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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대해서 – 넓이와 깊이
<IMG id=6422144535b597005ece1855db39a43f@10.20.100.103 style=”BORDER-RIGHT: medium none; BORDER-TOP: medium none; BORDER-LEFT: medium none; BORDER-BOTTOM: medium none” src=”http://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144535b597005ece1855db39a43f&name=1942316116178761058418104.jpg” name=image swaf:cywrite:info=”image | 1942316116178761058418104.jpg | /download?fid=6422144535b597005ece1855db39a43f&name=1942316116178761058418104.jpg | 31627 | 6422144535b597005ece1855db39a43f@10.20.100.103” swaf:cywrite:object_id=”1080226966” swaf:cywrite:file_seq> |
내가 뭔가 진드거니 앉아서 할 수 있는 스타일이었다면, 아마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이 바뀌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항상 하고 싶은 일은 많았고, 하나도 포기하기 싫어했다. 밀리고 밀려서 포기하게 된 것들이 많았지만, 여전히 그것들에 대해서 꿈을 꾼다. 예를 들면, 여전히 난 피아노를 잘 치고 싶고, 기타 속주를 잘 하고 싶고, 팝핀을 잘 하고 싶다. 문제는 어떤 일이든 어느 정도 내공을 갖추기 전에 퇴각해서는 ‘죽도 밥도 아닌’ 상황에 봉착한다는 건데, 최소한 취미 생활에 있어서는 기타라는 악기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이상의 선에 안착 시켜놓은 것이 없는 것 같다. 나도 진드거니 뭔가를 앉아서 파고 싶다. 나 같은 사람이야 말로 플래너가 필요하다는 이유가 된다.
요즘 점차 나에 대한 ‘장악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데, 그런 문제점을 계속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부’에 있어선 그런 난점들을 그나마 덜 느낀 편인데,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베이스에 대해 투자를 위에 언급한 문화/예술 활동보다는 훨씬 많이 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내내 읽었던 역사소설과, 고등학교 내내 읽었던(수능 때문에 그런 책들을 한동안 읽지 못하는 게 한스럽게 만들었던 그런..) 사회과학서들과, 학부에서의 전공이 ‘정치학’이었던 것도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본다.
정확하게는 ‘정치학’을 확실히 이해하고, 그것들의 실천적 함의를 찾자고 생각한 기간이 3년 이상이었다는 것이 이유였으리라. 덕택에 한국 정치학의 큰 3가지 분과 (비교정치, 국제정치, 정치사상)의 대체적인 개론서를 최소한 몇 번씩은 읽었다는 것이 일단 큰 도움이었을테고, 학생 사회에 대한, 한국 사회에 대한 고민들이 지속적인 사회과학서들을 읽게 만들어 준 것이 지금의 내 관점의 대부분을 형성해 온 듯하다.
학부를 졸업하면서 지평은 엄청나게 넓어져버렸는데, 아마 군생활이 그렇게 나를 바꾸고 있는 듯하다. 대학원에서 일주일에 400 페이지는 족히 넘을 책들을 4권 이상 읽게했고, 300페이지 정도의 영어 리딩을 읽어야 했다는 조건들은, 나에게 ‘교양’으로서의 독서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군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손대지 않았던, 사실은 못대었던 부문들에 자꾸만 손을 대게 만든는데, 예를 들면 한동안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이론들에 심취했었고 20권 가량의 책을 읽어대었다. 또 한동안은 민중신학과 ‘역사적 예수론’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위에 언급했던 ‘오지랖’이 주는 폐혜에서는 다행히 어느 정도는 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데,
<FONT color=#24298f>먼저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론의 영향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추천하는 한동안 한 주제에 ‘몰빵’하는 독서법의 효과 덕택인지, 나름의 지도를 구축하는 것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FONT>
<FONT color=#24298f>두 번째는 아무래도 강유원의 ‘줄치는 법’ 그리고 ‘독서노트’ 쓰는 법이 되겠는데, 책에서 나오는 정보에 대한 ‘장악력’에 대한 강유원의 지침은 ‘달인’의 길에 도달하는 법을 느끼게 한다.</FONT>
<FONT color=#24298f>마지막으로 학부 때 나름 닦아놓은 맑스주의/후기 구조주의자들의 논의의 틀이 강고하게 살아있음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어떤 분과학문 혹은 주제를 만날 때도 그러한 관점들은 살아서 ‘책을 읽는 방법’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FONT>
언젠가 Generalist가 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제네럴리스트의 가장 강점은 ‘넓이’가 될 것이다. 폭넓은 사유의 폭은 통찰력을 제공하고, 세상의 ‘숲’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Specialist의 ‘깊이’라는 측면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세상에 숱한 ‘도사’들이 혹세무민을 거듭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단단하게 자기 주제에 대해서 꼬장꼬장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하지만, 이런 두 지식인의 측면은 사실 ‘취향’ 혹은 ‘성향’의 문제라고 본다. 나처럼 ‘오지랖’쟁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에는 ‘제네럴 리스트’가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고, 한 주제를 들고 몇 년이고 몇 십년이고 매달릴 수 있는 사람에게는 ‘스페셜리스트’가 적격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대체로 예전의 문과 계통의 사람들은 ‘제네럴리스트’적인 사고 방법을 지녔다는 생각을 하고, 공과의 대체적인 사람들은 ‘스페셜리스트’적인 사고 방법을 지녔다고 보았었는데, 요즘은 다시금 역전/수렴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듯하다. 문과 계통에서도 점차 ‘전문화’ 현상이 일반화 되는 경향이고(이건 분명 미국식 학제의 영향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과 계통에서는 오히려 문과 계통의 사람들과 ‘interdisciplinary study’(학제간 연구)에 몰입하는 것도 이제는 드문일이 아닌 것이 되었다.
하지만, 난 이런 현상 중 문과의 ‘전문화’ 경향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이라는 것이 제공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文’과 관련된 전반의 것들인데 반하여, 그들 중 영문학을 하였다하여 ‘셰익스피어와 14~16세기 영국소설’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거나, 혹은 ‘양당제가 정치적 안정에 끼치는 영향’이 박사논문 주제라하여 그것만 파면서 한국의 정치현실에도 상관없이 자신의 이론을 접합시켜버리는 우를 범하는 현상들이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다시금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야기로 들어오게 되는데, <FONT color=#000000>제네럴하되 그 디테일을 읽어낼 수 있는 만큼의 깊이와 내공을 갖추고 다시금 다른 학문으로 떠날 수 있는 그런 제네럴리스트가 되는 것</FONT>이 내게도 맞고, 내가 생각하는 적실성에 닿아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