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경을 넘고자 했던 이의 여행기 – 김연수, <여행할 권리>, 2008

여행할 권리10점
김연수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여행을 꿈꾼다는 거

생각해보니, 대한민국, 한반도의 남쪽에 사는 이에게 국경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르거나, 혹은 북한을 돌아서 가지 않은 이상에야 다른 나라 땅을, 즉 국경을 넘었다는 표식을 만날 수가 없다. 영화를 보면서, 범죄자가 탈주를 위해서 국경을 몰래 빠져나가는 일들을 보아왔지만, 남의 일처럼 느껴지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갈구해 본적도 없었다(그런 이유로 대한민국이 다른 국가에 비해서 범죄율이 낮다고도 하더라).

나야 말로, 사실 대한민국 안에 사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우물안 개구리’인데다가, 또한 허풍으로만 ‘전지구적’ 사고를 하는 인간이다. 사실 외부로 나가서 그것과 스며든 나를 발견 하는 것이 나에겐 정말 절실한 과제인데, 지금까지 잘 하지 못하고 살았다.

들뢰즈-가타리의 ‘변이’에 대해서 ‘접속’과 ‘분기’ ‘영토화’ ‘탈영토화’를 한동안 지껄였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나의 육신은 외부로 향하지 않고 대체로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의 집으로만 귀속되는 속성을 지녔었고, 그것이 내 ‘품’이라는 것을 점차 좁혀왔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변하는 나 자신을 내 스스로 느끼고만 싶었다. 여행을 꿈꿔왔다. 하지만 항상 ‘저지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상상만을 해왔었다. 이제는 저지르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만큼 절박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떠났다.

여행을 통해서 사람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된다는 데, 항상 가깝다 생각했던 사람과의 틈(그 틈이 좁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도 이 기회에 안타깝지만 발견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에겐 여행이 너무나 필요한 것이었고, 내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고 그 바깥에서의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매번 국경을 ‘말하지 않았지만’ ‘넘어가길 갈구해왔던 건’ 사실이었고, 국가를 뛰어넘고 싶었지만 그것은 ‘뛰어넘지 못한 자’의 상상 같은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그 안의 답답함의 은연중 표출이었을 지도 모른다.

부산에 가는 길,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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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나는 국경을 꿈꿨다. 왜냐하면 나는 국경이 없는 존재니까. 내게 국경이란 곧 바다를 뜻했다. 살아오면서 나는 여러차례 무작정 자동차를 몰고 떠난 적이 있었다. 그러면 기껏해야 나오는 것이 동해, 아니면 서해, 그것도 아니면 남해뿐이었다(p.11).

우리에겐 국경을 넘어 다른 민족 속으로 들어가, 이윽고 사라지는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세계를 향해 떠난 뒤, 거기서 다시 돌아오지 않은 선조들이란 도무지 우리에겐 없으니까. 결국 모두 돌아왔으니까. 결국 자살이 아니면 월북뿐인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행기나 선박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수평선 안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란(p.13).

그렇다. 김연수는 ‘국경’을 넘고 싶었던 것이다. 바다와 하늘 말고. 발로 딛어 넘어가고 싶었던 거다. 거기엔 ‘스며듬’. “이윽고 사라지는 유전자”를 꿈꿨던 것이다. 그래서 어디로 갔느냐? 중국 훈츈에 간거다. 러시아와 중국을 발로 딛어 넘어보려고.

김연수의 여행의 목적이라는 건 늘 그런 것이었다. 낯선 것을 낯설게 하지 않고, 우리의 일상과 맞닿게 하기, 그리고 일상적인 생각들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기..

이를테면, 그의 아버지 이야기도 그렇다. 해방하고 한반도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민족주의’에 젖은 나머지 ‘해방’만 연상하지만, 그의 아버지에게 그건 “도망치고만 싶었던 길”이었다.

 나고야에서 돌아온 뒤, 아버지는 열다섯살 무렵 귀국선에서 바라본 부산의 모습에 대해 말했다. 산꼭대기까지 판잣집이 가득한 풍경을 보자마자, 아버지는 ‘잘못 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 깨달음은 아버지의 남은 일생을 결정했다. 제아무리 많은 중공군이 내려와 총을 쏜다고 하더라도 나고야에 있다면 그 총알을 맞을 턱이 없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아버지는 ‘잘못 왔구나’의 삶을 살게 됐다.
 어느 자리에선가 아꾸따까와 상을 받을 재일교포 겐게쯔가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던 그의 아버지의 경험담을 들려준 적이 있었다. 반대로 그건 오오사까의 불빛에 대한 이야기였다. 겐게쯔의 아버지는 그 불빛들을 보고 감격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인지도 모른다. ‘잘못 왔구나’와 ‘이제 살았구나’, 그 사이에 한 인간의 인생을 결정짓는 국경이 존재했다 (pp.36-37).

