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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차분한 사랑이야기 –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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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문예출판사 |
2009/01/30 – [Book Reviews/Liberal Studies] – 고미숙이 제안하는 연애와 사랑의 ‘초식’ 쌓기 – 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고미숙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읽고서, 책에서 인용하는 내용 중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집에서 썩히고 있던 책을 잡았다. 몇 년 전에도 분명 이 책을 읽으려 노력했었다. 로버트 그린의 <유혹의 기술="">을 읽고 있던 내게 친한 학교의 형은 “<유혹의 기술="">을 읽기 전에 <사랑의 기술="">부터 읽어라!”라면서 ‘기교’와 ‘작업’의 ‘정석’을 통해 답을 얻길 바라는 내 연애에 대한 해법찾기에 한 방을 먹였다. 그래서 교보문고에서 ‘구도서정가 3,000원’으로 판매하는 문예출판사 판 황문수 번역의 <사랑의 기술="">을 샀다. 그 때 왜 읽다가 접었나에 대해서 별로 기억되는 바가 없었는데, 이번에 읽다보니 알 수가 있었다. </p>
이를테면 현대어에 있어서 번역이 가능할 경우나 좀 번역이 어려운 경우에, 혹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서는 원어로 두가지를 함께 다루어 주는 것이 좀 더 나을 듯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들을 그냥 한자어로 표기하고 있고, 그 한자의 뜻과 음을 옥편에서 찾는다 하여도 그 뜻이 정확하게 와 닿지가 않을 때가 많다.
그리고 <역자 후기="">를 보건데 역자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음을 실토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p>
그러나 사랑하려고 해도 안 된다. 사랑하려고 하면 그럴수록 사랑에 실패하고 점점 더 다른 사람들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뼈저린 고독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사랑하려는 노력의 실패는 사람에 대한 공포를 일으키고 자기 자신의 무능력을 은폐하기 위한 합리화에 급급하게 만든다. 분리상태에서의 불안과 고독이 두려우면서도 이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다(p.189).
이게 왜 문제인지는 아래의 내용이 해결해 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랑하라!”고 외치고 있다.
독해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을 때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생각들을 그래도 읽을 수는 있겠지만, 너무나 피곤한 일이 되어버리고, 저자가 춤을 추듯 리듬을 타면서 글을 썼을 부분에서 난 허덕허덕하면서 겨우 스텝을 맞출까 말까에 도달하고 만다.
‘자동인형’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p.22)? ‘신경증’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정신병? p.55) ‘공서적 애착’은 무슨 말일까(p.57)? 굳이 ‘퍼스낼리티’라고 표기해야 할까(p.110)? 그리고 책의 모든 부분들에 써있는 ‘어린애’라는 표현도 참 한심스럽다.
그래도 억지로 읽어냈고(이 짧은 책을 읽는 데 시간이 이틀 꼬박 걸렸다.), 나름의 생각들을 해 본다. (가능하다면 후에는 원서로 이 책을 꼭 읽어볼 생각이다.)
현대인들은 자기의 ‘반쪽’을 찾으려 애를 쓴다. 그렇기에 자신이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대상’을 찾지 못해서라고 말할 때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은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는 ‘기술’과 같은 것이며, 고미숙이 말했듯 ‘초식쌓기’의 공부(쿵푸)가 필요한 과정이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p.25)이다. 그것은 ‘대인간적 융합의 욕망’이 된다(p.25).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만 또 변화할 수 있고, 또한 그것들이 존중되는 세계 안에서 ‘하나되기’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짝을 찾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는 것, 반대로는 상대와 자신이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영역의 것이 된다. 그리고 사랑을 주면서 자신이 변한다. 몸과 마음이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이……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로부터 분리시키는 벽을 허물어 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p.28).
‘내’가 독립을 성취할 때에만, 다시 말하면 목발 없이, 곧 남을 지배하고 착취하지 않아도 서서 걸을 수 있을 때에만 존경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가 노래하듯 ‘사랑은 자유의 소산’이며 결코 지배의 소산은 아니다(p.37).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은 주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이유 때문에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한다는 행위에서만 성립된다.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의 표현이다(p.30).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ㅡㅡㅡ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顯示)를 주는 것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그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절묘한 기쁨이다(p.32).
(인간의 비밀을 아는) 또 하나의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를 통해 알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는 나 자신을 알고 나는 모든 사람을 안다ㅡㅡ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인간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들의 사고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ㅡㅡ(p.39).
미숙하게 무조건적인 엄마의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부로 엄격한 아빠의 사랑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스며들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합일’을 느끼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러기 위한 주체는 독립적인 주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Meister Eckhart, p. 76에서 재인용).
이런 온전한 사랑을 하기를 프롬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루어 지지 않는 현대사회. 결국 ‘사랑의 기술’을 찾기 위한 행보가 현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진단으로 나아가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프롬은 프로이트의 ‘욕망’을 통한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고, ‘사회적 관계’안에서 이루어지는 ‘욕망의 재구조화’의 측면을 살펴본다. 이를 테면 맑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했던 말. “그는 흑인이다. 그는 특별한 사회적 관계에서만 노예가 된다.” 이를 프롬식으로 하면 “그는 특별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만 정신병자가 된다.”. 프롬은 무조건적인 무의식에 깔려있는 ‘욕망’을 멈추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포착한다. </p>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의 고원="">을 펴 낼 때 겨냥했던 제목이 ‘앙띠 오이디푸스’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만들어 내는 인간의 재구조화라는 측면이 그 당시에 어떻게 조망되었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p>
두 사람이 서로 그들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사랑은 이와같이 경험될 때에만 끊임없는 도전이다. 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것이다(p.120).
오늘날 이러한 노력은 전혀 없다. 매일매일의 생활은 어떠한 종교적 가치로부터 엄격하게 단절되어 있다. 매일매일의 생활은 물질적 안락에 대한 절망,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성공하려는 갈망에 바쳐지고 있다(p.121).
고전이 무서운 이유는 구닥다리 같고 꼰대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지만, 돌아와서 ‘지금’ 우리에게 추상같은 호령을 내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정점에 치달아 파국으로 가고 있는 ‘지금’ 우리의 세계는 여기에서 얼마나 탈피한 ‘멋진 신세계’인가?
또 한편으로 알랭 드 보통이 프루스트를 빌어 말하는 ‘현재’, ‘지금’에 충실한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과거의 경험의 축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만나서 사랑을 하면서 그것들이 충돌할 때 ‘과거’를 탓하거나 혹은 ‘과거’를 예찬하거나, 아니면 ‘미래’를 불안해 하거나 이유없는 ‘낙관’으로 ‘미래’를 예찬하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충실하고 그와 함께 배워가면서 느껴가면서 함께 변해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해 보게 된다.
2009/01/06 – [Book Reviews/Essays] –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 알랭 드 보통 |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하던 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에 담겨있던 진실을 에리히 프롬에게서 느꼈던 것 같다. ‘잡았다’고 느꼈기에 변하지 않는 것이 주는 연약한 마음을 읽어본다. </p>
여전히 연약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고……. ‘낚시’게임과 같은 연애에 대한 ‘실용서’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잘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은 어쩌면 이 세계를 돌파할 단 하나의 대안이 아닐까? 68세대의 ‘히피’들이 마리화나만 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사랑의 에너지’로 그 시대의 우울을 돌파했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랑을 통해 세계를 다시 조망하고 내 주위의 세계를 따뜻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이 책 덕택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까지 잡게 되었다. 전작주의자의 습관처럼 또 흘러흘러 에리히 프롬에게 ‘스며들고’ 싶어 졌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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