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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도
<A href=”http://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144535b5970058f318310d19280b&name=1544711501126711301817920.jpg” target=_blank><IMG id=6422144535b5970058f318310d19280b@10.20.100.103 style=”BORDER-RIGHT: medium none; BORDER-TOP: medium none; BORDER-LEFT: medium none; BORDER-BOTTOM: medium none” height=555 src=”http://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144535b5970058f318310d19280b&name=1544711501126711301817920.jpg” width=400 name=image swaf:cywrite:file_seq=”” swaf:cywrite:object_id=”2080219594” swaf:cywrite:info=”image | 1544711501126711301817920.jpg | /download?fid=6422144535b5970058f318310d19280b&name=1544711501126711301817920.jpg | 65042 | 6422144535b5970058f318310d19280b@10.20.100.103” swaf:cywrite:link=”http://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144535b5970058f318310d19280b&name=1544711501126711301817920.jpg”></A> |
어렸을 때부터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공포였다. 눈물조차 나지 않을만큼 섬뜩하게 변해버리는 그들이 난 무서웠고, ‘공포감’에 울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몇 년간은 ‘통성기도’가 있는 순간이 항상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순간이었고, 조용히 ‘입을 벌리지 않는’ 기도를 하고나서는 가만히 눈감고 있었다.
여전히 지금도 ‘통성기도’가 가장 무섭다. 정확하게 몇 분전까지 희희낙락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절규하면서 울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성령감화감동’의 은사가 아니라, 집단적인 광기에 불과하게 느껴졌고, 여전히 그렀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그 가운데에서 내가 혼자서 하던 기도가 있는데, 그 중 한마디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것 같다.
“주여, 붙들어주시고, 잡아주세요.”
왜, 다른 말이 아니라, ‘붙들고, 잡아달라’라는 말이었을까?
다른 간구가 아니라, 오로지 ‘잡아달라는 말’이었을까?
진보적이라는 교회로 옮기면서 생겨난 나의 기도에 붙는 말은 한가지 더.
“주의 공의로움을 하늘이 아닌, 이 곳에서 펼쳐주십시오.”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위의 ‘붙들어 달라는 말’, 그리고 ‘잡아달라는 말’ 그것 때문에 아직도 ‘기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기도가 여전히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언어로 재단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 말조차도 사람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렇기에 난 판단한다.
난 오로지 이 말을 가지고 기도한다. “붙들어 주시고, 잡아달라”고. 멀리가도, 돌아올 수 있는 만큼의 여지는 남겨달라고. 끝까지 갈 수도 있겠지, 그래도 그 때에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항상 따라와 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