반일/친일을 넘어선 ‘민족’에 대한 회의가 느껴진다. 어떤 이의 일상에도 ‘민족’이라는 것이 과연 ‘해방감’을 줄 수 있는 가장 결정적 순간이 될까? 오히려 문제는 그 ‘국경’을 느끼게 하는, 그리고 ‘국가’를 생각하게만 만드는,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났을 때 불편을 주는 ‘민족’이라는 상상물의 폭력 아닐까?

그리고 그는 그것에서 벗어났을 때 다른 격자로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더이상 <<노르웨이의 숲="">>을 읽지 않는다. <<데미안>>을 읽지 않듯이. 그 소설이 인상적이던 어떤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르미는 이제 그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 것이었다. 푸르미와 밤비사이에는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일본문학이니 독일문학이니, 혹은 한국문학이니 하는 따위의 경계선은 더이상 없었다. 오바상이든 아줌마든 푸르미에게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며, 디스거스팅이든 쩌거 왕빠딴이든 들어보면 욕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p.89). </p> </blockquote>

국경, 국가, 민족

기존의 해석들에서 벗어나 써내린 글을 읽는 재미가 굉장히 쏠쏠한데, 이를테면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족주의’를 빼버리고, ‘근대’의 맥락이라는 것을 한꺼풀만 벗겨내고 김연수는 문학을 바라본다.

한때 그런 시절들이 있었다. 그래서 강용흘과 이미륵의 만남을 다루면서도 그들이 임시정부와 조선의 독립에
대해 밤을 새우며 울분을 토했다고 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쓰게 될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혹시 한국에서 자꾸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까닭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이란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쓸 수 있을 때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만 하지 않을까?(p.201)

그런 눈으로 바라본 스웨덴에 입양간 소설가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굉장히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그냥 거리를 걸어다니는 일. 서울 거리를, 부산 거리를. 한국에 가면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거리만
쏘다닐 거라고 그녀는 썼다.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으리라. 그러면 난 보이지 않는 사람이겠지. 뭇사람들 속에 파묻힐 수도
있겠지. 익명성을 한껏 즐길 수 있겠지(p.208).

 한국을 방문한 아스트리드가 찾은 것은 결국 과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신에 그녀는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 부산의
호텔방에 남겨뒀다. 정체성이란 과연 그런 것이 아닐까? 한국을 방문한 뒤, 그녀는 그런 것이 바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받아들인뒤, 글을 썼다. 그렇게 해서 출판된 책이 <<피는 물보다="" 진하다="">>이다.
 이 소설로 아스트리드는 스웨덴 문단에서 주목받게 됐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상황을 보자면, 피는 그다지 물보다 진하지 않았다(p.210). </p>

 그러나 이제 경제력이 발달하고, 문화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한국계 작가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중인지 보여주고자
할 때, 아스트리드 같은 작가를 한국으로 불러들인다. 이건 정말, 잔인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아스트리드가 한국 쪽의 초청을
받아들인 건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게 바로 ‘피의 부름’이겠지. 그래서 ‘피의 부름’은 언제나 좀
잔인하다(pp.210-211).

</blockquote>

민족주의에 대한 김연수의 최종적 공격이 날카롭다.

 저항적이건 공격적이건 모든 민족주의는 ‘국내용 사상’이고 ‘지역적 사상’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야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중국인 가게를 공격하면서 기염을 토할 수 있겠지만, 국경만 넘어가면 상당히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민족주의자들을 친일파와 동일시했다(p.215).

 내 리얼리티는 민족주의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아스트리드나 겐게쯔의 리얼리티를 닮았다. 핏줄로 구성되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핏줄을 얘기할 때, 그건 그들과 나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핏줄은 한 집의 경계를
만들고 일가를 구성하고 촌락을 형성하며 민족국가를 건설해 그 너머를 향해 완강한 경계선을 긋는다(p.221).

 “한국문학은 민족문학이다”라는 명제는 “한국문학은 국가문학이다”라는 명제처럼 들린다. 민족문학을 통해 우리는 민족공동체의
경험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다른 민족의 경험은 배타적으로 거부했다. 저항적 민족주의가 필요하던 시기가 끝났다면, ‘저항적’이라는
한정사만 버릴 게 아니라 ‘저항적 민족주의’란 말 전체를 폐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한민족 문학이 가까운 미래에 목도하게 될
가장 당황스런 장면은 외국계 한국인이 창작하는 한국어 문학이 아닐까? 그때도 한민족 문학은 존재할 수
있을까(pp.221-222).

해방의 에너지 – 빈둥거림

요즘 잘 노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놀 때야 말로 튀어나오는 에너지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베짱이 없이, 개미는 어떻게 그 노동의 고달픔을 견딜 수 있었을까?
 

