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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가부장제에서 벗어난 여성들의 홀로서기 –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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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112a75>**2001년 건국대학교 ‘장한청년’ 선본, 그리고 2004년 1학기 여성학 강의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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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노래패 선배에게 잡혔다. 그 선배는 나를 난데 없이 잡아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NL 총학생회 선본에다가 협박 반 회유 반으로 던져 놓았다.
난 단지 역사 공부가 재미있어 유시민의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를 읽고 있던 ‘좌파'(그들의 말로는 PD에 무한 근접해 있는) 중 하나였을 뿐이었는데, 난데없이 총학생회 선거운동본부에 들어간 것이었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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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etc/book/coversum/8974140462_1.jpg" border=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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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사람은 K용호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 “역사의 모든 것은 제가 마스터 하고 있죠”(그 말은 자기가 ‘사람중심의 역사관’ 즉 주체사상의 역사관을 마스터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는 걸 좀 지나 알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나를 선거운동 본부의 ‘새내기 역군’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좀 지나서 만나게 된 선거운동본부의 핵심 94학번 어떤 남자. 강경해보였지만, 모든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갖춘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선전전 8시부터 9시까지, 점심 선전전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저녁 선전전 5시부터 6시 반까지. 일정은 이어졌고, 사이사이 강방(강의실 방문)과 학내 선전전이 이어졌다. “나진숙 김도윤의 ‘장한청년’ 열심히 하겠습니다!” 난 정후보 나진숙(전전년도 총여학생회장)의 비서였고, 그녀를 따라 다니면서 그녀의 강방을 평가했고, 또 학내 선전전을 모니터했다. 그리고 모든 일정이 끝나는 7시쯤에 학생회관 어딘가에 마련되어있었던 선본방에서 하루를 ‘평가’하고 ‘총화’한 후 집에 갈 수 있었다.
회의는 항상 둥그렇게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여앉아 각자가 느낀바를 이야기하고 선본짱이 그것들을 모아서 이야기한 후, 새내기들은 집에 보내거나 아니면 ‘술 한잔’씩 사주었고, 그 후에 자기들은 모여서 다로 ‘정세 파악’ 및 ‘선거 대책’에 대한 디테일한 이야기들을 했었다.
그런 선거 일정중에 내가 항상 궁금했던 건 총학생회가 내세우는 이야기 중에 ‘민족 건대 총학생회 역사상 최초의 여성 후보’가 있었는데, 그러면 이 여성 후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거 운동이 한참이던 어느 날 내가 정후보 나진숙에게 물었다. “누나? 누나는 페미니스트인가요?” 주위의 사람들 웅성웅성. “누나가 뭐냐?! 정후보님이라고 해야지”
뭐 그런 말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나였기 때문에 그 말은 들은체 만체했고 어쨌거나 정후보 나진숙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 나는 통일운동을 하는 조국의 운동가이지?”
“아니, 그러니까 누나는 페미니스트에요? 아니에요? 누나 총여학생회도 했잖아요!”
“페미니즘에도 여러가지 종류의 입장이 있는데, 사회주의 페미니즘, 자유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등등등이 있는데…. “
“네, 어쨌거나 누나의 입장이 뭐냐고요?”
“음, 한국사회에 제반에 깔려있는 문제들이 있지만… (중략).. 그런 문제들의 중심에는 민족모순이 깔려있지. 한국사회는 ….”**
<FONT color=#105738>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단순하고 무식하게 생각해서인지 몰랐지만, 그 이후로 그녀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숨통이 막힐 듯한 ‘교조주의자’들의 향연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던 내게 그녀의 그런 발언은 그나마 그녀가 ‘그들의 꼭두각시’이거나 “그들과는 입장이 다르고 발톱을 숨기고 있는 거다”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버티던 내 희망을 송두리채 앗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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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본에는 모두 ‘민족해방전사’들만 있었던 거다.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내 생각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바뀌었고, 4학년이 되었을 때 난 ‘여성학’ 수업의 레포트를 쓰고 있었다.
