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향연,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름 뺀 해석 –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2003

사랑이라니, 선영아8점
김연수 지음/작가정신

그 남자가 무협지를 읽는 이유, 그 여자가 로맨스를 읽는 이유

대다수의 한국 남자들이 무협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고(사실 이런 표현 쓰기 겁나지만), 대다수의 한국 여자들이 로맨스를 읽는 이유가 있다는 걸 요즘 차차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전개가 빠르고 칼로 종잇장을 베는 서걱서걱한 느낌의 글들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시보다는 소설이, 그리고 소설보다는 논픽션이, 논픽션보다는 철학책을, 철학책보다는 사회과학책을 좋아했다.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보다는, 구조화된 툴론 톱니바퀴 굴러가듯이 명료한 글들. 칼과 테업장치. 그래 그런 느낌의 글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책이나 산문을 안 읽은 것은 아니다. 그래 솔직히 고백해서 시는 지금까지 태어나 딱 한권을 내 돈을 주고 샀고, 나머지는 중학교 <백일장>에서 2등해서 한번 받았고(김영랑, <모란이 꽃피기까지는="">…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상을 받은 부문은 시/운문 분야였다), 또 하나는 동생이 산 걸 내 책인냥 갖고 있는 거 하나다(진은영, <일곱 개로="" 된="" 사전="">). 그리고 솔직히 시 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낭독하듯 읽어본 것은, 2003년 어떤 여자와의 결별 이후 패닉 상태에 빠졌을 때다(예반, <나도 모르게="" 당신께="" 익숙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p>

사람들이 옷 살 돈, 악세사리 살 돈으로 난 책을 사기 때문에, 책을 좀 더 읽기 때문에, 그들보다 조금 더 많이 소설을 읽었을 뿐이라는 것은 인정한다(군대 와서 월급 깨나 만지게 된 이후에는 그나마 옷 사고, 악세사리 사고, 신발 사는 바람에 저축이란.. 참..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읽는 책의 패턴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는데, 남성들이, 한국의 뭇 수컷들이 좋아하는 책들이라는 것은 소설이라 하더라도 담배 한까치 물고 쉭쉭 읽을 만한 만화책, 판타지, 무협지, 그리고 역사소설. 그리고 소설책이 아니라면, <이기는 습관=""> 등의 ‘정글’에서 혹은 ‘전장’에서 승리를 말하는 듯한 류의 자기계발서 정도라는 것이다. 사실 크게 과잉 일반화를 무릅쓰고라도 말하자면, ‘서사’에 강한 글들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디테일보다는 확실히 ‘숲’에 많이 기우는 경향이 있다. </p>

그리고 여성들이, 한국의 뭇 녀자들이 읽는 책들은 그에 반해 중고등학교로부터 하이틴 로맨스, 만화를 보더라도 순정. 소설도 감각적이거나 ‘플라토닉 러브’. 나중에 현실의 맛을 보고 ‘신데렐라 컴플렉스’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들이 찾는 소설이라는 것에는 항상 ‘묘사’에 강한 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행복한 이기주의자=""> 같은 책 혹은, 칙릿류를 읽을 때도 그렇지만, 여성들을 타겟팅한 글들은 언제나 감각적인 ‘묘사’로 묶어진다는. 혹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여성들이 즐겨 읽는 책들에는 ‘디테일’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느껴왔다. 요즘에서 그게 정리가 되었다. </p>

그러면 쓰는 건 어떨까? 대체로 그것도 읽는 경향과 비슷하게 묶이는 것 같기는 한데, 예외들 역시 많아서 일반화가 안된다 이거다.

내가 초기의 공지영을 읽고서 좋았던 것은 호흡이 빠른 서사와 강렬한 표현으로 인해서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는 점들인데. 요즘 그녀의 글이 읽기 어려웠던 것도 그녀의 글들에서 슬슬 ‘디테일’을 챙기면서 읽어야 할 소지들이 생겼다는 데에서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서사’ 중심의 글들에서만 만족을 느낀건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뜸들이면서 읽었던 책들에서 더 많은 감동을 느낀적이 있었고, 요즘처럼 ‘감성’이 살아있는 시즌에는 오히려 말을 ‘씹는 맛’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다는 순간들이 되고 있다.

