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보라 : 전인권의 ‘이중섭 읽기'(전인권,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 2000)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10점
전인권 지음/문학과지성사

정치학자 전인권, 미시 문화과학자 전인권

남자의 탄생10점
전인권 지음/푸른숲

<남자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1년 남짓 된 듯한데, 본인의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와의 관계를 통한 자신의 사회적 ‘남성’으로서의 탄생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그 사람이 ‘정치학자’라는 것에 잠깐 놀랐으나, 곧 “나 역시 그런 정치학자가 되어야 겠다”라는 다짐으로 책을 덮었다. </p>

사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20세기 후반의 정치학자들(내가 흔히 ‘정치기술자’라고 표현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원래 정치학자들은 대체로 인문주의자들이었고, 사상사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해박했고, 문화 예술에 대한 지식 역시 깊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상’을 사상한 정치학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공학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고, 현실을 읽어내는 층위로서 ‘국가, 의회, 정당, 선거, …’ 순으로 떨어뜨려 읽는 것이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을 만드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좀 더 다루어야 할 주제다).

미국정치학회장을 했던 한나 아렌트의 ‘문화적 깊이’는 뭐 따로 이야기할 필요 없는 일이고, 정치학에서 반드시 떼어놓아선 안될 시민계약론자들(홉스, 로크, 루소 등)이나 강력한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를 말하려고 해도,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과 떨어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그런 것들이 다 사장되어 버린 시절에 미국에서 정치학을 배워온 이들에게 정치학을 ‘사사’ 받아야만 했던 나는 다양한 이야기들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그런’ 정치학과는 연계시켜보지 못했다. 그런데 전인권의 책들 두권을 읽고서, 다시금 에너지를 채웠다는 거다.

미술을 말하고, 다시 미시적인 한국사회에서의 ‘남자’로 만들어 지는 과정을 말하는 거. 그것 역시 정치학이다!

이중섭, 이 사람을 보라! – 그와 그의 그림을 온전히 보기

전인권은 “이중섭에 대한 나의 관심은 어떤 천재 예술가의 특별한 정신 세계를 규명해보겠다는 특수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p.22)라고 말한다. 오히려 ‘뼛속까지 한국적인 화가’ 이중섭을 발굴해 내려는 거다. 우리와 함께 호흡했던 이중섭을 보고 싶어하는 거다.


이중섭을 이해했던 사람들은 보통 ‘광기어린’ 그의 말년의 모습을 가지고 그를 단정하고 만다. 그런 그를 ‘천재’로 묘사하거나 “기행과 일화가 과장되었을 뿐 작품 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다”(p.24). 이런 식으로.

그런데, 전인권은 그런 모습을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가 어떤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고, 뭘 표현하고 싶었는 지에 대한 평가가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중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에 관한 신기한 에피소드를 많이 수집해 보아도 작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결여된 생애 이야기는 속 없는 만두처럼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중섭 연구사는 작품에 대한 이해보다 “이중섭이 천재인 것은 분명하다”거나 “별것 아니다”는 식의 논쟁이 주류를 이루었다(p.25).

그의 그림의 디테일을 엮어서 어떤 하나의 흐름을 보여준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거다.

아무래도 그걸 엮기가 힘들었던 건, 그의 큰 그림들의 경향인 ‘소’ 그림과, ‘군동화'(모여있는 아이들의 그림)가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중섭의 소는 정물(靜物)이나 동물(動物)이라기보다는 사람에 가깝고, 요동치는 인간 정신을 함축한다. 박용숙은 소그림의 이런 특성을 가리켜 “혼의 치환물”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이중섭은 표현주의 또는 야수파계열의 작가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반면, 군동화의 아이들은 자기들의 세계에 빠져 있다. <애들과 끈="">에서도 보이듯이, 아이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고 있다. 이중섭의 소와 달리 바깥 세상에 대해 일체의 관심과 경계 의식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그림 속의 아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완전한 무위(無爲)의 상태에 빠져 있다(p.32). </p> </blockquote>




딱 떨어뜨려 놓고 보면, 사실 같은 사람의 작품인 지 모를 수 있다. 바로 거기에 이중섭을 읽는 난점이 있다는 거다.

