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회가 달라졌다.
‘학내 민주화의 상징’은 옛말이다. 많은 대학에서 학생회가 비리의 온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각종 이권에 연루된 학생회의 추문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하더니, 심지어 몇몇 대학에서는 학생회가 재단, 학교 측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교수를 견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재단 대신 교수 자르는 수상한 학생회
최근 경기도 소재 A대학에서는 단과대학
학생회가 나서서 교수를 처벌해달라고 대학 측에 진정서를 낸 일이 있었다. 해당 교수가 신입생 교양 수업 시간에 ‘학교 비하 발언’을 했다는 것.
학교는 ‘특별감사위원회’를 구성해 해당 교수를 놓고 특별 감사를 진행 중이다. 대학 측은 “진정서를 접수했으니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나 속사정을 살펴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해당 교수는 평소 재단, 대학 측으로부터
밉보였다는 게 익명을 요구한 여러 대학 관계자의 전언이다. 더구나 이 학생회는
전적이 있다. 2006년에도 학생의 민원으로 두 명의 교수가
해임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
물론 이 두 교수 모두 학교 측과 평소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이런 정황을 짐작케 하는 증거도
있다. 이 진정서를 내는 데 앞장선 단과대학 총학생회장이 한 인터넷 게시판에
해당 교수의 해임을 예고하는 글을 오린 것. 그는 한 게시판에 “저
XX 적어도 경고 1회(2회 받으면 잘림)이고
현재 총학생회와 저는 1학기 중으로 저 XX 잘라버리려고 벼르고 있다”며
“대학에 발 못 붙이게
할 테니 조금만 참아주라”는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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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교수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냈던 A대학 학생회 간부가 게시판에 올린 글.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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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런 흐름을 놓고 재학생, 졸업생은 강하게 대학,
학생회를 비판하고 있다.
지난 9월 1일 이 대학의 일부 졸업생은 성명을 내 “누가 보더라도 훈계로 들을 수밖에 없는 발언을 놓고
누구보다도
애정과 열정을 갖고 있는 해당 교수를 상대로 특별 감사까지 하겠다는 학교 당국의 처신을
강하게 비판한다”고
지적했다.
재학생도 대학, 학생회에 비판적이다. 해당 교수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을 대상으로 한 무기명 설문조사에서
학생의
75%가 ‘해당 교수가 2학기에도 강의를 다시 맡아줄 것’을 요구했다. 이런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학생회는 슬그머니 진정서를 철회했지만 대학
측은 여전히 특별 감사를 진행 중이다.
“말 잘 들으면 해외 연수 보내주지”
학생회가 이렇게
앞장서서 재단, 학교와 한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학생회가
대학으로부터 제공받는 장학금, 해외 연수가 그 이유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실제로 이 대학에서
운영하는 해외 연수 프로그램 대상자 100명 중 학생회 간부가 40명을 차지한다.
이 학교 대학원을 다니는 정모(28) 씨는 “실제로 한두 해
전 일부 학생들이 학생회 간부에게 해외 연수 프로그램
수혜가 집중되는 걸 문제제기 했지만 크게 쟁점화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이를 놓고 대학 측은 “(장학금, 해외 연수 등의) 수혜를 받은 학생이 어느 정도 학교의 눈치를 볼 수도 있다”고
사실상 대학 측도 이런 보상을 미끼로 학생회, 학생을 장악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학 측은 “대학이
학생한테 여러 가지 복지 혜택을 주는
게 문제될 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대학 측이 제공하는 무료 해외 연수 프로그램은 학교 측이 학생회를 장악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다.
지난 2005년 부산의 B대학도 대학, 학생회가 매번 무리 없이 등록금 인상 합의에 성공하는 것을 놓고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 배경에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이 대학은 지난 2002년부터 ‘교수 및 학생 간부 해외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회 간부를 수천만 원의 예산을
들여 몇 년 째 공짜 해외 연수를 보내줬다.
상지대 학생회 “구
이사회가 교수 자리 보장했다”
한 해 1000만 원 가까이 하는 등록금도 중요한 당근이다. 서울 C대학의 단과대학
학생회 간부였던 김모(27)
씨는 “학생회 활동을 하면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이것을 빌미로 학교 측에서 압력을
받기도
한다”며 “특히 단과대는 운영 자금이 부족해 장학금을 모아 운영 자금으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장학금이
더 중요하다”고
증언했다.
