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에 기댄 보수주의자들의 가치관 – Changeling(2008)

체인질링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2008 / 미국)
출연 안젤리나 졸리, 존 말코비치, 제프리 도너반, 마이클 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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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좌파와 우파의 결정적인 차이는 자신의 삶의 이력일 수도 있다. 자신이 마주했던 ‘가정’, ‘사회’, ‘국가’의 경험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할 수가 있다. 그건 어떤 집단이 가장 자신에게 ‘가혹’했느냐, 혹은 ‘따뜻’했느냐의 문제로 환원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가 될 때, 우리는 ‘객관’의 잣대를 가져와서 그것들을 마구 재단하고 쉽게 결론을 내려버리지만, 사실 자신의 이야기가 되면 무기력할 때가 많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체인질링>(Changeling, 2008)을 며칠 전 보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같은 영화를 볼 때도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의 영화는 항상 ‘가족’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곤 한다. 나에게 다가오는 다른 집단들은 그 다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회’와 ‘국가’라고 칭하는 집단에 대한 강경한 불신이다. 그들은 언제나 ‘부패’해있고, 하나의 이익집단이며, 철면피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인 데다가 호시탐탐 자신들의 망신살 뻗침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고 있는 집단이다.

million dollar baby(2004)
<체인질링>을 본다. 애 아빠 없이도 스윗홈을 만들고자 애썼던 엄마 크리스틴 콜린스Christine Collins는 어느 날 회사 앞에서 헤드 헌터가 말을 거는 것 때문에 전차를 놓친다. 집에 돌아갔더니 매일 키를 재주면서 물고 빨고 했던 아이가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봄날에 아이는 돌아온다. 하지만, 그 아이는 누구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언제나 빠른 호흡을 거부한다. 정말 맥박의 속도가 아니라 호흡의 속도로 영화는 전개된다. 한 씬 한 씬 탁탁 끊어서 빠른 호흡으로 엄마의 격정적인 마음을 표현할 것 같지만, 끝끝내 카메라는 크리스틴 콜린스의 발걸음을 천천히 따라갈 뿐이다. (스포일러는 여기까지~) 영화를 다 보고나면, 1970년대 닉슨과 케네디가 맞붙던 시절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이야기를 꼭 해야할 것 같다. ‘보수주의’라는 말이 지금처럼 천박함으로 떨어진 것은 오로지 네오콘이라든지 혹은 신자유주의자들 또는 한국의 토건주의자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보수주의자의 마음이라는 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보여주려는 가족주의자들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를테면,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납치해 살해하려한 사형수를 대할 때의 마음. 혹은 부패한 ‘국가’와 ‘사회’, ‘공권력’보다는 엄마가 아이에게 더 따뜻할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믿음. 그나마 엄마가 무기력할 때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목사님’ 정도라는 것. 하지만 ‘목사님’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그를 ‘완전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답답함’을 드러내려 한다는 것을 볼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유일한 희망은 ‘가족’이다. ‘가족’ 그리고 ‘가족주의’를 말하면, 우리는 흔히 한국에 온존해 있는 ‘가부장제 가족주의’를 이야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것은 가부장적이지 않다. 엄마든 아빠든 목사든간에 결국 뿌리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의 가족주의의 핵심일 뿐, 그 주역이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주의는 혈연과도 크게 상관이 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Frankie Dunn(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딸이라서 매기를 끝끝내 돌봐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녀의 피붙이들은 그녀를 ‘돈’하고면 연관시켜 생각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강경한 공화당 지지자이다. 난 그의 영화를 보면서, 미국의 ‘세련된 우파’들이 8년의 세월 동안 얼마나 답답했을 까 하는 생각 또한 해본다. ‘생활의 태도’로서의 미국의 보수주의가 미친 놈의 카우보이 새끼 때문에 얼마나 망신을 당하는 가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사형제는 결국 한 명의 죽음을 더 만들 뿐이다”라고 좌파가 이야기 할 때 “넌 새끼가 죽었을 때를 겪어봤냐”라고 물어보는 우파. “국가가 복지를 늘릴 수밖에 없다”라고 좌파가 말할 때 “국가는 엄마의 품처럼 근본적으로 따뜻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우파. 그렇기 때문에 그가 믿을 것은 결국 자신의 ‘가족’밖에 없다. 꿋꿋하게 자신의 말을 하지만, 그는 같이 담배한대 태우면서 인생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는 멋진 할아버지인 것이다. 그 정도 수준은 되어야 서로 천천히 대화하면서 접점을 찾을 수 있는데, 어느새 우파들에 대한 인식은 ‘한탕주의자’, ‘친기업주의자-자본가 집단’, ‘예수쟁이들’의 극단적인 이미지로 치닫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멜 깁슨 같은 느낌에서의 강경함일 것이다. 모두다 공감할 수 있는 상식(common sense)의 수준에서 이야기를 하되, 결국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보수주의를 영화로 보여주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보면서 미국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욕할 수 없고, 욕하지 않는다. 또한 대체로 민주당에서도 급진적인 그룹인 미국의 배우들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업에 동참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과,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송해성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물론 공지영도 떠올린다)이 마구 머릿속을 떠돌아 다니면서, 가슴 한 군데가 먹먹한 데 아직 풀리지 않는다. 나도 이러다가 보수주의자가 되려나? 다만 내 눈앞에 펼쳐진 일에서 내가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