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붕 세가족, 그리고 <우리들의 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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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시절이다. 내가 엄마 아빠와 함께 순돌이네 집의 일을 우리집 일 마냥 내밀하게 쳐다보던 그 때.

우리 아빠는 언제나 ‘주태배기’에다가 정 많고, 소시민적 사고방식을 가진 전파상 주인 ‘순돌이 아빠 – 임현식’과 본인을 항상 동일시 했었다. 우리 엄마 역시 순돌이 엄마 역을 자임했다.

모든 에피소드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에피소드가 뚜렷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

순돌이네 가족에게 모처럼 양식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 양식을 먹는다고, 순돌이 아빠와 엄마는 모처럼 만수네 세탁소에 가서 양복을 빼입고, 순돌이도 마찬가지로 양복을 껴입고, 동네 어딘가에서 ‘포니’를 빌려다가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레스토랑에 가서, 항상 ‘소시민’적이지만 그래도 어디가서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놓기 싫어하는 순돌이 아빠는 아는 척을 하면서 주문을 하고, 돈까스 쪼가리 몇 쪽과 맥주를 마신다(당시에는 확실히 경양식 집에서 돈까스 먹으면서 맥주 한잔 먹는 것이 굉장한 외식으로 불리웠었고, 또한 음주운전에도 관대했다.).

하지만, 순돌이의 위의 사진을 보듯, 당시에도 ‘빈곤형 비만’에 노출되어있는 아이에게 돈까스 쪼가리 몇 쪽이 과연 식사가 되었을까? 순돌이는 더 시켜달라고 보채고, 비싼 가격에 주문 할 때부터 놀랐던 순돌이 엄마는 순돌이를 야단치고, 아빠는 ‘어험’하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결국 식사는 거기까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데, 순돌이는 여전히 보채고, 차는 고장나고, 순돌이 엄마와 순돌이는 차를 밀고, 겨우 겨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집에 돌아오는 순돌이 가족. 차를 미느라, 양복은 더렵혀져 있고, 순돌이는 한마디 한다. “엄마, 짜장면 한 그릇만 더 먹으면 안 돼?”

당시엔 참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니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나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엄마와 동생과 함께 8살, 처음 생긴 주변의 백화점이었던 중계동 한신코아에 놀러갔다. 엄마한테 어디서 들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돈까스를 사달라했다. 가격을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레스토랑에서의 돈까스 가격은 5000원. 지금돈으로 5000원이였다면, 셋이 15000원을 넷고 먹었을 테지만, 15000원씩 내면서 돈까스를 먹기에 엄마 지갑은 너무 가벼웠다.

엄마의 선택은. 돈까스 한개 나눠먹기. 난 엄마한테 계속 때를 썼다. 엄마가 왠 일인지 화를 내지 않고, 그냥 “한 개만 나눠먹어도 충분해~”라고 했다. 징징대면서 먹고, 집에 돌아온 기억이 선명하다. 엄마는 한 쪽도 먹지 않고, 나와 동생만 한 개를 나눠먹었다. 요즘 그 이야기를 언제 했었는데, 엄마는 “너희가 워낙 양이 작으니까, 그랬던 거야”라고 말하지만, 푼돈이나마 남의 돈 버는 지금을 생각해 보면, 엄마의 당시 마음이 어땠을 지에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자꾸 가슴이 애린다.

천지인의 <우리들의 외식="">. 이 노래를 잊을 수가 없는데, 어렸을 때의 몇 가지 상흔들이 자꾸만 이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FONT color=#9b18c1>두달만에 꼭 두달만에
마누라가 외식을 하자던날</p>

늘씬한 마네킹이 유혹하는
슈즈싸롱에 눈이 팔려

이번에는 꼭 이번에는
사신고야 말겠다는 옹고집에

십만원 두툼해진 지갑으로
랜드로바 세무구두 사 신겼네

평당 억대가 넘는
화려한 명동땅을 거닐면서

헌구두 가져올 걸 놔뒀다며
후회하는 아내를 보며

열시간 작업으로 축쳐진
어깨가 쑤신다는 아내

모처럼의 허탕 외식
말라빠진 뱃가죽도 못 채우고

다음번엔 꼭 다음번엔
대낮부터 기죽지는 않으련다

눈물이 베게위로 젖어드는
아내 눈물 결코 안 보리라</FONT></STR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