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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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984426&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A> – <IMG alt=10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10.gif" border=0>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생각의나무</TD>
<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84984426_1.jpg"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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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112a75>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 그리고 나
<FONT color=#000000>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을 연초부터 계속 읽고 있다. «우리는 사랑일까?»를 제일 처음 읽고, 그 다음으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잡고 읽었는데. 연애의 디테일들에 대한 묘사, 그리고 그 상황에서 왜 우리가 상처받거나 상처를 주는 지에 대한 보통의 이야기는 지금 나에게 ‘치유’로 다가왔다.</p>

생각해 보니, 2007년 알랭 드 보통의 책을 거의 다 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다시 뒤척거려보니까 한 4권의 책(<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건 원서로 샀다), <불안>, <젊은 베르테르의="" 행복="">, <동물원에 가기="">)는 못샀고 나머지는 샀더라. 그래서 일단 그가 썼던 책들을 다 읽고 싶어졌다. </p>

[#M_번역자에 대한 이야기|닫기|작년 한 해동안 번역된 책들은 생각해 보니 거의 읽지 않은 듯하다. 대체로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책들을 읽었고, 그건 순전히 ‘문체의 유려함’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난 고종석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A href="http://flyinghendrix.tistory.com/56" target=_blank><FONT color=#0000ff>2008/02/16 – [Book Reviews/Essays] – 순수한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환상 깨기(고종석, <<감염된 언어="">>, 개마고원, 2007)</FONT></U></A> </p>

번역투 문장이라는 것에 거부감이 밑바탕에 깔려있었던 것인데, 생각해 보면 ‘순수한 한글’과 ‘순수한 한국어’에 대한 환상이라는 걸 깨자고 말해놓고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순전히 “내탓이오”하고 시인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번역되는 글들의 수준이 ‘찌질’하다고 느껴질 때가 너무 많고, 종종 번역본 두 서너개를 펼쳐놓고 보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많은 수준의 차이를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자에 대해서 항상 열심히 살펴보는 편이긴 했다.

올해 내가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첫 번째 저작인 <<우리는 사랑일까="">>의 번역은 공경희였다. 전문 번역가로 몇 백권의 책을 번역한 사람. 별로 거슬리지는 않았다. </p>

두 번째 저작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번역은 정영목이었다. 그는 이 책 말고도 보통의 <<행복의 건축="">>, <<동물원에 가다="">>도 번역했더라. 이 정도면 So, so. </p>

이번에 읽었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의 번역은 지주형이었는데, 그게 좀 끌렸다. 그게 아마 이 책을 샀던 이유로 기억이 된다(이 책을 산 것은 2007년 2월 12일이다). 지주형은 강유원하고 같이 armarius.net(현재는 <FONT color=#810081>http://allestelle.net/</FONT> 로 옮겼음)에서 번역 작업등을 같이 했던 정치경제학자인데, 예전에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 대한 서평(http://media.daum.net/culture/others/view.html?cateid=1026&newsid=20040702120317099&p=munhwa)을 문화일보에 올렸던 적이있다(2004.7.3). </p>

칼 같은 지성과 논리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도대체 왜 ‘샤방샤방’하고 캐주얼한 보통의 책을 번역했을 까가 굉장히 궁금했다. 그래서 이 책을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_M#]
근데 왜, 프루스트인가? 일단 난 마르셀 프루스트를 잘 모르고, 그냥 그의 책 이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 알았을 뿐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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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etc/book/coversum/8974251698_2.jpg"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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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SPAN></SPAN></FONT><FONT style="TEXT-ALIGN: center" color=#112a75><FONT color=#000000></FONT></FONT><FONT style="TEXT-ALIGN: center" color=#112a75><FONT color=#000000>
철학을 전공한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그의 재담의 출발과 프루스트의 ‘길디 긴’ 이야기와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난 알랭 드 보통과 프루스트에게 마음을 던져버렸다.
</FONT>
</FONT><FONT style="TEXT-ALIGN: center" color=#112a75>
</FONT><FONT color=#112a75>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프루스트</FONT>

한 남자가 있다. 소화가 되지 않아 복대로 배를 감싸지 않고서는 잠을 청할 수도 없고, 천식 때문에 낮에는 외출조차 할 수 없으며, 겨우 저녁에야 몸을 ‘질질 끌면서’ 움직여 ‘털 외투’를 칭칭 동여매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남자. 강건하기는 커녕, 매일 골골대면서 잠을 청하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 중에 하나였단 남자.