김연수, 말의 향연, 그리고 사랑에 대한 기름 뺀 해석

김연수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는 책이 유명했던 것 같은데, 사실 소설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고, 기껏해야 ‘사회파’ 혹은 사회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소설들. 그리고 영화화 되었던 몇 몇의 작가들. 솔직하게는 아무런 기준없이 소설을 읽어왔기 때문에, 누가 소설을 잘쓰는 지의 기준에 있어서 <베스트셀러>를 뽑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기준들로 소설을 읽어왔었다. </p>

GQ를 보다가, 김연수를 알게 되었으니, 나도 한심하긴 한데. 어쨌거나. 이번 부산 여행을 하면서 KTX와, 버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이 책을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한 시간 반이나 걸렸을까?

사실 이 책은 저자가 “내게도 팬이라는 게 있다면 이 소설은 그 팬들을 위한 특별판 소설”(작가의 말 中)이란다.

일단 스토리는 차치하고, 김연수의 소설을 이 하나 읽었지만, 다른 소설에서도 얼마나 맛깔난 표현들을 쓸까 기대가 되어서 마구 흥분된다. 시작부터.

부케는 아래로 향한 하얀 불꽃 모양으로 꽃잎을 늘어뜨렸다. 물보라를 일으키는 폭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건 뒤집어진 열정을 뜻하는 것 같았다. 위로 솟구치지 못하고 아래로 향하는 불꽃. 차가운 열정. 무거운 의심(p.13).

‘쫀쫀하다’는 말은 원래 옷감의 발이 대단히 고르고 곱다는 뜻이다. 쫀쫀한 인간들이 가장 살차게 구는 게 조금 삐져나온 보풀이다. 아직은 비인지 눈인지 구별하기 힘든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광수는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다면 꽃이 아니라 신부만 바라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광수는 그만 부케를 보고야 말았다. 친구 명희를 향해 선영이 던지려던 부케의 오른쪽 윗부분에 부러진 채 달랑달랑 매달린 팔레노프시스 한 송이가 광수의 마음에 재를 뿌렸다. 그건 새로 산 스웨터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 삐져나온 털실 한 올과 비슷했다(p.16).

표현들은 눈의 시선을 타고 오르락 내리락하고, 흔히 쓰는 상투적 표현들에서 벗어난 ‘아래로 향하는 불꽃, 차가운 열정. 무거운 의심’의 패러독스가 눈을 잡아끈다.

현란한 묘사 때문에 이야기가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말의 향연. 그리고 살아뛰는 감각어들의 파도다.

미혼남에서 유부남으로 바뀌는 과정은 달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일과 비슷하다. 유부남이 되면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중력이 여섯 배나 강해진다는 사실에 멍멍해진다. 하지만 달에서 지구로 바로 귀환할 수는 없다. 반드시 무중력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신혼여행이 바로 그런 무중력 공간에 해당한다.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법적인 미혼녀의 육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탐닉할 수 있는 그 밀월여행은 확실히 무중력 상태와 닮았다. 귀 안쪽에 있는 반고리관이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감각신호들이 달라지는 현상이나 뇌의 지시를 몸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현상은 우주 공간에서나 신혼여행지에서나 늘 일어나는
일이다
(pp.18-19).

결혼한 당일날 꺾여있던 부케를 보면서 의심을 시작하는 순수한 사랑을 믿지만 맹한 남편 광수. 순수한 첫사랑을 했고, 그 여자와 결혼에 골인한 남자.

그리고 그 남자와 결혼한, 광수의 친구 진우와 사귀었던 여자 선영(“선영아 사랑해”를 외치는 사람의 아내).

소설가로 자유로운 영혼에다가 숱한 여자와의 ‘즐거운 밤’을 즐겨오던 진우.

사실 “미안하지만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그런데 광수는 몰랐다. 그래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의심 덕택에 몇 가지를 캐내지만, 결국 남는 것은 허탈할 뿐.

