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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을 생각해 본다 – (생태주의 읽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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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고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알랭 리피에츠라는 저자가 미셸 아글리에타와 함께 ‘조절이론’이라는 이론적 틀로 경제를 진단해왔다는 것 정도를 알고, 그 조절이라는 것이 항상 ‘축적양식’이라는 것과 자본주의의 양상을 추적했다는 정도를 기억한다. 대학교 4학년 때 <국제정치경제론> 강의를 들으면서 추천도서에 미셸 아글리에타의 <자본주의 조절이론="">가 있었다는 것 정도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자본주의>국제정치경제론>
이 책을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사고 싶어했었는데,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아 이제서야 샀다. 우석훈의 추천이 없었으면 정말 손을 대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번엔 결단을 내렸다. 제목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사고 싶어했으나, 사실 요 얼마 전만 해도 <생태주의>라는 것을 ‘사치’라고 생각해왔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마 크게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생태주의>
괜찮은 책은 늘 절판이라고, 이 책 역시 인터넷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이 되었고, 교보문고에 하나 남아있는 것을 “없어지기 전에 구하자”라는 마음에 샀다.
저자는 “대부분의 다른 이들처럼 나 또한 적색을 거쳐 녹색의 길로 들어서게 됐는데, 이는 좌파에 실망감을 느꼈기 때문이다”(p.9)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좌파는 프랑스 사회당 식의 좌파 혹은 맑스 레닌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산의 사회화가 그 중심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한다. “생산 지상주의” 때문이다.
사실 노동운동은 여성주의이거나 생태주의적이지 못했다. 이처럼 각각의 사회운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때문에 필연적으로 여러 운동들이 수렴될 수 없었다. 이 같은 수렴이 이뤄지려면 일종의 ‘사회적 생산,’ 즉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정치적 구호가 창출되어야 했다(p.13).
나는 정치적 생태주의가 바로 각자의 희망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상의 틀과 패러다임이 될 수 있으며, 녹색 정치가 그 기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녹색당이 기름띠 속에 갇힌 가마우지 새를 걱정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녹색 정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포괄적인 기치들이 모두 모여 있는 우산, 또는 무지개를 잡아내는 장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적 생태주의는 적색과 구조적으로 비교가능한 하나의 패러다임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즉 구체적인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생산지상주의가 드러내는 ‘현 문제들’을 분석하고 최대한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pp.13-14).</BLOCKQUOTE>예전에 차문석의 <반노동의 유토피아="">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가장 크게 와닿던 부분이 인간의 해방을 위해서 생겨났던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 결국에는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생산의 정치’를 수렴함으로 인해서 해방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모두를 옥죄는 ‘억압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반노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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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502227X&ttbkey=ttbpanic822253001©Paper=1"><FONT color=#000000>반노동의 유토피아</FONT></A> – <IMG alt=10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10.gif" border=0>
차문석 지음/박종철출판사</TD>리피에츠의 인식틀에도 그런 생각들이 깃들어 있다. 중요한 것은 ‘생산’으로 모든 것을 수렴하는 인식에서 좌파가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생각 근저에 깔려있는 ‘생산지상주의’가 좌파의 진정 걷어내야할 눈비늘 같은 것이리라.
나는 항상 ‘여유’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최소한의 ‘비빌데’가 없는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처참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자면, 그는 공동체의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성격을 부여받기 힘든 사람이 될 것이고, 자신의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둔감할 수밖에 없고, 지껄임과 타락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된다.
맑스는 노동하고 낚시하고 토론하는 ‘자유인의 공동체’를 말했지만, 좌파들이 만들어 놓았던 ‘사회구성체’들에 사실 그러한 ‘자유인의 공동체’가 있었는 지에 대해 의문을 삼는 것이 비단 우파만의 일은 아니리라 본다.
‘비빌데’가 있어야 자신의 온전한 이익이 아닌 다른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가 있다. 그렇기에 생태주의자들의 ‘생산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유효하다. 생태주의자들이 ‘환경문제’(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류)에만 국한되지 않는 ‘정치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불편한>
그렇기에 생태주의자들의 가치라는 것이 연대성, 자율성, 생태적 책임성, 민주주의라는 점은 적실하다.
또한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를 읽으면서도 생각이 들었던 문제인데, 그것이 리피에츠등의 생태주의자로부터 출발했다는 단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미래 세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환경 파괴라는 것은 단순히 지금 ‘내가 마시는 공기’가 좋지 않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가 살 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우리가 누렸던 것을 ‘미래 세대’에게서 빼앟고 있다는 것, 즉 ‘미래 세대’에 대한 착취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심성에 대한 문제들. ‘권력의 획득’이라고 정해진 정당론의 ‘정당’에 대한 명제에 대한 파괴가 생태주의의 기치이기도 한데,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현실 세계의 복잡성이나 수많은 모순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고, 특수한 사회관계(경제, 에너지 소비 또는 그 밖의 것)에 의한 ‘최종 심급의 결정’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운동 개념이 없기 떄문에, 녹색주의자들에게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의 결정적 계기, 즉 최고 권력의 획득(적색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이 가능하지 않다.
…..(중략)…..
국가권력이 노동관계, 소비자의 멘탈리티, 젠더 관계를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보다는 미셸 푸코와 펠릭스 가타리의 후예로서, 녹색주의자들은 과거와 수많은 작은 단절을, 그리하여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분자혁명(molecular revolution)을 꿈꾼다. 이들 또한 권력을 쥐게 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고 투쟁을 진행시킬 수 있으며 역학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것, 즉 수많은 행동양식의 변화이다(p.51).이제부터 진보주의는 연대의 윤리라는 이름으로 항상 ‘가난한 자의 편’에 있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가난한 자들의 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소외 자체가, 운명은 반드시 역전될 것이라는 해방의 변증법의 전제조건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주의는 지금과는 다른 근대성을 표방해야 하며, 행동의 자유, 혁신의 자유, 앎의 자유,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자유를 옹호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와 동시에 연대와 생태적 책임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자율성에 대한 열망을 표출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유럽을 재창조해야 한다(p.149).</BLOCKQUOTE>정치적 생태주의는 “이성의 겸손이며 의지의 포부”라고 저자는 결론 짓는다(p.188).
이 책은 1990년대 중반에 나온 책이다. 지금 프랑스의 녹색당은 어떨까? 그게 좀 궁금하고, 리피에츠는 90년대의 유럽연합의 이슈들-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생태주의자들이 처해야 할 입장에 대해서도 길게 논의하고 있는데 이는 통화주의자들의 이론에 대한 반박이 주된 것들이다. 또한 프랑스 국내정치 이야기-좌파와의 관계-도 한 장을 차지한다.
여러가지 생각들을 해보게 되는데, 생태주의자들의 명제가 너무 환상적이랄까 라는 생각도 좀 하긴 하는데, 동시에 그들이 유럽이라는 공간에서 펼쳐내는 활동 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한다.
내가 생각했다는 좌파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적’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리피에츠가 말하는 ‘녹’의 입장이라는 것과 크게 차이를 느끼지는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말이다.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어 볼 필요를 준다. 연대를 통한 돌파로 ‘현실’에 대한 대응을 하는 생태주의자들에게 조금 더 주목을 해 본 후 판단해 봐야겠다.
하지만 녹색당은 커녕, 매번 ‘좌빨’에 대한 반사작용에 함몰되는 한국의 현실. 안타깝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DIV></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