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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 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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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 ![]() 데이비드 베일즈.테드 올랜드 지음, 임경아 옮김/루비박스 |
“기타를 친다”라고 말한 지 이제 10년이 되었다. 하지만 정말 기타를 못 친다. 누가 물어보면 쪽팔리니까 치기는 친다고 하는데, 종종 물어본 사람이 나보다 기타를 잘 치는 경우 잽싸게 도망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철판을 까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타 소리에 무덤덤하다거나, 일렉기타 소리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기타를 치는 것이 아니라 기타리스트들의 기교와 음색에 대해 ‘말’을 하자고 하면 빠지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난 기타라는 악기에 대해서 잘 ‘알지만’, 또 기타리스트들을 많이 ‘알지만’ 기타를 잘 치지 못한다. 그냥 겨우 박자 안 뭉게고, 티 안나게 묻어가게 소심하게 반주용으로 치고 있는 중이다.
하는 것과 아는 것이 얼마나 다른 지에 대한 이야기. 또 무엇이 있을까? 글을 많이 읽으면 우리는 문필이 될 것인가? 음악을 많이 들으면 우리는 엄청난 뮤지션이 될 수 있을까? 그림을 많이 보면 우리는 화가나 조각가, 시각예술을 할 수 있을까?
거기엔 분명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괴리가 있다. 난 망치로 못을 어떻게 때려야 하는 지 정말 입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망치질을 잘하게 될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망치질을 잘 하려면, 망치로 이것저것 박아봐야 한다.
예술을 창조하는 것과 감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 예술창조는 하고자 하는 것과 해낸 것간의 피할 수 없는 간극을 그대로 보여주어 심기를 불편케 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pp.18-19).
아까 이야기를 하자면, 기타를 치면서 이론책을 보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일로 돌아오자면, 좋은 책을 읽되 써봐야 한다. 그래야 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거다.
이런 말들을 왜 저자가 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보통 ‘천재’를 동경하고, 그와 상관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냥 하루 하루를 산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예술에 대한 생각자체를 바꿔버리면서 천재에 대한 것은 잊자고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통념상,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렇지 않던 간에, 통속소설이나 그 많은 그림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예술은 천재성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설사 진실이더라도, 그 근본은 지극히 운명론적이기에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p.15).
예술창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작업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p.18).
완성된 작품은 예술가가 그 작품을 창작할 때 고심하던 그 어떠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거의 시사해주지 않는다(p.135).
또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범주에 속하든 창작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만둘 때 최소한 “난 재능이 없어”라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늘상 누구나 겪었던 것이기에. 훌륭한 화가의 작품을 배우는 것보다, 그가 작업실에서 가졌던 행위들을 배워야한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저자는 배워야 할 디테일은 ‘창작활동의 과정중에 지치지 않는 법’에서 캐야한다고 말한다.
이제 모두다 공감할 ‘천상’의 무엇이 아닌, ‘자신’의 작품을 만들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을 창안하라 말한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보편적’ 무엇이 아닌, ‘자신’의 ‘현재’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다시 한 번 말해, 예술창작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자신의 작품이 창작되는 방식으로 생활해야한다는 점이며, 이것은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유용한 생활방식들을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 또한 그러한 예술적인 태도는 단순한 과정을 넘어, 작품에 자신만의 고유한 미학을 심어주는 진정한 행복의 순간을 찾아오게 한다(p.97 비문만 독자가 수정).
그러한 전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매듭짓고서 저자는 예술가들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난점들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한다.
미지의 세계를 쫓는 예술창작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 지에 대한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두려워하게 되면 표현의 자유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겠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문제는 첫눈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는 점이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의문시 할 이유가 없으며, 남의 신념을 구걸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p.106).
자아의식이 외부세계가 정해놓은 등급에 너무 직접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상위 등급의 작품을 만들려는 생각에 지나치게 잠식당해 자신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스스로 평가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라며 작품 더미 위에 올라앉게 되고 만다(p.112).
노희경이 말한 바가 있었다. “생각만 하면 머리만 아프다. 그 시간에 하나라도 쓰자.”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직관적으로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와 맞물려서 들린다. 예술가의 창작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본질’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문제로 바꿔놓고 그것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이 가진 장점이다. 작업실에서 어떤 붓을 쓸 것인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것과 혼자 독립적인 작업을 하는 것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 등.
이쯤에서 한창 뜨고 있는 홍대 인디씬의 작곡, 작사, 그리고 앨범 프로듀싱 과정이 생각이 났다. 그들의 모습은 하늘에서 신이 꿈속에서 들려준 노래를 만들어 한 번에 녹음해 준 것이 아니라, 살면서 느꼈던 것들의 축적, 그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천천히 실험하면서 지치지 않았던 거북이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사실상 예술창조란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찾는 세계와의 연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예술창조는 예술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들어내 보이도록 한다는 점이다. 예술은 곧 접촉이며 예술작품은 필연적으로 그 접촉의 본성을 드러낸다. 예술창조를 통하여 예술가는 무엇이 중요한가를 밝히는 것이다(p.161).
우리는 작품이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안고 모든 심혈을 다해 작품창작에 뛰어들던가, 아니면 최선을 다하지 않음으로 아예 기쁨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던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이것은 곧 확실성과 불확실성사이의 선택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확실성의 선택이 더 안전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p.175)?
‘고민’하고 ‘몰입’하는 ‘지금’의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것이 ‘예술창작’의 두려움을 떨치게 할 수 있다. 굳이 ‘예술’이라고 범주지어질 수 있는 것을 벗어나서라도, 하루 하루 끌려가듯이 하는 일들의 ‘일상의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것에 의미부여를 하고 순간순간 몰입하는 일에 힘을 다하는 것.
여행길을 다녀와서 아쉬움이 덜했던 이유가 이 책이었을까?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