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서, …. 예배 그리고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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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계발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행복한 이기주의자="">, <시크릿>, <긍정의 힘="">(그리고 이어서 <잘되는 나="">), <마시멜로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종신고용이라는 믿음이 깨어진지 이제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되었고, ‘무한 경쟁 시대’라는 말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읽습니다.

직장인들은 ‘구조조정’과 그에 이어지는 ‘인력감축’과 또 그 때문에 빚어지는 회사 안의 알력에서 하루 하루 버둥댑니다.

물론 성공 신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고 그것 자체가 본인 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귀감 내지는 질투를 만들어 내는 경우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 몇 몇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버티고 살아갑니다.

자기계발서는 그러한 ‘신화’들의 공통점, 혹은 ‘패자’들의 공통점들을 참 세려된 표지로 싸매고 예쁜 활자로 묘사해 놓습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나라에 대중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최초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부터 참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서를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어느 정도 주관적인 가치에 대해서 수량화에 성공했고, 모두들 성공에 대한 계략적인 조감도를 그리면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계발서는 그것에 다가가는 ‘정도正道’를 제시합니다.

“네가 꿈꾸는 ‘성공’을 쟁취하려면, 넌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루 하루를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하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읽고 그것을 보면서 인생을 반성하고, 자신의 목표를 세우곤 합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면, 아무도 그 주어진 전제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계발서가 끔찍한 것은 그것이 주관적인 개개인의 ‘가치’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방법론’으로 치장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균질한 목표를 향해 가라고 강요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계발서는 ‘돈과 상관없는 삶’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쟁’의 당위성을 밑바탕에 깔아놓고 “너 살아남을 꺼냐, 죽을꺼냐?”의 협박을 멈추질 않습니다.

‘내적인 확신’, ‘긍정의 힘’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그 것들이 결핍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도 ‘삶’이라는 것은 소중한 것일 텐데 말이죠.

결국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은혜’,’성공’,’부’라는 것 뒤에서 칼 맞고 죽어갈 사람들에 대해서 ‘동정’은 할 수 있지만 ‘공존’은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2. 예배, 그리고 설교

2주간 A 목사님과 청년예배를 함께 드렸습니다. 오랫만에 A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이번 주의 설교를 듣고나서 생각이 든 건 한편의 ‘자기계발서’를 읽은 느낌이랄까요? 그것의 ‘강해’를 들었다는 느낌이랄까요?

지금 한국사회에 대해서 비관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자유”가 소중하다는 건 아는데. 그리고 또한 그래야 하는 것도 알겠는 데.

이를테면, 목사님의 설교는 ‘치유’나 ‘회복’이 아닌 ‘치료’였죠.

감기가 걸린 이에게 감기약을 주는 ‘치료’는 당장의 증상은 호전시키겠지만, 다음 번에 조금 다른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에는 다시 무력하게 감기 증세를 만들어 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기 걸렸던 이가 ‘무리’하지 않게 “쉴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젊고, 가능성도 많지만, 담금질만이 다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청년들에게 “꿈을 가져라”, “당당하게 주도적인 자유를 만끽하라”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온당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도전했을 때 실패에 대한 ‘대가’에 대한 이야기도 이제는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가 너무 커서 쓰라린 사람들의 ‘슬픔’에 대해서도 이제 설교에는 반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직난으로 많은 청년들이 ‘안정되고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는 직장’과는 상관없이 비정규직, 파견직, 그리고 또 알바 밖에 택할 것이 없을 때, 왜 청년은 ‘담대한 마음’만을 먹는 것이 우선이고, 자신의 삶을 조건짓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중 일이 되어야 하나요?

그게 좀 답답했어요. 그리고 예수가 지금 한국이라는 곳에 살고 있다면, 아마 제일 먼저 달려갈 곳은 이주 노동자들 곁이라는 생각을 몇 주전 선한 이웃클리닉 담당하시는 집사님의 이야기로 들었지만, 동시에 그 다음으로 갈 곳은 밤에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또 공무원 시험 준비에 올인하고 있는 ‘하루 5000원 용돈’으로 생활하는 20대 후반 어떤 사람들이 모여있는 도서관 앞 흡연장일 거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종종 생각하는 데. 여전히 이 땅에는 대학을 가지 않았던 사람이 갔던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이고, 집이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보다 훨씬 많고, 변변한 직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사람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거.

그리고 이 땅에서 그 ‘기본적인 삶의 품위’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 또한 삶의 품위를 ‘누리는 사람’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의 격차는 점차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항상 잊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빈곤에 아이를 잃고, 영양결핍에 정신 나간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던 예수가 성전의 장사치들의 상을 엎어버렸던 일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