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로맨틱 러브라는 것 역시 ‘지고지순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발성과 그 당대의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 놓은 발명품이라는 것. 평지위에 솟은 고원이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우리는 그 발명품과 현실과 조응시키며 21세기에 20세기 발명품을 가지고 연애를 논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다시 21세기로 점프해서
<연애의 시대="">에는 이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사랑한다’에 대해서 복잡미묘한 ‘흥분상태’를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지만, 그 역시 1920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고, ‘자유결혼’은 성립했지만, ‘자유연애’가 성립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고, ‘자유연애’에서 감정의 미묘한 교차가 무엇인지 이해를 못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 외에도 기생과 여학생의 이야기도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작년 신명직의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를 읽었을 때 발견한 것은 안석주가 그렸던 만문만화를 통한 ‘문물’과 ‘모던뽀이’들의 노는 문화였다면, 권보드래의 <연애의 시대="">는 연애를 통해서 발견하는 사람들의 성도덕, 그리고 습관으로 묻어나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발견하게 한다.
이미 그 때 햇가족이라는 것이 탄생했고, 로맨틱 러브가 탄생했고,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시대는 언제나 동시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격차를 두고 다른 층위에서 다르게 움직이므로, 경성의 ‘모던뽀이’와 ‘모던껄’들의 그런 연애 행태가 곧바로 전국으로 퍼지지는 않았으리라. 위에서도 봤지만, 지방에서 남편을 상경시켜 공부시키던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과 시댁 때문에 못박힌 가슴의 한을 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를 알기 위해선 무엇을 봐야하는가? 종종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지평을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고, 역시 그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지사적 투쟁’ 바깥에 있는 일상은 지금까지 무시되어왔고, 그 덕택에 ‘지금’의 우리를 확인하는 데에 있어서 현격하게 오류가 빚어질 때가 있었다.
밥먹는 것, 볼일을 보는 것부터 역사는 시작해야 한다는 아날학파의 선언이 갑자기 생각나는데.
어쨌거나. 재미있는 한국근현대사책 한권을 구했고, 다시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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