 버클리의 1960년대는 자유언론운동, 베트남전 반대운동 등의 정치운동이 싸이키델릭, 마리화나, 자유연애 등의 문화운동과 함께 진행됐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말하자면 정치운동 외의 시간에는 다들 음악을 듣거나 마리화나를 피우거나 연애를 하면서 빈둥거리는 것이다. 이거, 정부가 보기에는 얼마나 눈꼴이 시었겠는가? 사사건건 나라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도 모자라 음악과 약과 연애에 취해 아무것도 안하고 빈둥거리기만 하니 말이다. 하지만 빈둥거림이 그들에게는 실천이었다. 마리화나를 피우며 빈둥거리는 젊은이들은 노동해방을 실천했다. 노동해방이란 노동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징집거부가 징집을 거부하는 일인 것처럼. 간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빈둥거리다보니까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p.108).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88만원만 벌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 공무원이나 학자 들은 왜 자꾸 우리를 취직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빈둥거릴 텐데, 그 꼴만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버클리에 있다보니까 공무원이나 학자 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언젠가 경제분야의 고위 공무원이 될 게 뻔해 보이는 어떤 사람과 술을 마신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내게 거시경제학을 강의하며 어느 산골 사람들이 제발 도로를 놓아달라고 매년 데모를 하며 한 명씩 자살한다고 해도 그 시체를 보상하는 비용이 다리를 놓는 비용보다 적게 든다면 매년 한명씩 죽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게 납득시키려고 이십분이나 허비했다. 당연하겠지. 그게 ‘도전 골든벨’의 2번 문제쯤이라고 한다면, 그저 탈락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뻔한 문제를 내는 그런 두뇌게임에 불과하다면.
 그런 사람의 눈에, 버클리 주변에서 해피 워킹하던 인간들은, 하루종일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는 인간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보일까? 비용들(pp.110-111).

바로 여기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88만원 세대>에 대한 이야기는 좀 다른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계적 평등’을 말하기 위한 <88만원 세대>가 아니라, 어쩌면 ‘사회적 기회구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지독한 ‘숫자로 환원되는 양적 삶’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그 대안이 언제나 아방가르드 적인 예술과 히피즘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만..</p>

벗어남

</span>그런 ‘벗어남’은 아마 이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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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이상이 말한 ‘나간다’나 김수영이 말한 ‘가야겠어요’란 똑같은 의미의 말이다. 그건 단순히 집을 떠난다는 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이며, 한편으로는 어떤 경계를 넘어간다는 소리이기도 하다(p.275).</p>

 이상의 시대도 지나고 김수영과 박인환의 시대도 이제 지났다. 그들이 “꿈 같은 일”이라고 일컬었던 일들을 이제 우리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북한만 아니라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꿈 같은 일”이 단순히 물리적인 국경선을 넘어서는 게 아니라는 걸 이상과 김수영은 보여준다(p.276).

 공항에서 나느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나 자신 사이의 어떤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 둘은 같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길이다. 내가 망명에 성공한다면, 내게 남는 것은 여권에 나와 있는 그 생물학적인 존재, 단독자적인 존재임이 분명하다. 내게는 이름과 성별과 나이와 국적만이 남을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꿈꾸는 다른 존재다. 공항에서 비행기표와 여권만 들고 출국심사대를 빠져나갈 때마다 나는 거의 다른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은 참으로 감미롭다. 그런 점에서 공항은 환각의 극장이며 착각의 궁전이다. 그리하여 공항은 마침내 삶에 대한 절절한 역설이 되는 셈이다. 맛다. 덧없이 반복적으로 스쳐가는 것들만이 영원하다(p.289).
</span>

</blockquote>

‘덧없이 반복적으로 스쳐가는 것’만을 제외하고 언제나 변하는 나 자신. 그것이 여행이 만들어 주는 ‘나’일 것이다. 그게 김연수가 최종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인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넘나드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써내려 가는 것들이 필요하고 ‘말’과 ‘글’은, </span>누군가는 항상 볼 수 없을 듯한 것들을 말해야 하고 써야한다.</p>

국경을 넘어보는 체험을 하고 싶다. 해야 겠다.

김연수의 말은 이번에도 사전에서 가장 예쁜 말을 골라낸 것처럼 잘 다듬어져 있고, 그 말들을 하나 하나 베끼고 싶은 심정이다. 또한 계속 손 놓지 않고, 자료를 통한 공부 그리고 그 ‘행간’ 읽기에 충실하다는 것이 여행 산문인 이 책을 통해서 마구 느껴진다.</p>

그리고 책에 있는 사진들을 모조리 스캔해다가 붙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성실한 저자의 성실한 책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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