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횡단하여 바라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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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vAlign=top><A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543361&ttbkey=ttbpanic822253001&paperid=2229281" target=_blank><IMG alt="이명박 더티댄싱" hspace=5 src="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95543361_1.jpg" align=left border=0></A><A class="fn url" style="FONT-WEIGHT: bold; COLOR: #369; TEXT-DECORATION: non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543361&ttbkey=ttbpanic822253001&paperid=2229281" target=_blank>이명박 더티댄싱</A> – <IMG alt=8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8.gif" border=0>
장한섬 지음/배꼽주인</TD>

<SPAN class=description><FONT color=#003366>
현 시대를 바라보는 비판자의 자세
</FONT>

우석훈이 ‘토건공화국’에 깔려있는 우리 시대의 ‘상식’의 붕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다. 2008/06/20 – [Reviews] – 직선들의 대한민국 – 문제는 우리들의 미학이다!
<DIV class=ttbReview>




<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082888&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FONT color=#000000>직선들의 대한민국</FONT></A> – <IMG alt=10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10.gif" border=0>
우석훈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TD>
<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etc/book/coversum/8901082888_1.jpg" border=0>
</DIV></p>

그것이 거대한 우리 시대의 이념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이었다면, 이제 그 접근을 가지고 우리 시대를 구성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에 대한 통찰 역시 유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접근이다.

저자는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에 관한 논의들을 가지고 미국의 영화들을 통한 시대를 관통하는 논리에 대해서 펼쳐보고, 곧 이어 그 방법으로 한국에서의 시대적 논의들과 영화를 통한 해석을 또한 시도한다.

<FONT color=#003366>왜 이러한 시대가 왔는가? – 관념 : 토건제국 에피소드</FONT>

김대중 시대와 노무현 시대가 왜 고꾸라져서 정권교체가 생겨났는 지를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분석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쉬리>를 통해 바라보는 김대중 시대는 ‘햇볕정책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권력의 관점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그 권력의 바뀐 주체 역시 허약한 지반위에 있다는 것. </p>

노무현 시대를 바라보는 그의 분석은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데, <실미도>가 무기력한 권력앞의 패배하는 개인을 말한다면, <태극기 휘날리며="">는 다시 가족으로 회귀되어 ‘가장’을 말하는 장동건, <왕의 남자="">는 결국 실패한 노무현의 개혁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괴물>의 경우 “가난한 가장이야말로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p>

그들은 권력에 비례하는 사회적 윤리와 책임이 없다. 그 때문에 모호한 인간이 되고 말았으며, 항상 이런 식이다. – 개혁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는 위험하다고 충고한다. 변화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기존의 방식이 옳다고 조언한다. 참여를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중립이 공정성과 객관성의 척도라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관성을 유지시켜준다(p.66).
</SPAN></BLOCKQUOTE></TD></TR></TBODY></TABLE>결국 이 시대의 도래는 ‘보수’의 프레임을 전반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탓 또한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어정쩡한 ‘개혁드라이브’는 사람들에게 ‘개혁피로감’을 제공했고, 실제 ‘진보적 방향’에서의 개혁이랄 건 아무 것도 없었으며, ‘민주화 엘리트’들은 순식간에 ‘토호’들과 영합하여 ‘개발주의’ 프레임 안에 갖혀버렸고, 이는 곧 이어진 ‘국민성공시대’의 도래를 예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들이 보여주는 은유는 이러한 시대의 반영이 아닐까?

<FONT color=#003366>이 시대의 밑바닥 – ‘개발주의’
</FONT>

저자의 인식을 통해서 바라볼 때 한국에 가장 강하게 깔려있는 이념이라는 것은 ‘개발주의’이다. 총선에서의 한나라당의 수도권 돌풍에 가장 큰 변수가 무엇이을까? 그것은 바로 ‘뉴타운 바람’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세입자라도 동네의 땅 값이 올라가고 뉴타운이 개발되면 살림살이가 나아질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사람들은 한나라당 후보를 찍었었다.

하지만 단순히 뉴타운 개발은 ‘개발주의’의 결과물이었을 뿐, 그것 자체가 ‘개발주의’를 추동한 것은 아니다. 즉 문제는 ‘개발주의’이다.

우리가 공간을 인식하는 것은 지하철 노선도처럼 RPM(분당 회전수)에 의해 밟고 지나가는 동선이 그어진 추상적인 궤도에 불과하다. 공간에 대한 추억과 이웃과 시간의 켜가 자리 잡은 구체적인 마을은 사라지고 없다.

서울은 자연공간과 사회공간이 아닌 구획된 계층 간의 사적거주지로 재편되고 있다. 특히 강남으로 도시의 축이 이동하면서 사적영역이 강화되고 공적영역이 축소되고 있다. 이는 서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확대되고 있어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공교육과 부동산 그리고 금융까지 강남거주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도시가 사유물로 관리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 사이의 신의는 자본의 편의로 교체되고, 국민의 1% 특권층만이 정치적 발언과 행위까지 독식하는 상황으로 번진다(p.83).
</BLOCKQUOTE>
문제는 사실 이러한 개발주의의 배경 뒤에 그 영광을 위해서 희생된 희생자들의 핏자국이 묻어 있는 데에 있다.

