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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힘부터 빼고 글을 써라! – 이외수, 글쓰기의 공중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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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73378937_1.jpg" border=0> |
</DIV><A href=”http://flyinghendrix.tistory.com/84” target=_blank>2008/04/28 – [Reasoning] – 잡글, 논문, 책</A>
<FONT color=#112a75>내 글쓰기</FONT>
내 글쓰기는 기네스의 거품이다. 기네스 맥주의 쓴 맛보다는 덜 퍽퍽하여 찾게 되지만, 결국 먹을 나위 없이 빈약하다.
항상 허영과 약간의 허풍과, 약간의 가식이 끼어있는 그런 글들이다. 이 바닥의 선수들한테 걸리기 전까지 허세를 부린다. 하지만 곧 뽀록날 지 몰라 전전긍긍 잠을 못이루게 하는 글들이 많다.
사실 알지만 그래도 모른 체 하면서 살다보니 한편으로 철면피가 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FONT color=#193da9>허나 철면피가 조금씩 되어가면서 어느 정도 무뎌지기도 했다. 그래서 둔해지기도 했다. 결국 양심에 거리낌없이 썼다고 말 못하겠다. 종종 양심을 발톱의 때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그랬다. 그렇다고 완전히 맛이 가버린 건 아니어서, 회개의 기회를 노려오기도 했다. 이건 마치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의 아들을 죽인 사형수의 목사를 애타게 기다리던 마음과 비슷한 거다.</FONT>밀양>
그래서 혹여 내가 쓴 글들에서 모순과 가식과 허영을 찾아낸 이들이 있다면, 지금에서야 주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빌터이니, 용서를 바라는 심정이다.
알지 못하면서 알은 체 했고, 하지 않을 거면서 할 것처럼 자신있게 이야기했고, 하지 않았으면서 한 체 한적 있었다. 부디 아량으로 넘어가 주시길.
<FONT color=#112a75>**내 글쓰기에 대한 고해소. <글쓰기의 공중부양=""></SPAN>글쓰기의>
** </FONT>
내가 내 글쓰기에 대해서 반성하게 된 건 순전히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 덕택이다. 책의 첫장부터 마음이 동했다.글쓰기의>
젊은 날 내 인생은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봄날의 햇살도 가혹해보였고 여름날의 소나기도 가혹해 보였다. 가을날의 단풍도 가혹해 보였고 겨울날의 함박눈도 가혹해 보였다. 날마다 맹목의 지렁이처럼 배를 깔아붙이고 암울한 시간의 배면을 기어 다니는 인생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평생 행려병자로 살다가 길바닥에서 동사해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공중부양 따위는 꿈도 꾸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타고난 재능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고 글에 미쳐 있었고 글을 즐기면서 살았다(pp.4-5).</BLOCKQUOTE>이외수를 처음 안 건, 예전에 무슨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인도 프로젝트’를 할 때였다. 도인 같이 머리를 기르고 도사 같은 말만 하는 그가 ‘소설가’라고 했을 때, 난 그냥 피식 웃어버렸고, 그를 무시했다.
하지만, 그는 점점 나에게 인상 깊은 작가로 남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내가 첫사랑에 실패해서 우울해서 아무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파페포포 메모리즈="">, <포엠툰> 따위 만 읽혔을 때, 그나마 내 먹먹한 가슴에 불을 지펴주고 따뜻한 온기로 덮혀주고 녹여주던 글은 이외수의 산문집에 있던 글이었다.포엠툰>파페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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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etc/book/coversum/8973379623_1.jpg" border=0>
<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middle><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3379623&ttbkey=ttbpanic822253001©Paper=1">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A>
<IMG alt=10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10.gif" border=0></TD></DIV>
그는 진짜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소주한잔을 따라줄 것 같았다.
<FONT color=#193da9>그리고 이외수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 첫 머리의 문구가 더 와닿았다. 그는 정말로 ‘아픔’을 아는 사람임에, 그리고 ‘절망’을 느껴본 사람임에 틀림없으니까. 그의 인생이력이 그를 더욱 믿게 만드니까.글쓰기의>
</FONT>
천천히 책을 되짚어 보면서 내 글쓰기의 ‘천박함’을 차분히 일러주는 그의 자상한 설명에 내 등뒤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부끄러움에 얼굴마저 신호등처럼 시뻘개질 지경이었다.
처음 부분을 읽을 때는(단어의 장) 그냥 기법적으로 이런 부분을 채우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었다. 항상 그 부분에 대해서 기술적으로 도망치려 한 것이었다. 난.
글은 쓰는 자의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는 일은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이며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은 사물과의 사랑을 시도하는 일이다.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나뿐인 놈들에게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p.53).
모든 사랑은 아름다움으로부터 출발한다. 육안이나 뇌안으로 판단하는 아름다움은 현상에 근거하며 시간에 따라 변질되거나 퇴락한다. 그러나 심안이나 영안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은 본성에 근거하며 아무리 시간이 경과해도 변질되거나 퇴락하지 않는다(p.56).