   소그림 군동화
소재의 수 한  마리 소 여러 아이
 붓질  강한 터치  가는 선묘
 주인공의 시선  강렬한 시선을 던짐  눈을 감음
 목  목이 있다  목이 없다
 머리  고개를 쳐든다  고개를 뒤로 젖힌다
 몸  튼튼한 성인의 자세  유아적 자세
 말  말을 하려고 한다  침묵한다
 소리  소리가 난다  화면에 흡수된다
 종합 비교 적극적이며 강렬하다  수동적이며 평화롭다

(p.39)

이런 그림들 말고도 또한 이질적인 그림들도 있다.

이중섭 예술의 전체적 구조는 소->(엽서그림)->닭->어린아이와 가족, 즉 하나->(엇갈린 시선)->둘->여럿의 계기적 발전 과정을 거친다(p.55).

 이중섭 예술의 이 같은 구조 파악은 그의 예술이 연애, 결혼, 자녀의 죽음 같은 개인적 체험과 정확하게 조응한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위와 같은 구조의 존재는 이중섭 예술이 일관된 내면적 논리의 표현 과정임을 추측게 하며, 그의 예술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종의 심리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이중섭 예술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이중섭 이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특히 소그림 위주의 감상에서 벗어나 그의 예술 전반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하여 닭그림과 군동화도 소그림에 버금가는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한다. 그것은 또한 소그림에 대해서도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며, 그외 세부적 쟁점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의 문을 열어놓는다(p.56).

이제 이야기는 이러한 이중섭의 그림들이 어디에서 오는 가에 대한 전인권의 역사 추적으로 진행이 된다(난 사실 이런 종류의 추적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의 아버지 이희주는 문약하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일설에는 모종의 정신분열 증세를 나타내다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중략)……

이중섭의 어머니는 여장부 기질과 예술적 재능을 함께 타고났던 것 같다. 과장된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밥을 지을 줄도 몰랐고 짓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강정이나 깨엿같은 재래식 과자 만들기와 바느질과 수놓기 같은 공예적 재능은 전문적인 경지에 이르렀다(p.65).

이렇게 보면 이중섭의 우울한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예술적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이중섭은 새 옷을 사면 자신의 몸에 맞게 스스로 길이를 잘라 입기도 했으며, 산에서 나무를 꺾어다 자신이 사용할 담배 파이프를 만들고 거기에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심지어 나무 펜대를 사도 그것을 사포로 문질러 자신에게 맞는 굵기로 만들어서 사용했다(pp.65-66).

하지만 이런 ‘태생적 배경’과 맞물려 평양 외가에 살면서 고분 안에서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들, 그리고 그런 토양에서 문화적 감성을 키웠던 것들 역시 그를 키웠을 것이다(p.69).

잘 나가는 집안의 막내아들로서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재주를 맘껏 펼칠 수 있었고, 또한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냥 그런 부르주아의 아들만이었던 건 아니다.

소는 이중섭 예술의 원형이요, 세상을 관찰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피난 시절, “이즈음의 소는 옛날 유학 시절 부산을 거쳐 원산으로 가면서 보던 소하고는 달라. 그때 소는 평화로웠는데, 요즘 소의 눈은 그 옛날 소의 눈이 아니야”라는 식으로 소를 통해 세상 인심을 가늠할 정도였다. 아마도 전쟁 속에서 소들도 고통을 당했을 터이다. 이중섭은 소의 표정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고 한탄했던 것이리라(p.75).

