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사람들의 시청이 뜸한 12시대로 편성한 방송국의 편성 담당자의 책임이 일차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전에 책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관심이 어느 정도 공고화되어 있었다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하긴, 이런 사태는 이미 예상되어 있었다. 사회과학책 대신 자기계발서를 집어버린 IMF 이후의 독서 세태가 그것을 보여주니까 말이다.
</p>
오늘 반나절에 잡자마자 다 읽어버린 이권우의 <책 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의 저자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얼마 전 발표된 통계청 자료는 우리가 위기상황에 놓여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1997년과 비교할 적에 2003년에는 사회과학 서적의 신간 발행이 -91.2%라는 최대 감소폭을 기록했고, 철학과 종교 분야 신간 발행은 각각 54.8%와 33.0%에 이르는 감소율을 나타냈다. 이에 비해 실용서 분야는 20% 이상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오늘을 분석하고 비판하며, 그것을 디딤돌 삼아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창이 굳게 닫혀 버린 것이다(p.62).
꿈꾸는 대신 “살아 남을 테야, 아니면 죽을 테야?”라고 물어보는 자본의 뻔한 논리 앞에 무기력하게 ‘행복한 이기주의자’로 ‘이기는 습관’을 갖추고 살아남기를 택하는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어쩌면 답답하고 느리고 당장의 output이 없는 사회과학서나 인문서를 읽는 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희한한 일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책 권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물론 모든 책을 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학교를 다닐 때에는 문제집과 학습지를 비롯한 각종 참고서를 ‘풀고’. 논술 직전에는 학원에서 나눠주는 ‘고전 요약본’을 읽고, 솔루션을 가지고 적당한 수준의 답안 작성을 요구 받는다. 대학에 가서는 ‘모질게’ 토익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니 책을 읽을 시간이 없고, 그 짬짬히 유학이나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을 읽는 다던가, 아니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밖에 안되는 습관을 담아놓은 책을 읽곤 한다. 종종 부자가 되었거나 사회적 명망을 얻은 이들의 ‘비밀’을 찾아내려 할 때까지가 그들의 독서의 마지막(!)이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최소한 ‘4년제 대학’에 발이라도 디뎌본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 좀 하다가 군대에 다녀와 직장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나, 직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은 책과는 아무 상관없는 세상에서 하루 하루를 TV와 패션 잡지 정도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책을 권할 사람도 별로 없고, 책을 읽는 사람도 별로 없으며, 게다가 한글 독해력(영어 독해력도 마찬가지다)마저 바닥으로 추락해 버린 청년층이 좀비처럼 기어다니는 것이 2009년의 한국 사회이다.
탐서주의자, 혹은 책읽기의 달인이 말해주는 책 읽는 이유와 방법
도대체 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일단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TOEIC, TOEFL, TEPS 등의 영어 능력시험 문제집을 풀기 바쁜 ’88만원 세대’들에게 더 강한 유인이 없다면, 그들은 다시는 사회과학이나 인문서를 읽지 않을 계획이기 때문이이다. 그리고 책을 안 읽고 50대 이상까지 버텨버린 이들이 다시 책을 잡을 확률은 거의 없다(물론 나는 장년기 이후의 만학도들을 예찬한다). 마지막으로 이 ‘유인’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책에서 ‘배제’되어버린 ‘대학’과 상관없이 20대를 보냈을 젊은 층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호모 부커스="">의 저자 이권우의 시각은 조금 ‘세속’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확 ‘속물’은 아닌데도 지금까지 ‘어렵게’ 책을 ‘모셔온’ 사람들에겐 기분 나쁘게 느껴질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p>
왜 오늘의 젊은이들은 책을 읽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오로지 이들만의 책임일까, ……
먼저 그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에 책을 읽고 성공한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금력과 권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지식과 지성의 가치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보다 앞서야 성공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 사회다(pp.52-53).
이를테면 저자에게는 책 읽기는 미래를 위한 ‘저축’이고, 그 저축들이 쌓였을 때 ‘문화 컨텐츠의 시대’인 지금에야 말로 ‘책 읽기’의 위력이 나타난다고 역설한다. ‘교양인’으로 살고 자신을 도야하기 위한, 혹은 ‘지식’ 그 자체에 대한 탐닉을 말하던 책을 ‘모셔온’ 사람들이 좀 당황할 만한 구석이 있다.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창의력과 상상력이 부의 원첨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워 주는 ‘학교’가 어디냐 하는 점이다. 코폴라와 박찬욱 감독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그 답을 일러 주고 있다. 책이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힘을 길러 주는 학교라고 말이다(pp.62-63).
하지만 저자 역시 그렇게 말을 뱉어놓고도 갈팡 질팡 하는 면이 있다(p.81). 실용적 책읽기에 대해서 회의를 하다가 도정일과 서경식, 그리고 ‘해리 포터 시리즈’의 J.K. 롤링의 책을 읽고선 오히려 다시 입장을 선회한다.
