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서 몇 달동안은 몇 권의 사회과학과 연애에 미쳐있었고, 좀 지나서는 신학에 미쳐있었다. 2008년 1~3월 동안은 신학을 공부했고, 덕택에 ‘경성’, 1920~30년대는 한동안 잊고 살았다.</p>
이런 경성의 1930년대에 대한 관심을 갖게된 것은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를 읽은 덕택이었다. 올 초 Swing Dance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스윙이 좋아졌던 이유 중에 하나는 춤 출때 나오는 음악이 내가 좋아하는 Duke Ellington 등의 빅밴드 스윙에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절모, 하얀 드레스 셔츠, 멜빵 그리고 부츠. 거기에 맞춰서 추는 신나는 스윙. 어느 정도는 문화적 뉴웨이브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여전히 나에게는 있다. <경성 트로이카="">는 그런 새로운 트렌드의 경성(!)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래서 귀에 속속들이 들어왔다. </strong></font>(물론 지금은 진정한 경성의 모던뽀이로 구보 박태원을 꼽을 것이다. 거기에 이재유, 이현상을 꼽을 수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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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에게 근대 경성의 모습이라는 것은 단순히 비분강개한 민족주의자들의 시대가 아니었고, 춤과 노래와 패션의 시대였고, 또한 연애의 시대였다. 연애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는 시기였고, 꼰대들의 “어험”과 “이런 망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즐겁게 살았던 베짱이들의 끽다점 생활이 지배적인 시대였다. 하지만 그 결론을 항상 ‘허무주의적’이고 ‘퇴폐적’인 것으로 단정짓지 않는 것은 그 시대의 모던뽀이와 모던껄들이 갑자기 전사로 변신하여 튀어나온 ‘혁명’, ‘현장’으로의 매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보 박태원

이현상</p>
이를테면 이현상과 구보 박태원 사이에는 큰 간극이 보이지만, 그 밑의
자양분이라는 것은 공유했으리나는 가정 말이다.</p>
2.
또 하나의 이 시대를 캐는 이유는 순전히 우석훈과 생태경제학이 나한테 박아놓은 관념과 상관이 있다. 이를테면 내가 찾는 도시의 모델이라는 것은 마천루와 타임스퀘어의 뉴욕이 아니라, 공동체들이 ‘아파트’나 ‘주상복합단지’의 근대적 감옥 구조에서 벗어나 ‘마을’의 형태로 구축될 수 있는 모습이다. 그와 더불어 대형 마트가 지니는 폭압적인 상업 모델에서 벗어나 ‘시장'(말 그대로 market place)의 소상인들과 가정 주부들의 실갱이가 벌어지는 역동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귀족층의 자사고/외고 모델에서 벗어나 모두다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교육적 인프라를 만들어 누릴 수 있게, 즉 문화자본 향유의 격차가 없는 모델을 꿈꾼다. 그리고 생태적인 다안성이 갖춰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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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1930년대 경성이냐고? 그건 바로 그 당대가 우리가 황폐하게 가꾸지 못한 감성을 마지막으로 갖고 살았던 청년들이 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가장 에센스의 놀 줄 아는 인간들이 있었던 시대라고 해야하나? 그리고 그 ‘논다’는 것의 의미의 초창기(계몽주의자들)는 분명 거대한 메갈로폴리스의 지향이었지만, 후반부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경계를 왔다갔다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취향의 까다로움으로 ‘천박함’이 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경성을 벗어난 다른 공간에서 이러한 ‘도시적’ 감성이라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었을 수 있고, 따라서 이러한 경성의 1930년대를 일탈적인 것으로 묘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에 ‘경성’은 조선인들이 생각하는 중심지였음에 틀림없고, 당시의 ‘도시’라는 것은 ‘군산’ 정도를 제외한다면 ‘경성’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골’이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물론 이 말이 지금의 ‘2008년 서울’ 중심으로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강남 중심의, 서울 중심의, 수도권 중심의 사고와 물리지 않았으면 한다. 난 여기서 빠져나가려 한다. 아직 되든지 안되든지).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다=""> – 잠시 이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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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strong>사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듯하다. 게다가 평탄한 100년 정도를 보냈다면 몰라도, 식민지 병합, 독립투쟁, 광복, 다시 강대국에 의한 분할, 이념이 양극화된 두 개의 체제하에서 60년 보내기. 전쟁.