지난해 D대학에서는 총학생회가 하계 간부 수련회비로 1억 원을 받고 등록금 인상에 합의해준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기도 했다. 당시 교수협의회에서는 학교 운영비가 1000만 원만 넘어도 총장의 결재가 필요하다며
담당 교직원이 아닌 학교 측과의 연계를 조사해
달라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었다.
학교 측의 회유를 받은 총학생회가 사건 전말을 공개하면서 이와 같은 커넥션이 공개된 사례도
있다.
지난 7월 강원도 원주의 상지대에서는 신구 이사회 간 갈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비리로 물러난 전 이사장
측이
총학생회를 매수해 복귀 지지 선언을 꾀한 사실이 드러났다. 전 이사장 측은 현 총학생회 간부에게 교수
보장, 금전 거래를 제의한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줬다. 이 사건의 전말은 학생회 측이 관련 일지와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밝혀졌다.
지방 대학 학생회는 조폭의
놀이터?
이뿐만이 아니다. 총학생회가 학내 행사 사업자 선정, 졸업 앨범 업체와의 돈 거래를 통해 이익을 챙겨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김 씨는 “학생회 전체회의에서 총학생회의 예산 심의가 있지만 기업 후원금 등은 예산안에
포함되지 않거나 일부만 포함돼 있어
내부에서도 기업과 총학생회의 거래 내용을 포착하기가 어렵다”고 증언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지방 대학에서는 지역의 조직
폭력단이 학생회를 장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선거
과정에서 금전, 인력 지원을 해주고 그것을 빌미로 학교 행사, 직원 채용, 자판기 운영권 등에
압력을 행사해온 것.
여기에는 일부 금품을 수수한 대학 직원까지 연계해 대학이 범죄의 온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몰락하는 학생회, 대안이 없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데는 바로 학생의 무관심
탓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학생운동이 급격히 퇴조하면서
학생회가 공동화하자 무주공산이 된 학생회를 재단, 대학 심지어 조폭이 검증 안 된
일부 학생을 내세워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방 대학은 물론 서울·경기 소재 대학까지 확산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수상한 학생회, 대책은 없을까? 김 씨는 “1980~90년대 학생운동이 학생회를 각 정파의
근거지로
활용하면서 정작 학생회는 학내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며 “앞으로
자치회 등 기존의 학생회와는 다른 새로운 틀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이런 학생회 문제는 계속 늘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div> </td> </tr> </tbody>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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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을 뒤지다가, 강양구 기자와 양진비 기자의 학생회 관련 기사를 읽었다.
사실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다. 모두 다 그러리라 예측했던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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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전체 대학의 80%가 운동권이었다(2001년 기준). 그 중에 85%가 주사파NL이었고, 15%가 PD 이거나 사람사랑(이른바 사사) 혹은 새벽 계열이었다.
그 계파는 사실 제대로 알려면 분석해 보긴 해야하는 데, 그것이 오늘의 주제는 아니니까 생략하기로 하겠다.
어쨌거나. 주체사상파, 김일성주의자들의 성지였던 ‘민족’ 건국대학교를 나오는 바람에, 난 항상 비주류였고 또한 온 몸을 던져서 주체사상에 빠질 뻔 하던 시절에도 그들의 ‘집단적 정서’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기에 그들을 항상 ‘외부자’로서 바라볼 수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 PD 그룹은 바람만 불면 흩어져 내렸고, 그들은 ‘문화운동’과 ‘부문계열 운동’을 외치면서 상큼하고 샤방샤방한 쪽으로 옮겨갔다.
항상 1920년대의 감성을 갖고 살아가기를 원했던 주체사상파 역시 90년대 이후 대형스피커와, 군무의 ‘아크로바틱함’을 더욱 더 강조했고, ‘후드티’등 ‘미국놈’들만 입을 듯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대로 96년의 ‘막장 주사파’들의 삽질이었던 연대 사태를 겪고나서 쯤의 시기부터, 주사파든 PD파이든 상관없이 학생운동은 더 가라앉았다.
그 때의 선택이 지금까지 오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소련 붕괴 이후, PD들은 맑스 레닌주의에서 벗어난 대안을 정확하게 만들지 못했고, 주체사상파의 ‘대중전술’에 말렸고, 학생회를 빼앗기기도 하고, 노학연대등이 삐거덕 대고 ‘공활’등이 성사되지 못함에 따라 주사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몰락했다. (89년만 해도 PD가 훨씬 더 많은 수의 학생회를 수권하고 있었다.)
심지어 97년부터 불어온 ‘비권’ 바람은 ‘학생회’ 자체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버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학생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비권’들이 가르쳐 준거다.