하지만 이중섭의 결정적인 작가로서의 모든 것을 뿜어내게 만든 것은, 그의 아내 마사코였다. 이중섭은 그녀에게 ‘남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한다. 둘이 붙어있는 동안의 희노애락, 첫 아이의 죽음, 그리고 둘이 피난을 다니면서 바라보았던 제주도의 풍경이 모두 이중섭에게는 엄청난 걸작들을 만들어내는 에너지였고, 마사코와 자식들이 떠나갔을 때의 절절함 역시 그의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첫 아들의 죽음은 이중섭 예술의 새로운 장르인 군동화를 탄생시켰다. 물론 이중섭은 그전에도 어린이를 좋아했고 때때로 어린이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어린이 모습을 한 군동화가 본격화된 것은 첫아들의 사망 직후부터다. ……(중략)…… 이중섭은 아들의 관에 “우리 새끼 심심하지 말라고……”하면서 여러 가지 어린이 그림을 그려 넣었다고 알려져 있다(pp.80-81).

이렇게 볼 때, 이중섭 예술의 중요한 영역은 자신의 성장과 자아의 발견->연애->결혼->자녀의 사망-> 가족의 형성과 이별 등 자신의 인생 행로와 정확하게 조응하면서 탄생했다. 바로 이런 이유 떄문에 그의 예술은 신변잡기적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아무튼 이것은 중요한 특징이며, 그의 예술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내면적 논리가 있음을 암시한다(pp.82-83).

그에게 있어 작품 활동은 그 개인의 활동이 아니라 아내에 의해 정신적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했던, 정신적으로는 아내와의 공동 작업 같은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p.98).

두 사람의 관계를 볼 때, 실제의 관계에서 아내가 그런 상담과 지도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사랑의 느낌, 아내로부터 오는 사랑의 느낌이 그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 같은 느낌이 순간적으로나마 파괴되면 이중섭은 작품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또 이처럼 강력하게 정신적으로 아내와 결합 또는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예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어떤 일관성과 체계성을 가지게 되었다(pp.100-101).

그는 아마 따뜻한 아빠였을 것 같다. 그리고 폼잡고 에헴하는 아빠가 아니라, 아이들과 같이 뒹굴르던 아빠였을 것이다.

소리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장지틈으로 들여다보았더니 네 식구 모두 나체가 되어 이불 위에서 뒹굴고 있지 않겠는가. 엄마 아빠의 이불을 아이들이 마구 잡아당긴다. 그럴라치면 아빠는 ‘요놈’ 하면서 소처럼 엉금엉금 기어 좁은 방을 돌고 돈다. 아이들은 깔깔대었고 중섭의 불알이 덜렁덜렁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들은 킥킥거리다 억제할 수 없어 후다투닥 도망쳐나왔다(한묵, pp.128-129에서 재인용).



에로티시즘 역시 그런 감정에서 나오는 것들이지, 껄렁한 춘화가 아니다.

음담패설의 성적 표현은 대체로 이런 범위 안에 있다. 그것은 가족 안에서 존재하며 밥 먹고 배설하고 껴안고 사랑하는 가족사의 일부로 자리매김된다. 이 같은 상황은 은박지에 그린 가족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즉 그에게 성은 저급한 감정이나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의 성은 가족 안의 성이란 점에서 오히려 성스럽다(p.134).

시대의 화공, 공동체의 화공 이중섭

그렇다고 이중섭이 항상 제 새끼와 제 아내만 예뻐한 나머지 그 가족주의에서만 허우적 댔던 것은 아니다.

이중섭은 그의 작품 속에서 애인(엽서그림)->남편(닭그림)->아버지(가족도)라는 관계인a man of relations으로만 등장할 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중섭 예술은 ‘누군가의 누구’가 되어야만 삶의 의미가 있는 공동체적 자아관을 보여준다(p.103).

놀랍게도 이중섭은 자기 자신을 화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화공, 그것도 참다운 화공, 정직한 화공이라고 했는데, 이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 자신을 독립된 예술가가 아니라 중세 시대의 도공들처럼 하나의 공동체에 봉사하는 성실한 일꾼으로 자기 자신을 정의내렸던 것이다(p.106).

그는 훌륭한 예술, 참다운 예술, 행동하는 회화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으며, ‘새로운 생명을 내포한, 믿을 수 있는 방향을 지시하는 회화’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술이 우리들의 생활에 무언가 유익한 작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pp.106-107).

