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살아가는 지금의 사랑이야기, 그 드라마 –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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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816767&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A> – <IMG alt=8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8.gif" border=0>
노희경 지음/헤르메스미디어</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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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href="http://flyinghendrix.tistory.com/229" target=_blank>2009/02/03 – [Book Reviews/Liberal Studies] – 에리히 프롬의 차분한 사랑이야기 –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A>
<A href="http://flyinghendrix.tistory.com/228" target=_blank>2009/01/30 – [Book Reviews/Liberal Studies] – 고미숙이 제안하는 연애와 사랑의 ‘초식’ 쌓기 – 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A>
<A href="http://flyinghendrix.tistory.com/184" target=_blank>2008/11/12 – [Culture/TV] – “그들이 사는 세상” 中</A> </TD></TABLE>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를 좋아했다. 딸 없이 아들만 둘인 엄마의 침대 옆 자리에 누워 8시 반 드라마를 같이 보고 수다를 떨고, 10시가 되면 함께 미니시리즈를 보면서 하루를 정리하곤 했다. 싼티나는 취향일 수 있지만, 나한테 영화만큼이나 드라마를 보는 행위는 신성했다. 그리고 엄마와 유일하게 같은 주제를 말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하지만 언제나 그 드라마들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흔히 할머니와 고모가 결론짓던, 집에 모여서 수다 떨던 아줌마들의 결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연속극과 미니시리즈의 주제와 전개에 식상해지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어떤 드라마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대로 밥은 먹어야지!” 하고 등을 두드리며 손주에게 말을 하던 나문희 할머니의 대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사랑에 완전히 절망한 사람에게 할머니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 “노인네가 뭘 알아?!”하며 픽하고 한마디 눈물어린 독설을 퍼부을 것 같지만, 그 순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손주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이야기하는 동화같은 해피엔딩이 아닌, 여전히 ‘살고 있음’, 그 일상성의 지속과 사랑을 함께 엮어내는 노희경의 드라마가 좋았다. <그들이 사는="" 세상="">, 그리고 예전에 숱하게 봤던 노희경 작, 표민수 연출의 드라마들을 놓지 않고 본 이유다.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단순히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오히려 폐부를 찌르는 독설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 거기에는 여전히 계속 사랑을 꿈꾸는,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노희경의 삶의 결에 묻어있다. 그녀는 순수한 청춘의 사랑을 믿지 않고,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의 순수함을 감당하지 못하는 은수(이영애)를 이해하지만, 여전히 사랑이 언제나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모든 감정선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또 사랑해 보려고 하고, 우리에게 사랑해 보라고 채근한다. 그건 어쩌면 추억꺼리나 미래의 판타지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일 거다. > 청춘이 아름답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인 걸 알게 된 건 서른 중반이 훌쩍 넘어서였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아마도 이십대에 벌써 푸근하고 짜릿하게 완벽한 애인이 있고, 집안이 유복하며,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 잘 풀린 별나도 별난 사람이거나, 청춘에는 청춘이 싫고, 중년에는 중년이 싫고, 노년에는 노년이 싫다고 말하면서 허구한 날 지난날을 그리워하거나, 오지도 않은 날을 기대로 채우는 어리석은 사람일 거라, 나는 단정한다. 단정의 기준은 물론, 내 청춘에 빗대어서다(p.35). > >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은 신의 잘못이다!(p.81) > </BLOCKQUOTE> > > > 그런 그녀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를 잡고 읽었다. > > > > > 먼저 작가로서, 온전한 성공도 완전히 실패함도 아닌 그 나름대로 ‘먹고는 살만한 삶’ 자체마저도 긍정하고 ‘자기 학대’하지 말라는 그녀의 위로를 들으며 젊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 > > > > > > “나는 나의 가능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p> > > > > 섣불리 젊은 날의 나처럼 많은 청춘들이 자신을 별 볼일 없게 취급하는 것을 아는 이유다. 그리고 당부하건대, 해보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는 게 인생임도 알았음 한다. > > 근데 그 어떤 것이 안 된다고해서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은 또 아니란 것도 알았음 싶다. …… 그런데 나는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70퍼센트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뭐 어쨌건 밥은 먹고 사니까. 그리고 그 순간엔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까. 자기합리화라 해도 뭐 어쩌겠는가. 자기학대보단 낫지 않은가(pp.38-39). > > </BLOCKQUOTE> > > > > > > > > <거짓말>을 쓰던 당시의 날 서있는 작가주의에서 힘을 빼고 “드라마는 재밌어야” 한다며, 또 ‘배우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드라마론’을 읽으면서 노련한 그녀의 모습이 <그들이 사는="" 세상="">의 발랄하고 가벼워진 분위기로 이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슬픈 재미, 아픈 재미, 서글픈 재미, 배우는 재미”를 모두 ‘재미’라 말하는 그녀의 드라마와 획일화된 시선의 트렌디 드라마들을 비교하게 된다. > > > > 일상의 구질구질함과 처연함, 그리고 낭만적이고 싶지만 추적추적한 사랑이 만나, 결국엔 지금 우리의 치유는 어디에서 오며, 또 우리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 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그녀의 드라마. > > > >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 우리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전할 때, 우리에게 절대로 ‘고통’을 피하지 말라고 조언하곤 했다. ‘고통’을 겪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불행’하지 못하게 그 고통과 당당히 마주하라고 말이다. > >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과 싸우는 법’, ‘사랑을 감당하는 법’을 외면하면서 자꾸만 도피하고 있지는 않는가? “고통 받지 않으려면 패배하지 말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 않는가? > > > > > > > > > > ‘고통’에 익숙하지 않고 ‘사랑’에 익숙해지지 않은 덕택에 우리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삶의 존엄까지 무너져 버린 철거민들의 삶에 무감한 것도, 살인자를 ‘악마’로 쉽게 몰아버리고 자신들과 무관하다면서 침을 뱉고 욕했던 것도 실은 그 ‘고통’에서 회피하고자 했던, 그렇기에 ‘고통’을 절절히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뒷모습은 아니었을까? 깊게 ‘사랑’하는 것에 인색했던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가? > > > > > > > > > > 우리는 그런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감성조차 잃어가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 > > > > > > > > >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픔을 더 예민하게 느끼면서도 그것들을 정면에서 극복할 수 있는 감성의 회복, 그리고 ‘사랑하기’가 아닐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