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소설? 그보다는 우리의 ‘폭력의 기원’에 대해서 – 김용규 & 김성규, <다니>,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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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641916&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다니</A> – <IMG alt=8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8.gif" border=0>
김용규.김성규 지음/지안</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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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112a75>BW에게</FONT>

네가 떠나기 전 4월 말인가, 5월 초인가였을꺼야. 서점에 같이 가서 난 소설을 찾고 있었고, 넌 기독교에 관련된 책들을 구하고 있었을 때였지. 난 너에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나왔던 <무례한 복음="">을 추천했고, 넌 나에게 이 <다니>를 추천해 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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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네가 떠나기 전에 원래는 보려했었는 데, 잘 손이 안가서 못봤고, 또 한동안은 영어공부만 하느라 못봤고, 또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지름신이 강림해서 사 놓았던 책들을 읽어보느라, 이 책까지 손이 가지는 않았어.

그리고 또 네가 가기 전에 읽는 것이 이상하게 마음 캥겨서 안 본 것도 있어. 사실이지.

어쨌거나, 10월. 이제 네가 떠난지 한참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어봤어. 어제밤(10/15)부터 깨작대면서 읽었는데, 처음엔 좀 말이 생소해서 잘 안들어 오더라. 게다가 표지에 붙어있는 ‘추천사’를 읽으면서 짜증이 나는 바람에 좀 싫더라고. 얼마나 대단하길래, 김훈과 장정일과 또 내가 좋아하는 최재천 교수가 추천을 했을까 싶었고, 또 조선일보의 “이 책은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고급스런 동물소설이다”라는 말에 뒷꼭지가 돌더군.

추천사는 이런식으로 ‘주례사’ 같지는 않았으면 해. 사실 ‘지적’으로 많은 자극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SF소설도 아니고 ‘과학소설’이라는 뭉뚱그려진 말을 갖다가 붙이는 것이 참 어이가 없고. ‘동물소설’이라는 말도 참 편의에 의해서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 (띠지를 떼어버리고 읽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아)

그런 마음으로 초반부를 읽으니 잘 들어오지는 않았어.

다 읽고나니, 그래도 생각이 잡혔고. 읽는 도중 중반부를 넘어가니 속도가 막 붙어서 끝까지 휙 다 읽어버렸어. 사실 내 고질병은 한 번 책을 속독하고 다시 잘 안돌아 본다는 거지만(그래서 이렇게 서평을 가장한 편지도 써보는 거겠지만)…..

<FONT color=#af65dd><다니>에 나오는 눌, 멜, 다니, 조조, 핀치, 르노 등의 침팬치 가족과 튀들디의 침팬지 무리들, 그리고 동쪽 숲의 튀들덤 무리들. 그리고 침팬지를 사랑하는 제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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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itle=”[http://blog.aladdin.co.kr/hendrix/1876542]로 이동합니다.” href=”http://blog.aladdin.co.kr/hendrix/1876542” target=_blank>예전에 그런 책을 읽은 적이 있어. <인간에 대한="" 오해="">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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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을 강조하는 생물학자들(이를 테면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그리고 최재천 교수의 스승인 에드워드 윌슨 등) 중 인간의 ‘지능’이라는 것이 선천적이라고 말하는 <벨커브>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었지. 사실 그 전까지는 생물학자들은 항상 인간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드는 줄 알았고, 그들의 이야기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거든. 하지만 굴드를 읽고나니깐, 자연과학 역시 ‘패러다임’ 안에서 이론적 입장에 따라 첨예하게 ‘논쟁’이 벌어지는 영역이라는 것도 알았고, ‘생물학’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갖게 되더라고.

어쨌거나, 그 때 그 책을 읽었던 생각이 나더라.

제니카는 아무래도 굴드와 비슷한 생각. 중요한 건 ‘환경적 맥락’이라고 보는 것 같고. 해리슨이나 웨슬리 경은 윌슨이나 도킨스 같은 입장이겠지. 다시금 논쟁들을 상기시켜주는 점 때문에 아마 ‘과학소설’이라고 그렇게 조선일보가 칭찬했었나봐.

소설을 읽는 도중 답답했던 건 제니카라는 사람이 마치 정말 ‘동화’속에나 나올 법한 ‘착하고 악의 없는’ 캐릭터였다는 거야. 항상 ‘정치적 판단’이라는 거, ‘권력의 작동’에 대해서 배웠고, 또 그것을 익혔고, 실천해 왔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의 ‘순진무구한 판단’들이 답답하더라. 내가 너무 찌들어서 그럴까? 하지만, 이런 캐릭터가 나오는 한국의 다른 소설들은 별로 없을 꺼야.. 현실성 없이 ‘순진’한 캐릭터가 답답했어.

나라면 어떻게 했을 까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된다..

벌목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벌어지고 있는 침팬지들의 제노사이드가 안타깝고, 자신의 언어학교에서 수화를 배운 튀들리의 침팬지들을 지키려했다면, 애시당초 좀 더 ‘영악’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어. 물론 그것조차 ‘부정’할 만큼 순수한 영혼인 건 알겠는데, 그렇게 해서 뭐가 되나 싶기도 하다. 요하네스의 모험주의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려면 차라리 그렇게 용감할 필요도 있는 거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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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구달 박사의 충고를 결국에는 모른 척 하다가 순교자가 되버리는 게 너무 답답했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사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지도 모르니까. NGO의 누군가. 아니면 동물행동학자 누군가가 밀림에서 그렇게 싸울 수도 있는 거겠지.