학교에서 가장 잘나가는 인기 ‘여성학’ 강사 이인숙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 와중이었는데, 난 항상 답답했다. 수업시간에 ‘예비역’으로 상징되는 마초들과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아직 맛가지 않은 남자’의 상징으로 한 판 붙는 것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짜증났던 건 수업이 그리 ‘여성주의’와 맞닿지 않는다는 거였다. 여러가지 여성주의의 입장들을 나열하고 설명했지만, 결국 ‘여연’과 ‘여협’의 차이 정도에서 한국 여성운동사는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FONT color=#193da9><A title=”[http://www.unninet.net/]로 이동합니다.” href=”http://www.unninet.net/” target=_blank>언니네</A></FONT>와 여성해방연대를 왔다갔다 했던 내게 당시 최신의 여성주의 이론들이 생략되어있는 ‘구미 페미니즘 이론’의 나열은 갈증을 채워주질 못했다.
그래서 레포트에 썼던 문구가 생각이 나는데 “나는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인데, 수업의 내용은 현대의 트렌드, 특히 탈근대주의를 포용한 입장의 여성주의는 다루지 않는 느낌이며, <여성해방연대><언니네><또하나의 문화="">에서 제기되는 담론들은 빠진 느낌이다.” 이렇게 감정을 토로했던 기억이 있다.또하나의>언니네>여성해방연대>
그리고 나서…. ‘여성주의’에 대해서 특별히 배타적 감정이나 고까워 하는 것도 없이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FONT color=#112a75>**2008년 <오빠는 필요없다="">를 읽다 – 여성주의자들의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이야기</SPAN>**</FONT>오빠는>
여성주의에 대해 별 생각을 해보지 않던 요즘, 모던 뽀이, 모던 걸을 열심히 읽던 도중 쌩뚱맞게 <오빠는 필요없다="">를 알라딘에서 같이 질러버렸다. 1920~30년대 잘나가던 경성의 불꽃같은 사랑과 멋진 신사 숙녀들을 생각하다가 왠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오빠는>
요 몇 달간 소설책만 주로 읽었고, 간간히 수필집이나 읽다가 제대로 된 사회과학서를 읽으니 잠시 시차적응이 필요했고, 다 읽는 데에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책을 잡는 순간부터 불편했다. 여전히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 있었는데 이런 것이다. “진보운동과 여성운동은 같이 가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신념이 만들어 놓았던 운동사회에서의 가부장성을 공박한다.
2002년 나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분노하여 거리로 나갔었다. 장갑차에 짓눌려 떡이 되어버린 그 소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했다. “우리의 딸들을 짓이긴 미국놈들”이라는 수사가 거슬리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보여졌던 윤금이씨의 콜라병이 꽂혀있는 나신을 보았다. 또 슈퍼타이도 보았다. 난 마구마구 분노했다.
<FONT color=#193da9>하지만 이런 주장들 뒤에는 ‘가부장제’와 ‘민족주의’가 혼재되어있다. 이를테면 미군들에게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을 항상 ‘창녀’ ‘화냥년’의 수사로 말하다가, 미군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에만 ‘민족의 딸’로 추앙하는 것은 정당한 화법인가? 여성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디에 갔는가? 그리고 여성의 신체는 이렇게 죽어서도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반체제 황색 저널리즘’에는 뿌려져도 상관없는 것인가?</FONT>
책은 학생회의 이야기에 주로 주목한다. 예전에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읽었던 것과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오래된>잊혀진>
항상 남성들은 총체적 인식으로 변혁운동의 중심에 서있으나 여성들은 ‘감정적’으로 치부되고 운동에 ‘동원’되며 운동에서 ‘약자’로 상징화 된다.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맞게 되는 새내기 새로배움터(OT)에서도 새내기 여성들은 ‘동원’의 대상이 된다. “새내기 여학우들 노래 한 번 들어봅시다!” “와~ 예쁘다!”. 남성들의 육두문자 섞인 ‘성적 희롱’이 담긴 욕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여성들은 그것들을 언제나 ‘대의’를 위해 참아야 했다.
<FONT color=#c8056a>운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남성이 있었고, 그 중심에 여성이 들어서려면 최소한 ‘무성화’ 혹은 ‘남성화’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운동권 전사로서의 여성은 언제나 ‘아마조네스’의 이미지를 갖춰야 했었다.</FONT>
운동사회는 언제나 ‘동지애’를 말했으나 그것들은 언제나 남성들이 보는 ‘형제애’의, 남성의 시선에서의 ‘동지애’였고 여성은 그 문화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그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남성 중심의 운동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여성들은 수발을 하고 남성들의 인식구조에서 살아남으려 이중노동을 하거나, 아니면 아예 남성이 정의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나야 했다. 결국은 가부장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운동권들의 ‘성매매’라던지 여성을 희롱하는 습속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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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NL과 PD 양대 정파 상관없이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악습이 되었다.
