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PD 저널리즘에 대해서~

2008/07/21 – [Reviews] – PD가 되려면 해야 하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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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vAlign=top><A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660766&ttbkey=ttbpanic822253001&paperid=2200944" target=_blank><IMG alt="PD 저널리즘" hspace=5 src="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55660766_1.jpg" align=left border=0></A><A class="fn url" style="FONT-WEIGHT: bold; COLOR: #369; TEXT-DECORATION: non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5660766&ttbkey=ttbpanic822253001&paperid=2200944" target=_blank>PD 저널리즘</A> – <IMG alt=10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10.gif" border=0>
원용진 지음/한나래</TD>

<SPAN class=description><FONT color=#0000ff>PD 수첩 사태, 그리고 PD 저널리즘
</FONT>

사실 고등학교 때 PD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겠다고 생각했었지만 나의 신문방송학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다. 기껏 읽어본 책이라고는 강준만의 <대중문화의 겉과="" 속=""> 정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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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8411498&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FONT color=#000000>대중문화의 겉과 속</FONT></A> – <IMG alt=10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10.gif" border=0>
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TD>
<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etc/book/coveroff/8988411498_1.jpg"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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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겁결에 입시에 실패한 후 차선으로 입학했던 정치학과의 학부를 다니면서, 난 사실 미디어에 대해서 언젠가 나와 맞닿게 될 곳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관련된 논의들에 대해서 신경을 끄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레디앙, 그리고 몇 몇 진보적 미디어들을 계속 읽고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수준의 ‘모니터’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용자’로서의 태도로써 접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나마 미디어의 현실에 관심을 갖게 했던 사태가 있었다면, 그건 바로 2005년 의 황우석 관련 특집과 그에 대한 여론의 폭격(심지어 다음daum에서는 1:99의 결과로 PD수첩을 인민재판하기도 했었다)을 보면서 였다. 이미 Pressian의 강양구 기자의 글을 읽으면서 사태가 얼마나 끔찍한 힘의 관계들로 뭉쳐있는 지를 생각하던 찰나에, 의 보도와 그에 대처하는 조중동의 태도를 보면서 미디어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다시금 해보았다. </p>

이건 단순히 조중동에 대한 비판과는 달리보아야 할 무언가가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심증에 대해서 실마리를 주었던 것은 생각외로 김주하의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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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10111&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FONT color=#000000>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FONT></A> – <IMG alt=6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6.gif" border=0>
김주하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TD>
<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etc/book/coveroff/8925510111_1.jpg"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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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에서는 사태이후 급박했던 보도국과 시사교양국의 분위기 차이를 싣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 나는 기껏해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PD와 기자라는 사람들이 직무 수행의 방식을 제외하고 다른 부문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할 것이라고 추정해왔다. 하지만, 그렇게만 진단하기에는 뭔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

그리고 3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고, 유학과 언론사 시험을 갈팡질팡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이 책을 집게 되었다. 그리고 PD 저널리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FONT color=#0000ff>2004년의 언론학회 보고서, 방송 저널리즘, PD 저널리즘</FONT>

아무래도 이 책이 공략하려는 것은 두가지 층위이다.

첫 번째는 기존의 미디어를 바라보는 학계에 대한 공격이 될 것이다.
이는 ‘공정성’의 패러다임만으로 언론을 진단하고 있는 학계의 편향이 오히려 ‘공정성’을 이데올로기화시키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 될 것이다. 그 계기는 2004년의 탄핵 관련 방송에 대한 한국언론학회의 보고서였다.

 탄핵을 주도했던 정치권에서는 방송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면서 방송위원회에 행정 조처를 요청한다. 요청을 받은 방송위원회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대신 탄핵 관련 방송 내용에 대한 연구를 한국언론학회에 의뢰했다. 연구를 의뢰받은 한국언론학회는 ‘저널리즘 전문가’로 연구팀을 구성한다(p.24). (중략)
 이 보고서는 방송 저널리즘에 대한 평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방송 저널리즘의 공정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첨예한 사회적, 학문적 논쟁을 이끌어 냈다. 연구를 담당했던 측에서는 세계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작업이라고 자찬하였다. 하지만 저널리즘 공정성 평가 기준의 절대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는 연구의 정당성에 상당한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p.26). (중략)
 한국언론학회 보고서는 탄핵 주도 정치 세력과 탄핵을 찬성하는 입장에 있던 언론과 단체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방송과 집권 세력 간 유착관계를 증거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탄핵 사건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방송 저널리즘의 공정성 시비에서 이 보고서는 중요한 증거로 활용되고 있다(p.27).