결론적으로 이중섭은 공동체적 자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을 화가가 아니라 공동체에 기여하는, 훌륭한 일을 해야 하는 화공으로 이중섭을 정의하도록 했다. 또한 화가가 그림의 대상과 동일시, 자기화personalization를 통해 사물을 파악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렇게 동일시하는 최초의 방법론이 몸찰이었다. 또한 그것은 생명의 사멸을 부정하는 주술의 세계에 문을 열어놓는다(p.115).

그런 공동체적 자아는 확장되었고, 어떨 때는 도교적 이상으로, 어떨 때는 범신론적 사랑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의식적인 것보다는 그의 ‘몸찰’을 통한 것이었다. 그냥 느끼는 대로 표현하였더니 예술이 되는 경지까지 갔다고 해야하나?

또한 그가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위협받던 식민지와 전쟁의 시대에, 소, 닭, 어린이, 물고기, 게, 새, 까마귀 등으로 구성된 ‘가상의 종족’을 통해, 모든 생명의 성스러움과 의미심장함을 옹호하고, 그것들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현대 미술의 체계 속에서 수업 받고, 그런 미술 체계 속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관계로 구시대적 발상으로 보이는 이런 특성이 작품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찬양과 종족적 미의식은 이중섭 예술을 규정짓는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다(p.166).

그는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하려는 화가가 아니라 순수의 극단을 얻으려는 화공이었으며, 예술가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이 땅의 모든 것들을 지켜내려 했던 순교자였다. 그의 예술이 한편에서는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의 소박한 기원, 어린애 같은 열망을 담은 주술의 형태를 띠며, 다른 한편에선 소그림이나 벽화의 추구에서 보는 것처럼 장엄한 제의의 형식을 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중섭 예술의 이런 전개 방식은 일점 일획까지 한국적인 생활 양식과 사고방식을 따르는 한국적인, 너무도 한국적인 것이었다(p.169).

이중섭의 죽음, 그리고….

이중섭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무래도 여자들이었고, 어렸을 때는 엄마가, 그리고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마사코 여사였다(남덕). 하지만 전쟁과 사기를 당해서 얻은 부채 때문에 마사코와 이중섭은 함께 할 수 없었고, 마사코는 일본에 머물게 된다.

그런 생이별은 이중섭에게 한동안은 예술적 모티브를 제공했지만, 점차 그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그는 점점 말라가다가 미쳐갔고, 미쳐갔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다(마사코가 이중섭의 빚을 다 갚는데 20년의 삯바늘질이 필요했다고 한다).

전인권은 마지막의 보론을 통해서 이중섭의 이러한 마사코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떠한 정서인지에 대해서 다시금 보태는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중섭’이라는 사람의 정서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환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이고, 이는 단순한 ‘아버지’에 의한 ‘거세의 공포’가 아닌, 오히려 엄마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실 난, 한국적인 혹은 ‘조선의’ 또는 ‘민족적인’ 이라는 말을 근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발명품’이라고 믿고 있지만, 토속적인 것과 서양에서 전래된 화법들이라는 것이 만나서 부딪혔고, 그것들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냈던 이중섭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엊그제 보았던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에서의 그림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피놀레 파는 여인’이 생각났다. 색조 때문에 그런가?


그리고 또한 생명에 대한 존중, 따뜻한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줄 알았던 그의 모습이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근대적 데카르트적 자아로 주체와 객체를 나누고, 남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려야 겠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스며들어’ 대상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던 이중섭의 그림이 너무나 아름답다. 삶이 퍽퍽한 사람에게 내리는 꽃단비 같다.
너무나 아름다운 이중섭을 이제서라도 알게 된게 굉장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계속 맴맴 돌던 생각인데. 누군가를 따뜻하게 사랑하는 것이 주는 힘에 대해서, 그리고 그 파멸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하지만, 파멸할 것을 알면서도 돌진하는 것이 사랑 아니었던가?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없다는 절망감. 그리고 무력함.

하지만, 그 ‘절망감’과 ‘무력감’마저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 전의 찬란한 봄과 가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