항상 세상에서는 많은 당위들이 충돌할 때가 많다. 사실 웨슬리경의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어. ‘개발’이라는 것에는 항상 ‘못살던 과거의 찌든 모습’에 대한 극복하자는 신화가 담겨있는 데. 그래서 ‘국민성공시대’를 요새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전제로 혹여 ‘사회진화론’을 동원해서 ‘그들에게 걸맞는 역할’을 고정해 버린다면 그 역시 투쟁할 일이 되겠지. 그런데 요즘은 좀 답답하네.. 약자들의 삶에 항상 노가다 판에서 돌아오는 십장이 던져주는 ‘월급’만이 시작점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야. 자신의 삶의 양식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방향에서 ‘정치적 결단’이라는 것이 이루어 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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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스위스의 마이스터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들이야 말로 시대의 ‘혁신’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밟았던 장인들이었을 텐데 말야. ‘생태’라는 것에 나무와 숲과 바람과 공기만 있는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도 넣어야 하는 건 아닐까?

우석훈의 <88만원 세대>와 <괴물의 탄생="">을 읽으면서 경제에도 ‘생태적 다안성’이라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되어서 그럴 지도 모르지. 다음세대의 ‘자원’을 우리는 빼앗을 지도 모른다는 명제와, 또 ‘여지’없는 경제가 결국에 소소한 사람들의 희망을 뺏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맞물려 돌아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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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추장이 했던 편지가 생각나고(대지와 호흡하는 우리에 대해서. 과연 이걸 팔 수 있을까? 사실 이 부분을 생각 못하고 사는 게 우리 아니니?). 다니와 끌어안으며 털을 골라주던 제니퍼와의 사랑을 생각해 본다.

물론 마지막에서의 비참한 결론은 예정된 것이었지만(‘현실적’으로). 그래도 조금 나은 답이 벌어지길 바랬었는데, 끝맛이 씁쓸하다. 누구 말마따나 영화의 한 장면 같은데.  침팬지의 학살을 보면서 나 역시 우리안의 ‘학살’과 ‘전쟁’을 생각해 보게 돼. 광주를 잊을 수 없는 이유.

난데없이 종종 순수한 너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을 것 같아.

<FONT color=#112a75>‘경쟁’에서 ‘공존’으로. 그리고 ‘전쟁’과 ‘학살’에서 벗어나려면..</FONT>

요즘 잔혹한 시대에 ‘공존’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경쟁’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데, 덕택에 나는 점점 한량하게 사는 걸 꿈꾸고 있고, 감성만 살아나고 있어. 큰일이야. 그래서 이런 말들에 감동 받았어.

 만일 우리 인간이 굴속의 개미들을 잡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까? 두 번 생각할 여지도 없이 삽을 들고 온통 굴을 파헤쳐 흰개미들을 깡그리 잡아버릴 것이다. <FONT color=#f3709b>얼마나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인가!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어리석은 방법인가! </FONT>그렇게 하면 흰개미들이 몰살해버려 다시는 그곳에선 흰개미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이런 식으로 숨낳은 생물 종들을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침팬지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항상 일부만을 사냥한다. 개미 집단이 그들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어야만 그들도 개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개미 사냥을 마치면 쌓아둔 둑을 허물어 원래 상태로 복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침팬지들의 삶의 지혜다. <FONT color=#f3709b>**생태계의 기본 원리가 약육강식이라고는 하지만, 약자에게도 그들의 삶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강자도 살아갈 수 있다**</FONT>(pp.146-147).

</BLOCKQUOTE>그리고 궁극적으로 ‘폭력의 기원’에 대해서, ‘학살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난 그래. 본성이 악한지는 잘 모르겠고, 환경이 전적으로 사람을 만드는 것에 완벽하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본성의 선악 여부와 상관없이 ‘선’하게 살 수 있게 우리가 만들어내는 제도들을 잘 디자인해내고, 또 가능하다면 환경이 우리의 ‘선’한 마음과 실천들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다면 좋지 않을까 하고. 물론 그 안에서 우리가 계속 ‘생각’하고 또 ‘느껴’서 그것들이 잘 유지 되도록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겠지.

결국 궁극적으로 나는 생태문제도 ‘사회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더라고.. 사회과학을 공부해서 그렇다고 혼자 자족(? ㅋ).

그렇게만 된다면, 인류가 서로 파괴하는 전쟁과 학살은 줄 지 않을까? 책 읽다가 이 부분은 너무 아팠어.

“젖먹이 어린것들까지… 모조리 죽였어요. 한데 그들은 웃었어요… 웃으면서 그런 짓을 했어요”(p.180).

</BLOCKQUOTE>며칠 전 어떤 블로그에서 이런 사진을 봤었거든. 딱 연상되더라. 더 끔찍하고 아프더라.

http://jagong.sisain.co.kr
<FONT color=#3058d2>
살기가 힘들어서, 벌목을 하고, 침팬지를 팔려고 죽이고 고기로 떠서 파는 게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게 만들어 주는 거.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 꼭 하지 않아도 되게끔 ‘여지’를 만들어 주는 거. 요즘은 그 생각을 많이 해.
</FONT>

 
<FONT color=#af65dd>극한으로 몰아붙여 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거. 그것이 만들어 놓을 ‘파괴적 결과’말이야. 생존이 위험했을 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쉽게 선동당하고, ‘파괴’적 행위들을 서슴치 않고 하는 거 아닐까? 그 여백들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FONT>
좋은 책 고마웠어. 생각할 꺼리를 받았고, 책 뒤의 ‘추천 도서’가 나와서 좋더라.</p>

How is your life in U.S? 경제위기가 네 유학생활을 위협하지는 않는지?

네 소식이 궁금해.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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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2b8400>-항상 너와 수다 떨던 ‘난데없이 자유로운 영혼’ Hendrix.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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