 
하지만 이 뿐만은 아니다. 2005년의 황우석 사태 때와 FTA 관련 보도 때마다 신문과 정부 기관 그리고 덩달아서 학계는 방송 저널리즘의 ‘공정성’을 공박하면서 문제를 삼아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공정성’이라는 이야기인가?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과학의 문제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지나친 영미편향이라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국편향’을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내용에 있어서의 기계적 ‘친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논리실증주의/행태주의와 연동되는 ‘과학주의’ 그리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양적 방법론’. 하지만 문제는 방법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밑에 깔려있는 규범(norm)에 있어서의 문제가 더 치명적인다.

이를 테면, 숫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통계 그 자체의 상관성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상관성을 가지고서 ‘인과성’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것을 매개해 주는 것이 ‘전제’가 될 것이고 그 전제는 보통 ‘이론’이 될 것인데, 그 ‘이론’을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은 그대로 수입한 상태로 ‘상수’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제가 잘못되어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의심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는 영미식 사회과학의 구도 안의 결과들만 산출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틀에서 벗어나서 미디어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를 저자들은 진행하는 데 이를 위해서 스튜어트 홀의 문화 연구,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연구 등을 활용한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한국에서의 저널리즘 공정성에 대한 논의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유종원의 지적대로 한국에서의 언론의 위상은 그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공중의 합리적 판단을 돕는 정보의 객관적 전달자이기보다는 뉴스의 생산을 통해 사회 정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 판단자의 역할을 주문받았다. 따라서 강명구가 제안한 공정성의 구성 요소 중 사실성 검증과 윤리성 검증은 한국 저널리즘의 공정성 논의에 부차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은 한국 저널리즘의 공정성은 공정성을 구성하는 하부 개념의 충족에 의해 구성되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검증과 보다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인식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강명구가 제안하는 사실성 검증은 이준웅에 따르면 공정성의 보편적 조건이 될 수 없다. 사실성 검증의 하부개념인 정확성은 저널리즘의 단지 한 양식에 불과하며, 다른 하부 개념인 균형성 역시 조절 가능한 합의점을 도출하기 불가능하므로 공정성 논의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한국 저널리즘의 공정성은 이데올로기 검증의 하부 개념인 역사성과 전체성에 보다 집중되어 논의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중략)…. 따라서 한국 저널리즘의 공정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 구성체가 어떻게 역동적으로 조직되어 왔는지에 대한 보다 거시적인 틀과 이러한 사회 구성체속에서 어떻게 한국 저널리즘이 발생적으로 차별적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요구된다(pp.110~111). </BLOCKQUOTE>
이런 공정성이라는 것은 요컨대 역사적 상황에서 구성되는 것이며, 결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자꾸만 기존의 영미식 규범에 젖어있는 이론을 보편적이라 말하면서 적용시켜 바라보는 것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 장치밖에 안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러한 이론적 토대에서 저자들은 대안적 저널리즘의 양상으로 사실상 PD 저널리즘을 언급한다(결정한 것이 아니다).
대안적 저널리즘으로 굳이 PD 저널리즘을 언급한 것은, 기존의 좌파들의 미디어에 대한 생각들이라는 것이 기성 미디어에 대한 비판에만 그치고 그 안에서의 ‘생성’이라는 측면, 새로운 변곡점들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적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핍과 불편함을 전해준 것 중 가장 안타까운 사건은 진보 학계의 저널리즘 논의 부실이었다. 우리가 인용하고 언급할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동안 펴냈던 저널리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은 학술 논의로까지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저널리즘에 대한 진보적 학문 논의가 이렇게 부족하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작업이 없었으니 학계 내 진보에 속하는 편에서는 학계 내 의제를 주도하지 못했고, 그런 탓에 방송현업에 진보성을 전하는 데 실패한 것 아니었을까. 탄핵 방송 공정성 공방에서도 보고서 내용을 부정하는 것에 그쳤다. 대안적 평가 기준은 엄두도 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p.11).