세계사의 굴곡에서 생겨나는 마찰음들의 복판에 있었던 역사인 덕분에 한국근대사와 현대사에 있어서 입장이라는 것은 항상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이야기 역시도 그 놈의 입장이라는 것이 타협하기 어려운 성격인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내 입장은 뭐냐고? 그건 제대하고서 말해줄게). 그나마 경제사만 갖고 이야기를 할 때 식민지 근대화론자와 ‘자생적 근대’론을 갖고 있는 뉴라이트들과 강만길을 필두로한 민족주의자들의 제 1전선은 아무래도 데이터 싸움이지만, 이를테면 김일성주의자들과 박헌영을 필두로 한 남한의 자생적 남로당계를 지지했던 좌파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이는 ‘기억’의 싸움이 되어버린다. 박헌영을 쁘락치로 볼 것인가 말 것인가도 여전히 합의가 안되는 것은 순전히 ‘기억’을 누가 독점하느냐의 권력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저자는 그런 ‘입장’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들에서 한 발 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실fact’들을 늘어놓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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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에 의해서 이 책은 매우 제한적인 원칙을 적용했다. 하나는 기존의 정치, 사회, 경제, 문학 등에서 언급하거나 인용된 관념이며 논리적인 글들은 가급적 중심에서 배제하려 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되도록 일상적이며, 구체적인 현상들에 대한, 시답지 않게 보이거나 시시껄렁한 것으로 취급되는,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현대성’에 대해서 풍부하게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글자료와 시각자료들을 판단의 중심에 놓았다. ……(중략)…… ‘있는 그대로의 날 것’으로서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체험들을 내용의 중심으로 삼으려 한 것은 현대가 관념에 빠지는 것을 막고 싶은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이 책은 현대성에 대한 연구서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p.7).
이 책은 저자의 말대로 ‘연구서’는 아니다. 다만 그 1920~30년대 한국 근대에 대한 ‘스케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고 우리가 저자 김진송의 말을 랑케식으로 ‘사실이’ 살아서 말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저자는 자신의 관점을 설명하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성을 익히 알고 있던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 유형들로 짜맞춰 설명하는 방식에는 어딘가 늘 미심쩍고 불투명한 구석이 남아있다. 이런 의문들은 현대가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경로 그 자체일 것이라는 막연한 가정에서 출발하지만 그보다는 현대를 말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현대를 말하는 방식이,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불만이다.
현대는 정치사의 밑바닥이나 사회사의 행간 속에 간간히 섞여 있었을 뿐이며, 연속적인 그러나 단절적인 집단의식의 변화들만이 사건의 지각변동을 통해야만 측정될 수 있는 단위로 치환되고, 으레 그래야 할 당연한 현상으로서 분노와 갈등, 폭력과 위기의 폭발만이 주목되었을 뿐이다(p.10).
저자는 ‘현대’라고 근대를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은 어떤 학제에서 쓰는 지는 몰라도 ‘근대’라고 지칭하는 것이 더 편의를 위해서 옳을 듯하다. 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책 출간이 1999년이었다는 것이다. 현재만큼 근대성에 대한 논의와 상관없이 초기 작업을 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 용어의 정립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현대’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현재까지의 역사해석이라는 것들은 ‘삶’ 자체에서는 너무나 멀리가 있고, ‘일상’이라는 것은 언제나 행간으로만 찾아내야 한다는 것. 그것에서 벗어나 새로 그리는 ‘일상의 역사’. 즉 아날학파가 주창했던 ‘미시적 삶’을 가지고 역사를 그려내는 것과 대체로 의미가 통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1930년대 경성으로 들어갔는가?
거리에 자동차와 인파가 밀려다니고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쇼윈도우를 기웃거리는 남녀들은 서양 패션잡지를 사거나 영화배우 사진을 걸어놓고 스타들의 스타일을 흉내내며, 재즈가 울리는 카페에서 칵테일을 즐긴다. 외양과 삶의 양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사고의 줄기, 생각의 결들은 그 밑둥을 파보면 현재와 동일한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거기서 발견하게 된다. 학문, 교육, 정치, 행정에 이르기까지 뿌리깊게 배어있는 관념적 사회관, 지식인의룸펜적 기질과 거대담론에 의한 사회 비판의 버릇, 유행과 스타일에 대한 맹목적 집착, 현실과 동떨어진 여성주의와 이에 대응하는 일상의 보수적인 시각, 유교의 봉건성과 결합되었음에도 현대적인 사고로 둔갑한 문화교양주의, 취미론에 머물고 있는 예술에 대한 태도 등등. 우리의 현대사회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그래서 더욱 미심쩍은 부분들이 공유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곳을 ‘현대가 형성된 곳’이라고 말하거니와 시기로 말하면 1930년대이다(pp.12-13).