사실 선영은 결혼직전에도 진우와 잘뻔 했다. 진우가 ‘사랑했다’라는 말과 짝이 맞지 않는 횡설수설을 떠들지만 않았어도. 물론 그것이 결혼을 바꾸지는 않았겠지. 으레 하는 눙과, 거짓말이 뒤섞였다가 그것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눙’과 ‘거짓말’의 경계가 명확해 지고, 그 말을 뱉는 놈에 대한 환상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헤헤헤. 왜 그러니, 선영아. 너를 사랑한다고.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한다고. 왜 그러니? 아까 너도 술 마시면서 내가 좋다고 말했잖아. 지금도 나를 좋아한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아직도 너를 사랑해. 정말이야.”
“정말이야?”
“너, 진짜 나를 사랑하기는 한 거니? 정말 그랬니?”
“오죽했으면 내가 그때 ‘얄미운 사람’을 그렇게 소리내어 불렀겠니? 기억 안 나?”
“너 그게 다 기억나니? 니가 왜 그때 ‘얄미운 사람’을 그렇게 소리내어 불렀는지?”
“그게 기억이 다 나면서 나한테 지금…..”
“나한테 지금 나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거니?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니?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니?”(pp.143-145)

그렇게 해서 된 결혼. 광수의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시작된 의심이라는 것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다.

사실은 내가 보기에 ‘얄미운 사람’의 가사에 대한 선영의 짜증 때문에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시작된다. 사실 시작된 건, 가장 순수한 ‘광수’에게서만일 수도 있다.

“‘세계문구점’ 말고 ‘얄미운 사람’ 말이야. ‘얄미운 사람’ !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려고 하는데 ‘얄미운 사람’의 그 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야! 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잘 들어. 오른손이야. 왼손도 아니고 오른손이야. 나 오른손잡인 거 알지? 그런 내가 지금 오른손으로 베란다 난간이 마치 내 초라한 삶이라도 되는 양 꽉 움켜지쥐고 있어. 쥐어짜듯이 꽉 움켜잡고 있다고. 너는 내가 지금 이 손을 놓고 그냥 베란다 너머로 뛰어내리기만을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수는 없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중략)…. 내가 왜 지금 이러는지 아니? 왜 이러는지 아느냐고? 그런데 지금 나보고 ‘세계문구점’을 부르라는 거야?”(pp.39-40)

마지막으로. 저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긴 9장과 11장의 말들은 항상 곱씹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사랑가’를 부르며 바지 지퍼를 내리거나 브래지어 호크를 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인지 알아내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만 상대방이 수많은 양반 자제 중에서 자신을 알아볼 게 아닌가?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기형도는 ‘그집앞’이라는 시를 이렇게 끝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p.90).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다. 우리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혼신의 힘을 바쳐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영영 남게 된다(p.119).

사랑이 입을 열면,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면 거기서 멈춰야만 한다.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즉 너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정체성마저 요구하는 일이다. 그건 무방비 도시의 어둠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다. 현대적인 사랑의 방식이란 우리가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다(p.121).

꼭 역사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공부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해박한 인문학/사회과학을 알아야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소설가 역시 쓰지만 하지 않고 읽을 것이다.

공부하는 작가가 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된다. 작가. 인생의 목표인 데. 연습의 때 다. 참신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좀 뭘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계속 써야하고 말이다.

한동안 연애 때문에 아팠는데, 삼촌이 담배한대 피우면서 이야기해주는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다. 위안이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행위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말의 질감들을 살리는 글을 쓰고 싶어졌고, 연애를 하고 싶어졌으며, 감성을 살리면서도 박식하고 싶어졌다! ‘서사’의 압박에서 벗어난 글쓰기. 그러면서도 ‘역사’는 간직하는 그런 글쓰기를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런 남성의 글쓰기라면 좀 더 매력적일 듯하다. 밀란 쿤데라 정도?

디테일이 강한 묘사가 살아있으되, 서사의 맛 조차 느낄 수 있는 글쓰기는 어떤 글쓰기일까? 궁금해진다.. </div>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