진보 진영에서는 늘 그래왔덧이 개량적이지 않되 대안적인 저널리즘을 형성하려 노력해 왔다. 이른바 대안 미디어를 구상했고, 인터넷 시대를 맞아 과거와는 달리 편의성에 힘입은 채 구체성을 띤 작업들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기존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비판적 담론으로 일관할 뿐 생산적 제안을 내놓지 않는다. 필자들이 제안한 이중 전략에 무관심한 탓이다. 대안 미디어를 만드는 일을 함과 동시에 제도권 저널리즘에도 새로운 기운이 돌도록 하는 생성적 비판과 담론을 구성해 내야 한다(p.223).
</BLOCKQUOTE>
PD 저널리즘이라는 것은 역사적 생성물이다. 민주화라는 국면에서 기자들이 데스크의 압력, 기사 삭제, 출입처와의 관계 등의 이유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기율에서 자신 한명 한명의 목소리가 중요한 PD들이 사회적 소수자, 약자들의 이야기를 뿜어내기 시작하면서 생성된 것이다(5장).

그런 차이들은 심층 취재를 통한 의 기획 보도, 그리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다큐멘터리로서의 기획, , 등을 통한 PD들의 사회적 진보성 표현. 그리고 그에 대한 시민사회의 조응, 반대편에서의 조중동의 비난과 YTN 기자들의 황우석 사태시 문제제기와 같은 반발등을 불러오기도 했다. </p>

사실 팩트는 중요하다, 하지만 팩트를 뽑아내는 기자 혹은 PD의 의도라는 것은 언제나 꺼질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인정하면서 의견을 싣는 PD들의 프로그램 제작 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조중동이 말하는 “저널리즘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PD들이 주관적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책임지지 않는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는 악평은 사실 비난에 그칠 뿐, PD들은 10년 가까운 도제생활을 해야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무력화된다. 중요한 것은 뽑아내는 보도들의 통찰력과 깊이다. 뉴스 스트레이트 기사들의 취합이 그 날 그 날의 현장성의 강점이 있다면, PD 저널리즘은 조급하지 않게 준비했다는 점에서 오는 깊이와, 영상과 음향을 동시에 구현하는, 그리고 또 그것을 잘 아는 PD 집단이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방송의 힘을 나타낸다는 장점을 가질 수 있다.

다음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총격을 받아 운명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월트 크롱카이트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앵커의 울음은 미국 방송 저널리즘에 관한 담론을 두텁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기자가 자신의 기사에 감정을 싣는 일은 과연 용납될 수 있는가,’ ‘기자라 할지라도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국가적 감정에 동참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등 많은 논란이 오고 갔었다. 그 사회의 방송 저널리즘이 모범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사건을 언제나 격 있는 논의로 이끌고 갔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제작자의 과거사를 들추고, 허물을 침소봉대하고, 차이 나는 부분을 저주로 환원시키는, 씻기는 아이를 구정물과 함께 버려 버리는 단순함으로는 어떤 사회적 생산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p.191). </BLOCKQUOTE>또 한동안 PD들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지만, 기자들이 출입처 중심으로 돌고, 단신으로만 처리하면서 보여주지 않던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들을 심층적으로 1시간 정도 이상의 시간동안 보여주어 아젠다 셋팅을 한 것에 있었던 것이다. 한미 FTA 라던가, 최근의 광우병 이슈등이 이슈화 되었던 것들을 보면 그 중심에는 항상 PD 저널리즘의 선전이 있었다. 을 검찰이 수사하겠다는 이야기도 그 파급력에 대한 반증이다.
 
이런 이야기는 기자가 무능하다거나, PD가 우월하다는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라고 저자들은 누누히 강조한다. 권말의 인터뷰에서 어떤 PD는 기자저널리즘과 PD저널리즘은 궁극적으로는 합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기질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조직의 문화라는 것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p>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사회적 효과다. 고민이 된다.
 
<FONT color=#0000ff>난 어쩌지?</FONT>
 
책을 다 읽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이 잠깐 사그라들었다. 한동안 또 PD 하겠다고 난리를 칠 것 같다. 기질상 PD가 확실히 맞겠다는 생각이다. 기계적 중립이 아닌, 사회정의를 위한 방향에서 ‘진실’을 말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내가 움틀 수 있는 공간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SPAN></TD></TR></TBODY></TABLE>

http://flyinghendrix.tistory.com<SPAN class=dtreviewed title=2008-07-22T06:03:04>2008-07-22T06:03:04</SPAN><SPAN class=version>0.3</SPAN><SPAN class=rating><SPAN class=value>10</SPAN><SPAN class=best>10</SPAN></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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