어쩌면 잊혀진 현대의 과거 속에 더 정확한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가 이미 익숙한 현재보다 현대가 낯설었던 그 곳에서는 우리의 현대적 일상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새롭다(p.18).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다=""> – 1930년대 근대 경성</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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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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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포괄적인 교과서다. 각각의 디테일에 대한 연구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가지 갈래로 이야기들을 전개시켜볼 수 있다. 나는 ‘놀이’와 ‘연애’만 갖고 이야기를 하겠다.</p>
이를테면 개화파들이 동도서기론을 들고 나와서 ‘개조론’을 펼쳐댈 때의 생각과, 나중에 모던뽀이와 모던껄들이 경성의 끽다점(Cafe)을 끼고서 세상의 온갖 탐미주의자들이 행할 일들을 하고 있을 때 그것을 보면서 하는 ‘한탄의 말들’을 읽는다 치자. 그러면 우리는 동시에 현대의 보수주의자들이 한편으로 서구의 ‘완성된 선진국 체제’를 예찬하면서도 그들의 젊은 세대들이 음악이나 하고 데모나 하고 이미 ‘정조’ 따위의 관념쯤 부숴버린지 100년쯤 되었을 행태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눈감거나, 혹은 그것들을 우리 사회에서 행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망조’가 들었다면서 한탄하는 것을 여전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대한제국 초창기 우리의 자생적인 ‘근대’를 만들기 위해서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민족개조론’은, 식민지 근대가 이식된 이후 급격하게 발달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오히려 식민지의 현실을 인정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그 때와서도 입장을 바꾸지 않은 이광수 같은 사람들은 식민지의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입장을 굳히게 되었고, 그런 것을 참을 수 없는 이들은 독립협회의 대체적인 공식입장인 ‘개량적 민족주의자’, 즉 민족은 독립되어야 하지만 그 방법은 언제나 계몽적인 결론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민족 학교를 세운다거나, 좀 더 앞선 선각자들로 조선의 청년들을 개조하는 일)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또하나 특기할 만한 일들은 1920년대에 있어서 유입된 ‘사회주의’의 발흥이었다. 그들은 조선사회에서 일어났던 모든 문제들이라는 것들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서 추동되는 것이라 믿었으며,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되 그들의 결론이라는 것은 언제나 구조적인 것이었다. 양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부장사회도 결국은 엥겔스의 책의 내용처럼 ‘자본주의적 가족관계’ 때문이라고 믿었고, 식민지 수탈 역시 그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던껄들의 ‘자유연애’에 대해서 계몽주의적인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공박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와 내가 공유하는 생각이지만, 난 그 모던뽀이들과 모던껄들이 뒤덮어 버린 서울의 아방가르드적인 욕망이 분출하는 그 문화, 패션의 첨단에 이르렀던 경성의 문화에서 튀어나왔던 ‘새로운 세대’ 뉴웨이브의 물결이라는 것을 긍정해야만 뒤의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더니스트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해 낼 수 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인데.
까다로운 취향을 가졌던 이들은 절대로 기성 권력에 쉽게 투항하지 않는다는 결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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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껄
기생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거세하려는 체제에 대해서 반대하는 논설을 신문사에 기고했고, 그 논거는 자신은 오로지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에 기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서울에 딴스홀을 열어달라고 청하는 각종 모던뽀이들과 모던껄들의 청원을 읽고나면 이 시대야 말로 욕망을 통해서 ‘몸’에 대한 해석 자체가 바뀌어 나가고, 또한 그것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동할 수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드라마 <경성 스캔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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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는 댄스를 한갓 유한계급의 오락이요 또한 사회를 부란시키는 세기말적 악취미라고 보십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교 댄스조차 막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각하의 잘못 인식함이로소이다. 우리들은 일본 내지에 있어서의 댄스 발달사를 잘 압니다. 지금부터 40년 전 명치유신을 완성하고 서양문명국과 평등을 주장하려 할 적에 이등박문, 육오종광 등 유신의 제공신들이 동경 록명관에 댄스 파티를 성대히 열고 영국공사 ‘빠크’ 이하 열국 외교관들로 더불어 성대히 댄스를 하면서 크게 국제적 사교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 어찌 정부요로 대관들만, 상류의 외국사신들과 교제하는 것으로 능을 삼았으리까. 국민도 국민끼리라는 정신에서 또한 시정에 댄스홀을 많이 허락하여 영민이들과 내외인들이 어울려 댄스하면서 크게 인민끼리의 친교를 맺지 않았나이까(<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pp.65-66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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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기존의 근대사를 전공했던 사람들이 들으면 “그것이 과연 독립운동에 기여했는가?”를 준거로 평가하겠지만, 문제구도를 바꿔서 ‘혁명’이라는 것 혹은 세상의 근본적 변화라는 것을 준거로 판단해 본다면, 이것은 가벼이 생각할 일들은 아닌 것이다.
