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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눈에 비친 조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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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flyinghendrix.tistory.com/173” target=_blank>2008/11/02 – [Reviews/Books] – 기발하지도 않고, 엄밀하지도 않은 팩션 : 이수광,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다산초당</A>
<FONT color=#112a75 size=3>왜,, 난 이 책을 잡고 읽었을까?</FONT>
자주 이야기했고, 이제 좀 지겨운 이야기지만, 난 그림을 잘 모른다. “그림읽기”가 안된다. 그냥 “좋다~”와 “이건 뭐지?”하고 하는 양자택일만이 내가 그림을 볼 때 취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TV나 달력, 그리고 지하철 등지에서 볼 수 있는 그림 정도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림들이고, 그 특징들을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그만큼 많이 매체들에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을 어떻게 봐야할까? 뭐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림을 통해서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시대를 읽어내는 것. 그것은 그나마 나 같은 사회과학도가 접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한동안 1930년대에 관해 미치도록 사무치던 그리움은, ‘서울’에 대한 이야기들에 몰입하게 만들었고, 결국 <근대 경성="">에 대해 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 경성="">에 대해 몰입하다보니, 대체로 문화인류학적인, 사회사적이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강명관도 그 와중에 알게 되었다.근대>근대>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어깨너머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요새 영화 <미인도>랑 비슷한 모티브인 것 같은데, 신윤복을 여자로 설정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중인 출신의 화가를 살려내는 창조력이 괜찮아 보였다.미인도>바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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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사회사에 대한 관심, 또 드라마 <바람의 화원="">…… 그리고 알라딘 결재 내역을 보니, 체크 되어있는 강명관의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바람의>
<FONT color=#112a75 size=3>왜, 신윤복, 그리고 풍속화인가?</FONT>
강명관은 한문학자다. 흔치 않은 전공인데 그가 하는 작업들에 대해서 내가 딱히 ‘분류’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어떤 때는 ‘사학자’로 보였다가, 또 다른 때에는 ‘국문학자’로 보이기도 하지까. 그런 어려움은 ‘한문학’이 뭐하는 지에 대해서 내가 모른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어쨌거나, 그의 독특한 이력은 최근에 인문학의 ‘기획’으로 승부하는 책들에서 빛을 보는 듯하다. 그의 책들은 확실히 따분할 법 보이는 인문학 책들 중에서 재미있어 보인다. ‘공자왈 맹자왈’할 것 같은 동양철학자의 냄새도 잘 안나고, 오히려 밑바닥 정서를 가지고 글을 쓰려한다는 점에서 나 같은 ‘꼰대 싫어하는 젊은 놈’들도 읽을 만하다.
자, 이제 책으로 들어가,, 혜원 신윤복에 대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주제는 뭘까? 저자는 기녀, 여속, 에로티시즘이란다. 하지만 그 주제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세히 그 시대와 아울러 같이 보고 있을까?
풍속화에 대한 논문과 저서는 대개의 경우 구성과 색채 등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무엇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극히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이런 까닭에 혜원의 그림을 볼 때마다 궁금증만 더하였고, 그렇다면 아예 내가 혜원의 풍속화에 대해 어쭙잖은 글이나마 써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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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나마 ‘그림’과 관련된 책임에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확실히 이 책은 역사학책이다. 신윤복의 그림의 눈을 빌려 조선시대 풍속을 바라본다.