‘민주주의’ 혹은 ‘자주민주통일’ 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를 외치든 간에. 운동권이 아닌 학우 대중에게 더 솔깃 한것은 그럴 듯한 구호보다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복지였고, 그들은 경향적으로 복지쪽으로 10년동안 움직였고, 이제는 엎어지지 않을 수준으로 기울었다.
더 문제는 운동권들마저 그 구호들을 차용할 수밖에 없었고, 처음에는 주사파들이 그것을 따라서 ‘학원자주화’의 슬로건은 ‘비리재단’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는 점차 ‘등록금 투쟁’ 그리고 그것도 힘들어 지는 국면이 되었을 때 ‘복지 확충’ 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냄새를 정확하게 맡았다(이를 테면 주체사상파가 가장 노리는 학생 자치기구는 바로 ‘학생복지위원회’이다). PD들도 그 구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사실 ‘학생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형적인 예가 있다. 어디겠는가?
바로 ‘노동조합’이다.
민주노조의 역사가 87년 이후 왜, 계속 패배의 역사로 되었는 지를 굳이 이야기해야 하는가?
‘조합주의’는 노조에서 학생회로 이식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편리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 ‘조합주의’가 정착되는 순간. 굳이 ‘착하고 선하고 올바른’ 사람들이 노조(학생회)의 대표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눈 앞의 것을 많이 ‘떼어다’ 주는 사람이 가장 유능한 사람이라는 거. 당연한 거 아닌가?
이건 할 수 없는 역사적 귀결이었다. 게다가 개개 학생회의 ‘집합적’ 이익, 그리고 ‘연대’를 말해야 했던 ‘연대체’이던 주사파이 주도하던 ‘한총련’이 무슨 짓거리를 했었는 지를 언급하는 건 차마 이 타이핑을 치는 손이 더러워지는 것 같아 말할 수도 없다. 내가 볼 때 ‘민주노총’이 작동 안하는 이유나 ‘학생회’가 이익집단화 되는 것은 모두 같은 원리다.
결국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학생회’는 없어졌고, ‘자금조달’과 ‘대의제’의 환상은 ‘비권’ 양아치 학생회의 당선으로 엎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생성’을 버리고 ‘학생회’에 엎혀서 근근히 유지된 ‘학생운동’은 붕괴했다. 이제 너절한 잔해들(아직도 병신같이 정신 못차리는 몇 몇 주사파들에게 망가진 학생회가 대다수라는 것이 안타깝다)만 둥둥 떠다니고, 그나마 살려보겠다던 ‘학생회’를 포기 못한 혁신적 운동가들만 쓸쓸히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오히려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라던가 ‘진보신당 학생위원회’가 더 잘 운영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애시당초 ‘학생회’는 학생운동이 마신 ‘아편’이었던 것이다.
강양구 기자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의 비판. “학생”의 무관심을 탓하는 기사가 짜증이 난다. 학생들의 비정치화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정치’의 영역을 만들지 못하고 ‘종교’로서 주체사상이나 스탈린주의를 섬겼던 이들의 ‘멍청함’과 ‘우둔함’, 그리고 ‘끔찍함’을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권” 혹은 “반권”은 잘못이 없다. 그들이야 말로 개개의 행위자로 놓고 보면 ‘합리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정치’라는 피곤한 영역을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복지’라는 달콤한 초콜릿을 들이민 것 뿐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을 선택한 학생들 또한 잘못이 없다.
한 때, NGO 학생회라는 것들이(2002~2006) 설치기도 했었고, 이들은 종종 ‘노무현 탄핵 반대’등의 움직임이나, 때로는 ‘반전평화 집회’를 만들어 내기도 했었다(2004년 건국대, 서울대). 하지만 결국 이들은 “너희는 개혁을 택할 것이냐, 주사파를 택해 북으로 넘어갈 것이냐, 아니면 비운동권한테 넘겨서 ‘개념탑재’를 포기할 것이냐?”의 협박식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쟁점은 “USB를 누가 달아 주냐, 누가 더 많은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뚫을 거냐”였고, 정서에는 아까 말한 ‘진영논리’만 횡횡했던 셈이다.
비권과 상대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운동의 가치와 이념에 대해서 망각하고, 어느 순간 “어짜피 밖”에서 싸울 때에만
티가 날 ‘이념’은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수줍어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념’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신들도
잊어먹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들의 자리는 아무 곳에도 없었고, 그들의 냄새는 없어져 버렸다.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대안’을 꿈꿨던 이들의 ‘현실’에 안주하던 ‘태도’였던 것이고, 그들의 ‘무지함’과 ‘세상을 좁게 보는 세계관’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