던 ‘예수 세미나’ 그룹의 ‘역사적 예수’ 논의가 있을 것이고, 한국의 민중신학 등의 요소가 있었을 것이다(내가 알게 된 김강기명도 약간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한국 기독교의 배타적 관점이 제공하는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왔고, ‘불거토피아’(http://cafe.daum.net/bgtopia) 등에서 지속적인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전에 읽었던 그의 책(http://blog.aladdin.co.kr/hendrix/1713606) “당신들의 예수”에서 가장 센세이션했던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부분에 흠뻑 빠지고, 한국 기독교에 대한 가치관 하나를 잡을 수 있었는데, 먼저 쓰여진 이 책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같은 경우 그런 관점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FONT color=#0000ff>한국교회는 어떤 점에서 예수를 배반했는가?</FONT>

도대체 뭐가 문제인걸까? 이제는 더이상 한국의 기독교가 확장하지도 않는 형국이다. 오히려 천주교 같은 경우 신도의 수의 확장이 있지만, 더 이상 기독교(개신교)는 수의 확장도 오히려 (-)로 전환된 상태고, 사회 병리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다 그렇게 된건가?

이 책에는 그 병리적 현상들과 그 현상들에서 나타나는 뿌리 깊은 병패가 나타나있다.

근데, 자꾸 저자가 쉽게도 ‘기독교’ 신앙, 신학 그 자체를 공격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 기독교의 특정 부문에 대해서 공격하면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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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국 교회의 병패의 이면에는 한국에서의 특수한 ‘신학적 문제’들의 근본적 해결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배타성, 세속화 및 물신화, 역사성 결여, 가부장적 권위주의, 성서 문자주의(축자무오설), 종말론적 환상주의 등의 병패를 지적한다.

그리고 그 병패의 중심에 기실은 평신도들보다 목회자들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데올로그화 된 목회자 집단.. 그들은 ‘예수의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고 선포하며, 대속신앙에 의거 지속적인 인간의 ‘죄’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모든 승리를 얻는 다는 식의 협박을 지속한다. 그들의 정화를 바랬기에, 그 권력 구조에서 류상태는 갖고 있던 지위를 바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을 읽던 도중, 강의석 사건에 대한 일지가 나온다. 상식적인 선에서의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 학교라는 ‘억압 기제’에서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해서 배운다.

부흥회에서 나오는 ‘성령의 불’이 우리를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 지에 대한 그의 말들이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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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인의 ‘의심하는 신학’에 대한 강조도 되새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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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dotbox>그 외에도 성서에 대한 기존 해석들에 대한 비평등도 있는데, 기실 이 것들의 그의 강조따라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사실 신학자들은 대충 알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안팔릴 까봐 잘 ‘설교’ 시간에 말하지 않고, 감추는 것들에 불과하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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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dotbox>‘생동감 있는 신학’을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깨어진 사고와 끝없는 의심 그를 통한 성장이 필요할 테고, 그것들이 해결되면서 참 ‘신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고, 그 때쯤에서야 한국사회에서도 ‘예수’에 대해서 툭터놓고 더 도그마 없는 열린 대화와 영성에 대한 교류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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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dotbox>류상태의 글은 이런 ‘문제제기’로 훌륭하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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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dotbox>다만, 대안적 공동체에 대해서 ‘새길교회’ 같은 ‘예수 클럽’ 형의 모델을 보여주지만, ‘안티테제’를 크게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좀 아쉽다.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온라인을 벗어나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도 연장되야하는 것이 아닐까?</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