생각해 보라. 현재 우리가 접하는 그림에서, 인간의 모습이 그림의 전면을 차지하는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은 더더욱 그렇다. 남편의 적은 수입에 허탈감을 느끼는 아내, 오로지 구복(口腹)을 위해 출퇴근 전쟁을 벌이는 남, 녀, 직장 상사로부터 핀잔을 듣는 사내, 성희롱을 당하는 여성, 포장마차에서 소줏잔을 입에 털어놓고, 갈빗집에서 수입산 쇠고기를 씹고, 한데 어울려 고스톱을 치고, 인터넷 증권거래에 빠지거나 홀로 포르노에 열중하고, 단란주점이나 룸살롱에서 이마에 넥타이를 동여맨 채 여자를 끼고 노래를 부르고, 인터넷에서 만난 사내와 러브호텔에서 은밀한 정사를 벌이는 등의 일상은 그림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현상, 곧 회화에서 일상의 배제야말로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느낀다(p.18).</p>
조선후기 풍속화는 인간의 현세적, 일상적 모습을 중심 제재로 삼고 있다. 소로 밭을 갈고 타작을 하고 물고기를 잡고 짚신을 삼는 생산 현장에서부터, 술을 마시고 기방에 드나들고 도박을 벌이는 유흥의 현장, 그리고 급기야 인간의 가장 은밀한 행위인 섹스까지 숨김없이 화폭에 옮긴다. 그림 속의 인물도 사뭇 달라졌다. <FONT color=#8c044b>조선 사회가 양반관료 사회인 만큼 양반들의 생활이 그려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주류는 이미 양반이 아니다. 농민과 어민, 그리고 별감, 포교, 나장, 기생, 뚜쟁이 할미까지 도시의 온갖 인간들이 등장한다. </FONT>점잖은 양반님네들을 그리던 초상화와는 얼마나 달라졌는가!(pp.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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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112a75>신윤복, 그림으로 바라본 조선 후기 서울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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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과부가 개의 교미를 옆의 하녀와 같이 보고 있다. 이것을 보면서 저자는 ‘개가’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했던 조선시대의 ‘열녀’로 대표되는 가부장 제도를 읽어낸다. 또한 그러한 차단된 욕망의 일탈을 보여주려 했던 신윤복을 읽어내는 것이다. “도덕의 폭력”이라고 그 시대의 제도를 말하면서……
당연히 이어지는 이야기는 애정과 결혼의 문제가 된다.
이것을 애정으로 볼 수 있는가? 결혼 전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무슨 애정이 있겠는가? 또 이 여인은 남편과 성관계를 맺은 적도 없다. 스물을 막 넘은 이 여인의 판단은 무엇에 근거했던가?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도덕관념이고, 이 여인은 그 관념의 희생물이다. 연암은 청상과부가 되어 남의 동정을 받고 구설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을 택했다고 하였지만, 과연 여인의 심사가 그랬는지는 알 길이 없다. 죽은 사람의 속내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p.41)</BLOCKQUOTE>
물 긷는 아낙들과 훔쳐보는 양반. 우물이라는 공간은 동네 아낙네들이 모이는 곳이자 여성과 남성이 우연히 ‘합법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공간(p.49)이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과연 ‘근엄’하기는 했는가? 그건 ‘밤’에다 대고 물어봐야겠지? 아래 그림은 더 명명백백히 아니라고 해 준다. 그 이중성의 폭로.
여자의 복색을 보라. 짚신을 신었고, 저고리는 겨우 고름만 자주색이다. 양반가의 여성이라면, 또는 기생이라면 삼회장이 기본이다. 또 시집을 갔다면 소매 끝을 남색 천으로 꾸밀 텐데, 이 여자는 고름만 자주색일 뿐 나머지는 아무 것도 없다. 얼굴도 아직 앳되고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 그림에 담긴 이야기는 아마 이럴 것이다. 봄날 행세깨나 하는 양반가의 젊은 서방님이 후원에서 젊은 종년의 손목을 끌고 희롱을 한다. 여종은 부끄러워 엉덩이를 잔뜩 뒤로 빼고 있다. 특히 이 여자의 가슴을 보라. 저고리는 가슴을 다 가리지 못한 채 맨살이 드러나 있고, 매우 풍만해 보인다. 거기다가 주변의 기물들도 춘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단단하고 거칠게 생긴 거대한 괴석과 붉은 꽃이 막 피어오르는 나무라, 이상한 것을 연상시키는구나!(p.52)</BLOCKQUOTE>이런 묘한 이중성을 보여주는 신윤복의 그림은 당시의 풍속을 살펴보는 훌륭한 도구가 아닐까?
이제 그런 조선시대에 대한 ‘국사교과서적’ 이데올로기만 제거해 버리고 나면, 이 책을 읽는 속도감이 붙게 된다. 조선시대의 색다른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책의 배경은 언제나 서울이다. 한양, 조선시대 모든 유행의 중심 한양이 보인다.
<FONT color=#af65dd><FONT color=#8c044b>요즘의 룸살롱 10% 문화가 아니라, 나름의 법도가 있고, 또 질서가 잡혀있던 유곽의 모습이, 기방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갓 피어난 근대성-자본주의 발흥-의 상징들이 보인다. 어린 처자를 파는 할매의 간특함이 보이고, 침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는 양반들의 야수성이 보인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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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기방을 주름잡던 별감의 빨간 별감복이 보이고, 그 시대를 놀아대었던 오입쟁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삼회장 저고리를 잘 차려입은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데, 원래 청렴한 것에 대해서 숭배하던 조선사회에서 자주색으로 대는 삼회장 저고리는 기생이나 입는 것이었으나, 남편을 찾고 싶은 양반댁 처자들도 입게 되었다는 것.