허영 중에서 글쓰는 사람들이 특히 매력을 느끼는 허영이 지적(知的) 허영이다. 여기에 빠지게 되면 창작을 하더라도 보고서나 논문을 연상시키는 문장들을 구사하게 된다. 소화되지 않은 학문, 소화되지 않은 철학은 글쓴이를 위선자로 만드릭도 하고 읽는 이를 청맹과니로 만들기도 한다. 허영은 국어사전 그대로 겉치레에 불과하다. 알맹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문장. 끊임없이 열거되는 전문용어. 철학적인 사고나 지적인 이론으로 점철된 문장. 지나치게 남발되는 외국어. 이런 허영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자신이 돋보이기를 바라지 말라. 허영은 자신의 정신적 빈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가식이나 욕심과 마찬가지로 문장의 생명력과 설득력을 말살시킨다(p.111).
</BLOCKQUOTE>이외수가 말하는 문장의 3대 병폐가 있는데. 난 그 3가지에 다 걸린다. ‘가식, 욕심, 허영’.
부끄러웠다. 새삼.
아름다운 영혼을 만드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나는 회피해 왔는가. 얼마나 나는 그 회피를 정당화 해 왔는가. 이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인간아….
오히려 후련했다. 목에 걸린 동태의 가시를 제거한 기분이랄까?
<FONT color=#112a75>작가=창조적 인간</FONT>
요즘 계속 관심이 있는 것은 메말라 붙은 사람들의 감성을 살리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글쓰는 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PD가 되거나 공연을 기획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거다.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수 있고, 그것들을 사람들과 나눠서, 그것들이 불씨가 되어서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 말이다. “따로 또 같이” 살 수 있는 공존의 가치가 있는 세상. 그 이유를 또한 이외수의 책에서 발견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누에의 알처럼 자기 이외의 생명체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심지어는 누에의 알이 이파리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듯이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조차도 자각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절대로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일에도 관심이 없고 글을 읽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 깊은 사유 따위는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생활 자체가 단세포적이다(p.217).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자극도 사물들을 일상적으로 습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당연히 충동과 의욕도 미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사물을 대하는 감각이 둔감한 사람들은 언어에 대한 감각도 둔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에도 글을 읽는 일에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p.139).</BLOCKQUOTE><FONT color=#193da9>**그렇지만, 난 이것을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그 ‘근원’에 대해서 곰곰히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야근하고 회식하고 밤 11시에 퇴근해서 겨우 ‘프리미어 리그’나 좀 보다가 잘 수 있는 사람에게 ‘창조적 사고’를 하라고 압박을 넣는 것은 ‘창조적’이라고 이름붙은 ‘노동’을 주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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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그들에게는 좀 ‘빈둥댈’ 시간이 필요하고, 수다떨 시간이 필요하고 또한 ‘음악을’ 들을 시간이 필요하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삶 자체에서 ‘예술적’인 것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면 말이다.
문학은 예술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술이 아름다움을 궁극으로 한다면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글쓰기는 아름다움의 모색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의 내면도 아름답게 만들고 타인의 내면도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p.99).
장님은 외부의 사물을 눈으로 감지하지 않고 온몸으로 감지한다. 글쓰기는 장님이 외부의 사물을 온몸으로 감지하면서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행위와 흡사하다. 모든 촉수를 곤두세우고 사물들이 간직하고 있는 진실을 탐지하는 습관을 기르라(p.139).</BLOCKQUOTE>글을 쓰는 이에게 필요한 태도는 바로 이런 거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많은 ‘여가 시간’과 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닌가?
창조적 인간을 소망한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는 여건을 보장받길 원한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들에 다시 이외수는 위안을 준다.
비록 그대가 쓰는 글이 모순투성이의 세상을 통째로 뒤엎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대가 쓰는 글이 언젠가는 한 그루 짙푸른 나무이거나 또는 청량한 샘물 한 모금으로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자(p.149).
</BLOCKQUOTE>그리고? 그리고 나머지는 다시금 새겨서 짚어봐야 할 문장을 쓰는, 단어를 쓰는, 글 한편을 쓰는 기법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일단은 그 마음에 대해서 새기는 것으로 일독을 마친다.
**<FONT style="BACKGROUND-COLOR: #eff4d8" color=#2b8400>조금 더 정직하게, 담백하게, 솔직하게 쓰고 싶다. 내 가슴의 울림을 그대로 전하는 그런 글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글쓰기의 공중부양="">을 읽으면서 해본다. 그의 얼굴에 묻어나는 자연스러운 웃음과 평온이 무엇인지 조금 알듯 말듯하다. 아직 난 더 자라야 하나보다.</p>글쓰기의>
한동안 내 또래의 20대 저자들을 시샘했었는데, 그 시샘할 시간에 조금 더 즐겁게 살 준비나 더 해야겠다.</FONT></STRON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