청계천이 2005년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된 것은 철저히 제작자 입장에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세금낭비이자 반환경적 반문화적이다. 더 큰 문제는 반민주적이라는 사실이다. 그 상징물이 청계천 시원지에 자리 잡은 소라껍데기다. 공공미술품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성과 문화적 역사적 맥락과 단절된 채 결정권자의 독단에 의해 선정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청계천의 상징인 수표교와 오간수교를 복원하지 않음으로써 역사성까지 무시했다(p.94).</BLOCKQUOTE>
마지막 장인 Z. 욕망은 이 시대의 엘리트들의 밑바탕을 파헤친다. 사적 이익과 공적 영역을 혼돈하는 이들에 대한 예리한 묘사가 나온다.

영어 공교육 강화의 명분이 기러기 아빠의 비애를 없애주자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기러기 아빠 이하의 가장과 가정은 보이지 않는다(한국지도층의 현실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영어 열풍은 교육적 접근보다 권력유지의 기능이 더 크다(p.120).

차기 정부나 그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영어’는 수출용이라기보다 ‘내수용’이다. 이걸 통해서 이득을 볼 당사자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영어를 잘하는 이들이다. 이를테면 의사소통 수단에 불과했던 영어가 졸지에 ‘영어 전문교사’라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경제적 수단’이 되는 것이다.
결국 차기 정부의 영어 정책은 ‘강남’으로 표상되는 한국 사회의 경쟁 질서를 더욱 공고하게 하면서, 이런 경쟁 구도에서 탈락할 위기에 놓인 중간 계급을 구원하기 위한 시혜이다.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과감하게 조기 유학을 보낸 ‘중간 계급 기러기’들은 훌륭하게 교육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기 뜻을 이루는 것과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정말로’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시사IN> 제23호, p.122에서 재인용).</BLOCKQUOTE>2008/07/28 – [A day in the life] – 집으로 가는 길.. 생각해보니,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p>

이 책의 저자는 한나 아렌트와, 조지 레이코프, 에리히 프롬부터 시작해서 강준만, 우석훈, 한홍구를 횡단해서 녹여 놓는다. 푸코식의 계보학 또한 등장하는 데, 그것을 적재적소에 잘 버무려 놓은 느낌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화학반응까지는 아직 가지 못했다는 생각도 좀 든다.

이를테면 노엄 촘스키와 조지 레이코프를 언어학자에서 정치학자로 점차 가게 된 것을 동류항으로 묶으려하는데, 사실 노엄 촘스키는 ‘프레임’보다는 그 언어 밖의 현실과의 괴리를 더 많이 말하는 편이고, 레이코프는 그런 급진적 현실을 크게 언급하지 않고 에둘러치는 편이다.

그리고 종종 들뢰지앙들이 쓰는 언어와 한나 아렌트,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바들이 섞일 때, 그들의 지적 배경 자체가 완전히 다른 점이 얼마나 인지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 더 조심스러웠어야 하지 않나?

<FONT color=#003366>치명적 미래를 막기 위해서
</FONT>

앞으로 개발주의는 공론영역의 시민이 아닌 사적영역의 근로자와 납세자만을 시민으로 인정할 것이다. 또한, 촛불집회와 같은 공론영역을 원천 봉쇄시켜 분열과 고립으로 해체시킨 후 개인의 성공만을 부추기며 계층 간의 갈등을 더욱 조장할 것이다. 그러면서 공간을 사유화하고, 언론을 장악하고, 인간존재의 근원인 지구까지 파괴할 것이다. ….(중략)…. 개발주의가 원하는 것은 자기 예언적인 패배주의다(p.157).
이런 시대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난, 아무래도 ‘감수성’에 대해서 자꾸만 이야기하게 된다. 2008/07/06 – [Reviews] –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2008, 오창익, 삼인) – 비릿한 한국사회의 모자이크

세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문제는 그걸 위해서는 최소한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물질적 여유가 중요하고 시간이 중요한 것이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빠듯할 때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하여서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문제’에 개입하지 못한다고(이를 테면 교육감 선거에 대한 불참) 그들을 힐난하거나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의 문제 또한 있다는 것이다.

그 ‘감수성’이라는 것을 살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난, 우석훈의 말처럼 ‘아방가르드’들의 탄생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이 ‘정책적’이고 ‘실질적’인(실용이라는 말이 욕이 되었으므로 ‘실질’로 바꾼다 substantial)  ‘좌파’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장기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함께 구성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말이다. 음악이, 미술이, 그리고 연극과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꾸만, 그 아방가르드의 정신이 그리워진다.

뱀꼬리1. 이 책에는 생각보다 많은 오탈자가 있다. 비문도 깨나 많다. 1인 편집이었을까? 아니면, 영세한 출판사라서 그랬을까? 세심한 고려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읽다가 갑자기 멍해질 때가 있었다.

2. 이 책을 운동가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괜찮을 듯 싶지만, 공부하는 사람의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더 많은 가다듬을 필요를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더 훌륭한 생각들의 정리가 되지 않았을까?

http://flyinghendrix.tistory.com<SPAN class=dtreviewed title=2008-08-06T11:31:55>2008-08-06T11:31:55</SPAN><SPAN class=version>0.3</SPAN><SPAN class=rating><SPAN class=value>8</SPAN><SPAN class=best>10</SPAN></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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