그러나 생각을 깊이 할수록 이것은 새로운 답이 아닌 듯싶었다. 더욱이 너무 현실가치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반성을 했다. 책읽기가 당장 어떤 효과를 불러와야 가치 있는 것은 아니잖은가. 말하자면, 책읽기는 제동장치다. …… 그런데 상상력이 돈이 되는 시대이니만큼 그것을 익히고 키워 주는 책읽기의 가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다른 답을 찾아야 했다(p.81).
나는 너무 늦게 새로운 답을 얻었다. 굳이 정리하자면,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힘을 키우려 해서이다. 그렇다면 다시 도전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모든 책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는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좋은 책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그들의 눈물에 공감하고 함께하려고 이끄는 책이라고 말이다. …… 그렇다면 다시, 우리는 상상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써야 한다. 그러려고 있는 책이 비로소 가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p.87).
도대체 공부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질문해 보자. 그것은 스승과 제자들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그것을 주제로 토론하고, 이를 글로 써 보는 것이지 않던가. 달리 표현하자면, 읽고, 말하고, 쓰고, 고쳐 주고 하는 연속과정에서 지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p.97).
저자의 말들이 조금만 더 정치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주저리 주저리 나열하듯이 서로 모순될 수 있는 것들을 한꺼번에 말하느니 오히려 한 두마디로 딱 잘라서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 싶다. 물론 그것들을 단정하지 못하는 이유에 ‘실용적 책읽기’라는 말을 쉽게 거절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만, 오히려 ‘실용’이라는 말에 대해서 ‘상상력’을 꼭 ‘부’와 연결시켜야 하는 지에 대해서 한 번쯤은 좀 물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인간’에 대한 공감을 위한 책읽기와 ‘문화 컨텐츠 창출의 소스로서의 책 읽기’ 사이의 간극을 좀 좁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았나 싶다.
차라리 가장 좋았던 이야인 ‘쓰기 위한 읽기’ 하나만 갖고 이야기를 해도 좋지 않았을까? ‘호모 부커스’라는 이름이 너무 벅차게 넓은 폭을 강요했던 것일까?
그동안 우리는 오로지 읽기 위한 읽기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어떻게 해야 잘 읽을 수 있고, 무엇을 읽어야 도움이 될까 하고 고민해 온 것이다. 이제 강조점을 바꿔 책을 읽어 보자. 쓰기 위해 어떻게 읽어야 할까로(p.92).
이 이야기만 갖고도 한참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호모 부커스="">의 겨냥하는 독자층이 10~20대라는 걸 생각하면 그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p>
다만 그의 책 읽기의 방법들은 참고할 만한 것들이 많고, 나 역시 그것들을 나름대로 하려고는 한다.
이를테면 같은 주제의 책들을 모아서 읽거나(엮어 읽기), 한 저자의 책들을 다 읽는 ‘전작주의자’의 방법 등은 언제나 참조할 만한 좋은 책읽기의 방법이다. 또한 읽고 토론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책읽기가 아닐까?
책을 읽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함께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그 책에 담긴 내용이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수용된다. 주변을 둘러보라.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자는 모임이 많을 것이다. 우물쭈물 망설이지 말고, 글어가 함께 토론문화를 즐겨 보라! 장담하건대, 한 권의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함으로써, 그곳이 어디든 그곳은 변화를 경험하는 ‘교회’가 되며, 민주적 가치를 경험하는 ‘학교’가 될 터이다(p.138).
그리고 다치바나 다카시로 대표되는 ‘다독법’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평가도 읽어볼만한 구석이 있다. 누구의 책읽기이든 각자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좋은 책이라 떠벌리더라도 읽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책이 아니다. 나만의 양서가 있으니, 극단으로 말해 그 누구도 감동하지 않았으며 사회에 끼친 영향이 아예 없더라도, 오로지 읽은 그 사람만을 사로잡은 책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거듭 말하거니와 주눅 들 필요 없다. 남들이 꼭 읽어야 한다는 책을 읽지 못했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은 덕에 나에게 일어나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면, 앞으로 책을 스스로 잘 읽어 나갈 수 있다(p.161).
며칠 전 읽었던 고미숙의 <호모 에로스="">, 그리고 <호모 부커스="">를 제외한 나머지의 저작들은 모두 <연구공간 수유 + 너머>의 필진들이 주축이 되어 있었고, 대체로 재기 발랄한 다른 저자들의 책에 비해 이 책은 좀 심심한 편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 편에서는 <호모 쿵푸스="">와 겹치는 면도 있을 듯하다. ‘공부’와 ‘책읽기’의 경계 자체가 모호하니 말이다.
</p>
약간의 아쉬움들이 떠나질 않는다. 좀 특별한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식의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을까?
책 읽지 않는 사회에서 ‘책읽을’ 유인을 좀 만들어야 할 텐데…… 내 식의 책 읽기를 어떻게 더 재미있게 표현할 까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겠다. </div>
호모>호모>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