반대로 1930년대 모던 껄이 되고 싶었던 기생들이 ‘여학생’의 패션을 흉내내었던 점 또한 상기시켜준다.
누가 이끄느냐는 그 시대의 정신과 누가 맞닿아 있느냐의 여부도 있겠지.
선비의 나라 조선은, 이 때 이미 ‘놀 줄 아는’ 풍류랑의 나라로 완전히 가 있었고,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상태였다.
서울은 멋쟁이들의 유행의 도시가 되었고, 목로주점에서 보통 사람들은 안주를 푸짐하게 차려먹으면서 이미 흐드러지게 놀기 시작했다.
그것을 저자는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의 증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건 신윤복의 시대(정조)가 얼마나 풍요로운 시대였는 지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또 한편으로 아무 대중없이 놀 줄 몰라, ‘질펀’함만 찾아대는 2000년대의 한국 남성들의 놀이 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조선시대만도 못한 부실한 내용으로 놀고 있는 한국 남자들의 한심함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이를 테면, 조선시대 양반들의 노는 문화라는 것은 ‘종합 문화 예술’에서 한 가지도 뺄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종묘제례악을 제외하면 최고의 민요를 부르는 악공들을 불러놓고, 가장 검무를 잘 추는 기녀들을 불러놓고 그 장단에 맞춰서 놀았다는 점.
(물론 지금도 기녀를 끼고 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잊지 않았다는 점(지금은 어떠한가?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놀고 계신가? 그냥 급해서 룸살롱 위 층의 러브호텔로 뛰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FONT color=#c8056a>신윤복의 그림들을 보고 강명관의 해제를 읽으면서 가장 아려오는 것은, 이러한 ‘놀이 문화’에서 가부장적인 것들 따위야 걷어낸 다 치더라도, 이러한 놀이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FONT>
지난 번 전주에 갔을 때, 부러웠던 것은 전주사람들은 민요나 판소리, 그리고 전통 악기들이라는 것을 여전히 ‘놀이’로 즐길 줄 안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전주를 제외하고 몇 군데나 과연 그러한가?
전주 사람들은 전통 음악 그리고 문화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18세기의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그 나름의 전통과 현대의 맞물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었다.
<FONT color=#af65dd>**이를테면, 현대화된 캘리그래피, 그리고 퓨전음악, 동양화와 서양화의 간극을 없애주는 회화들.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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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보면서 경탄하던 사람들이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고층 아파트의 ‘시티 라이프’만을 꿈꾸는 역설.
혜원의 그림에 펼쳐진 멋스러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상상력’이 고갈되어 ‘현실’과 ‘소망’의 경계가 다시는 붙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버린 지금을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금 감성의 회복, 그리고 그 감성을 토대로 한 상상력의 발현. 그리고 그것들을 구체화하여 우리의 ‘의제’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동시에 해보게 된다.
<FONT color=#c8056a>사람은 놀아야 한다.</FONT> 확실히 놀아야 한다. 놀아야 몸의 막힌 기운들이 트이고, 머릿속의 때가 빠지며, 즐거움이 주는 만족감이라는 것들이 자존감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이 기억을 타고 또 넘어가 집단적인 것이 되었을 때 그 기억은 또 하나의 문화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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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57048c>**그리고 일상에 대한 기억들을 복원시키는 것은, 거대담론(20세기의 민족 신화라던가, 21세기의 ‘일’ 담론이라던가)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의 모습이 얼마나 가치있는 지를 보여주게 되고, 그리고 그것들이야 말로 ‘성공시대’ 따위의 파쇼적인 구호에서 탈피할 수 있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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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해준 음식의 맛을 식당 음식과 비교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지나가다가 낙엽을 보면서 1분이나마 감상에 젖으며 낙엽 떨어진 길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수 있어야 한다.
혜원은 지나다니며 사람들의 일상의 아름다움이라는 것들을 찾아냈다. <바람의 화원="">에서 윤복이가 그렇게 하고 있듯이. 그리고 그 소중함을 가지고 세상을 읽어내서 화폭에 옮겼다.바람의>
그리고 난 강명관이 하는 혜원의 그림이야기를 읽으면서, 옆길로 샌것 같지만, <FONT color=#3058d2>그 일상의 소중함을 회복시켜주는 일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는 가</FONT>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