“진실은, 내 삶이 더 나아지면 바로 그것이 엄마를 괴롭히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다시 아프게 될 때까지 모든 것을 망친다는 것입니다”(p.72). 엄마에게 이런 보고를 프루스트는 하기도 했다.

“오줌 눌 때 느껴지는 쓰린 듯한 느낌 때문에 중간에 멈추고 다시 시작하길 15분 동안 5~6번을 해야 하는데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아빠에게 여쭤보세요. 요즘 내가 맥주를 바닷물처럼 많이 마시고 있는데 아마 그 때문일지도 몰라요”라고 그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그때 엄마는 53세였고, 아빠는 68세였으며, 마르셀은 31세였다(p.72).</BLOCKQUOTE>
고통에 항상 노출되어있고, 게다가 엄마의 과보호로 항상 자신을 ‘칭얼대는 모습’으로 비춰야만 했던 그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줄 수 있는것인가?

<FONT color=#2b8400>그것은 우리가 조용하다고 생각했던 방에 라디오를 들고 들어온 후에, 조용함이란 오직 특정한 주파수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사실은 처음부터 이 방에 우크라이나의 방송국이나 소형 콜택시 회사의 야간통신에서 나오는 소리의 물결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음영, 표정의 변화무쌍함, 친구의 위선, 또는 이전에 슬퍼할 줄도 몰랐던 어느 상황 속에 숨겨진 슬픔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 책은 그 자신만의 발달된 감수성으로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우리의 숨겨진 촉각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FONT>(p.4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이 제목은 소설의 핵심 주제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FONT color=#c8056a>그것은 결코 서정적인 시대의 흔적을 추억하는 회고담이 아니었으며, 삶을 낭비하지 않고 삶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실천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였다</FONT>(p.17).
</BLOCKQUOTE>
<FONT color=#112a75>프루스트의 치유 – 감성 좌파? 감수성? 그건 말이죠.</FONT> </p>

한 동안, 1930년대 경성에 빠져있으면서 징그럽게 모던 뽀이 이야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우석훈의 생태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감수성’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하지만, 나한테 그 ‘감수성’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허영기가 낀 것들일 수도 있었는데, 내가 말하는 ‘감수성’이라는 것은 ‘감수성’이라고 불리워 지는 것들의 ‘이름들’을 잘 알고, 그것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에 어느 정도 빠져있었다 하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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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티스트 사르댕,<식사 기도=""> : 평범한 어머니와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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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프루스트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 주었다.</p>

<FONT color=#801fbf>빵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이상한 일에 주목하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그리고 즉시 삶의 부침이란 나와 무관한 것이 되었고, 삶이란 재앙을 무해한 것이 되었으며, 삶의 덧없음은 허구의 것이 되었다. ……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평범하고 우발적이고 소멸할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FONT>(p.194).

평범하다고 생각한 것이 이렇게 화려하게 묘사되었다는 것,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삶이 이렇게 흥미를 돋운다는 것, 그리고 하찮다고 생각했던 자연에 위대한 예술이 있다는 것에 그가 압도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FONT color=#004c5f>“당신은 행복합니까?”</FONT>(p.187)

자발적인 기억, 지성과 눈으로 하는 기억은 오직 나쁜 화가의 그림이 보여주는 봄이 살아 있는 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와 닮지 않은, 부정확한 과거의 그림만을 우리에게 줄 뿐이다. …… 그래서 우리는 인생이 아름답지 않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를 회상할 수 없기때문이다. 우리르 도취시켰던, 오랫동안 잊었던 냄새를 맡게 되지 않고서는, 또는 비슷하게, 우리는 더 이상 죽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물을 터뜨리게 하는 낡은 장갑과 우연히 마주치지 않고서는(p.196).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낡았을 뿐 아니라 쓸데없이 사치스럽다.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세계를 똑바로 평가하라고 촉구하면서 수수한 광경이 지니고 있는 가치에 대해 계속 환기시킨다(p.205).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봄으로써 생길 수 있는 행복은 프루스트의 치유 관념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불만이, 삶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p.192).