제대로 ‘놀 줄 아는’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 항상 생각해보는 데, “문화적 컨텐츠”에 대해서 그렇게 떠들면서도 놀 여유는 안 주는 2008년의 한국의 젊은이들은 왜 1937년의 모던뽀이들처럼 저항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놀 권리’를 이야기하지 않는가?
놀 줄 안다는 것은, 개개인에게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그 만큼의 노동시간의 감축과 생활의 풍요가 갖춰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다시 사회적인 담론의 전환을 필요로 하고 정책의 대전환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다시 뛰자 대한민국” 구호 뒤에는 그런 여유 따위의 가치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있다. 언제까지 뛰어야 하는가? 심장이 터져서 멎을 때까지 우리는 일하다가 죽어야 하는가?
어느 순간 가치의 전도는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행복한 척이라도 해야하는 역설.
그런 역설이 주는 의미를 이미 1937년의 모던뽀이, 모던껄들은 알고 있었던 게다. 그래서 난 2008년에 다시금 그들의 문화현상. 영화에 사무치고, 춤에 미치며, 유행가들에 대해서 ‘전문가적 태도’로 비평했던 그 모던뽀이와 모던껄들. 그리고 ‘대중문화’가 주는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문화적으로 까다로운 감성을 갖게 된 이들이 ‘급진적’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 그것들은 사회를 뒤엎어버렸다. 1968년의 운동이 범상치 않았던 것은 그 까다로운 문화적 감성들과 정치적 운동이 스파크를 튀겼기 때문에서 출발했다. 프랑스의 드골은 자신이 그냥 조용히 물러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미국의 대통령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입장정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 때의 거리에서 놀면서 문화적 자아를 만들어버린 아이들은 그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고, 더 많은 변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대중의 ‘변화된 인식’을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꼰대들이 항상 집에서 엎어져서 빈둥대는 아이들에 대해 극도의 경계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역시 여기까지 생각해보지만 동시에 난 유보적인 결론을 내린다. 아직 더 공부해봐야 겠다는.. 하지만 1930년대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서 다시금 ‘가능성’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방향인지의 ‘지향’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느 순간 순식간에 분기하여서 뭔가 내가 가야할 방향을 정립해 주겠지.
그래서 좀 더 공부하면서, 놀아보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문화’운동의 필요성. 그 것들이 갖고 있는 잠재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3. 뱀다리
며칠전 내 동지이자 친구인 leopord 군과 술을 마시면서 그런 문화적 자양분들이 왜 지금은 다 꺼져버리고, 높이와 메갈로 폴리스의 욕망만 남았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의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그런 모던뽀이들은 해방 후에 숙청당하고 전쟁이라는 거대한 일 때문에 다 없어진 거지”라고…… 그 부분, 직관적으로 동의되었는 데 그 상흔에 대해서 난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또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
한동안 ‘한국근현대사’ 자체를 읽지 않으려 했던 시절이 몇 년간 있었는데, 결국 과잉 정치적인 해석(식민지 반자본주의론)과 도그마로 가득찬 우상론(김일성주의)으로 가득차버린 그들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 또한 단순하게 수치로만 근대를 읽어내려는(뉴라이트) 해석에 ‘무식하다’라고 말하고, 마지막으로 “비분강개의 민족 역사”로만 그 시절을 읽어내려는 이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난 결국 ‘한국근현대사’를 읽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만 기존의 사료에서 벗어나 그들이 썼던 글들과 영화들이 더 궁금해지고, 그들의 협회 이름이나 활동보다, 그들이 마셨던 고히(커피)의 브랜드와 그들이 썼던 말습관들과 또 그들이 췄던 춤이 궁금해 진다는 것이다. 그게 더 본질적으로 그들을 읽어낼 궁극적 자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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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서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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