운동권의 ‘성폭력’이라는 것들이 대두가 되고, 그것들이 문제가 되었을 때 기존 운동권들은 1. 조직의 대의를 위해서 2. 조직 내부의 가해자들을 보호한다는 논리로 3. 그런 논쟁자체가 프락치의 것이라는 것으로 봉합하려 했고, 결국에는 성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때우곤 말았다. 피해자였던 여성들은 항상 ‘행실이 바르지 않은 년’으로 매도되기 일쑤였고, 한동안 고개 꾸벅 숙이고 가만히 있던 남성들은 뒤로는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유대관계를 이용하여 다시 조직에서 활개를 치곤 했다.
한국사회의 여성주의운동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전체 운동의 ‘대의’를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여성운동이든 ‘전체 운동’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고, 그 구도를 인정하면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한다. 여연과 대학내에 있었던 여성주의 분과들은 항상 ‘민족민주운동’에 복무하면서 그 안에서 여성주의운동의 위치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운동이든 통일운동이든 그들에게 여성주의운동은 “공감 하지만, 그건 부차적이고…”라는 식으로 ‘아직’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문계열운동’의 격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여성주의 운동은 남성들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진보운동의 격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성주의 운동’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오빠는 필요없다="">는 그 싸움을 벌여낸 여성들의 자기 기록이다. </p>
2000년 있었던 <100인 위원회>의 이야기들은 내가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의 이야기였으니까 잘 몰랐던 새로운 정보의 것이었지만, 책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들은 새삼스럽지 않고 지금도 역시나 대학사회의 운동권들에게서 그리고 진보진영에서 항상 등장하는 이야기들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FONT color=#8c044b>일자(一者)로 환원되지 않는 개개의 물음과 그 물음들을 통해 맺어진 사람들의 운동을 지지하고, 거대단위의 ‘대의’를 부정하고 ‘희생’을 끔찍해하는 나에게 이 책의 주장은 동의할 만한 것이고, ‘여성 나름의 목소리’와 ‘여성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다시금 바라보고 움직이려하는 것에 난 정말 동의한다.</FONT>
<FONT color=#112a75>여성주의자들에게 궁금한 점</FONT>
하지만, 그들보다 ‘성’에 대해서 내가 ‘문란’한 지는 몰라도, 그들의 ‘성폭력’에 대한 기준은 “글쎄?”라는 질문들을 던져낸다. 난 성문제에 대해서 그들이 종종 ‘보수주의’적인 판단을 할 때가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급진주의적 여성주의자들은 ‘섹스’ 자체가 남성과 여성의 가부장제적 위계의 표현이기 때문에 아예 ‘섹스’를 하지 말자는 주장들도 하는 데, 이 책의 새로운 여성주의자(1990년대 이후에 등장한 여성주의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성폭력의 기준은 반드시 여성의 눈에서만 만들어져야 하는가? 물론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100인 위원회>의 내용들을 볼 때 ‘연애감정’에서 빗나간 경우도 그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도 농후했으리라는 판단이 든다. ‘유혹’으로서의 ‘거절’과 ‘단호한 거절’을 구분하는 기준을 남성들, 혹은 여성들에게 어떻게 제기할 수 있는 지는 언제나 맥락상의 문제가 아닌가?
물론 정답을 내노라는 것도 아니고, 여성주의 자체가 언제나 ‘구성’되는 역사성을 수용하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여전히 여성주의자라고 말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던뽀이’만 꿈꾸는 나같은 이들에게는 ‘불편’하기만 하고 ‘디오니소스’적인 해방의 여지가 없는 ‘구속복’같은 느낌으로 그런 이야기들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담론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정치의 영역의 문제가 이제 정치학Political Science의 공식분과로 들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내게 문제거리를 던져준 책이다.
약간의 오해, 오래된 습관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위해서 소통을 해야할 필요를 보여주는 책이다.
<FONT color=#318561>진보에 포섭된 ‘여성주의’가 아니라 ‘여성주의’ 그 자체.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겠다.</FONT></DIV>
오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