</BLOCKQUOTE>일상에서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 그 예술성을 찾는 것. 이를테면 난 그 명제를 부정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예술’에 대해서 ‘예술사적 지식’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 적은 많았고, ‘학예회’같이 아마추어들이 하는 음악에 대해서 한 편으로 힐난 한 것도 사실이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아직 둔감했던 것이다. 예민하게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앞으로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같은 책에서도 펼쳐질 것 같기도 한데, 어떤 정형적인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사물을 바라보고, 여행을 하고, 또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다가오는 순간 순간들에 대해서 예민하게 느껴보는 것, 거기에서 오히려 새로운 ‘감수성’이 만들어 지고, 일상이라는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p>

그는 기본적으로 ‘반권위주의자’인데, 어떤 사람들이 예정해 놓았던 권위적인 작업들(이를테면 고전)을 존중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에서 ‘더 나아간’ 무엇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책들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감수성을 키워주고 지각능력을 길러주지만, 어떤 시점에 다다르면 그러기를 멈춘다. 이것은 우연히 그러는 것도 아니고, 가끔 그러는 것도 아니며, 운이 나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불가피하게, 정의상 그 저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로 그런 것이다. 모든 책에는 뭔가 앞뒤가 안 맞거나 잘못되었거나 또는 거북하다고 느껴지는 계기가 있게 마련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지침서를 내려놓고 홀로 생각을 계속할 것을 요구한다(pp.244-245).

저자에게는 ‘종결’이라 불릴 수 있지만, 독자에게는 ‘자극’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책들의 위대하고 놀라운 성격 중의 하나다(그것은 우리의 정신적 삶에서 독서가 차지하는, 본질적이지만 동시에 제한된 역할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저자가 떠나버린 곳에서 자신의 지혜가 시작된다고 매우 강하게 느끼고, 그가 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리에게 소망을 부여하는 것밖에 없는데도 그가 우리에게 답을 주기를 원한다. …… 이것이 독서의 가치이자 그것의 부적절성이다(p.246).

우리는 시선을 끄는 예술에서 일반적인 교훈을 얻는 대신에 그것이 바라보는 대상을 단순히 추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술가들이 다루지 않았던 세계의 부분들을 정당히 평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사람은 프루스트가 전혀 맛을 본 적이 없는 후식, 그가 전혀 묘사한 적이 없는 옷, 그가 다루지 않은 미묘한 사랑, 그가 방문하지 않은 도시들에는 시간을 거의 할애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예술적 진리와 관심의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인식하고 고통스러워할 것이다(p.269).
</BLOCKQUOTE>
결국에는 ‘내’가 그리고 ‘내가 본 것’, ‘내가 맛 본 것’, ‘내가 읽은 것’, ‘내가 들은 것’이 중요한 것이다. </p>

<FONT color=#c8056a>고유의 무언가.</FONT>
</STRONG>
어떤 것의 권위에서 나오는 ‘우상’으로서의 숭배가 아니라, 어떤 대상을 접하고 그와 연상된 기억과 마주쳤을 때, 그것을 본인의 것으로 포착해내고 다시금 자신의 어떤 ‘고유의 인상’으로 자신의 ‘고유의 책’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프루스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이를테면, 어떤 권위에 종속되는 것은, ‘과거’에게 ‘현재’를 헌납하는 일일 테고, 자신의 어떤 거대한 마스터플랜 때문에 일상에서의 소소한 것들을 모조리 반납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담보’로서의 ‘현재’가 될 것이다.

‘감수성’이라는 것은 살아있음, 꿈틀댐, 그리고 고통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그 고통에서 도망치는 것보다는 그것이 더 이상 내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치유’하는 과정과 맺어지는 것이다. <FONT color=#c8056a>프루스트는 생생한 ‘고통’과 ‘치유’ 그리고 ‘아름다움’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걸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FONT>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의 ‘감수성’을, 그리고 각각의 ‘고유의 기억’들을 자꾸만 획일화 시키고, ‘one of them’으로 우리를 환원하려는 기제들을 작동시킨다. 이 상황에서 물론 그 하나 하나를 모아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각자의 환원될 수 없는 ‘차이’, ‘고유성’을 회복하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결국 궁극적으로 레닌주의자는 될 수 없는 이유. ‘화이부동’이라는 말에 한 방에 끌렸던 이유.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또 한번 확인한다. 그리고 내 감성을 치유받는다. 내 상처를 치유받는다.

마지막으로 왜 지주형이 이걸 번역했는 지도 알겠더라. 그가 어떤 세상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지도 좀 많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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