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지 근 1년만에 역자 서문을 끝으로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영어문장이 그렇게 꼬여있지도 않았고 하위문화에 대해 조금씩 알아나가는 재미도 솔찮아서 번역과정은 그런대로 큰 어려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진행되었다. ….. 여기저기 숨어있을 오역과 졸속 문장으로 의미가 곡해되거나 독자들을 짜증스럽게 할 구석이 많이 있을 것 같고, 혹은 생소한 용어와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충분한 주석을 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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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을 오역과 졸속 문장’이 튀어나와 활개치는 것 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 이동연은 지금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던 당시에 잘나가던 ‘문화연대’의 얼굴이기도 했다. 그 때 당시에야 활동가로 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니느라 번역이 서툴렀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재고를 다 못팔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은 팔리고 있다. ‘오역과 졸속 문장’과, 그리고 ‘오자’와 함께. 10년 동안 이 책이 떠돌고 있다. 이 상태로.
고통스런 ‘환상 pantasy’은 거리의 상점 윈도우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p.177) (Pantasy!는 펑크 운동의 언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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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Bowie는 성적 역할 수행을 ‘진정으로’ 초월하기 보다는 변장이나 댄디즘 – Angela Garter(1976)가 ‘억압받은 자의 양면적 승리’라고 불렀던 것 – 을 선호했기 때문에 어떤 정통적인 급진적 의미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지만, 그와 더 나아가 그의 스타일을 모방했던 이들은 ‘청년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성년 직업 세계로의 이행을 문제삼았다(Taylor and Wall, 1976)(pp.8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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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는 애교로 넘어가 줄 수가 있다. 하지만 두번 째 인용에서 나오는 수준의 난삽한 문장(이 책에 전반적으로 늘어져 있다)은 난독증을 유발한다.
총 책의 분량 중 본문은 200페이지(A5)도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것은 역자 서문밖에 없고, 본문에서 읽느라 사경을 헤매었다. 동일언어를 다른 스펠링으로 각주와 본문에 나열하거나, 아무도 쓰지 않는 번역어의 나열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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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내가 ‘문화연구’라는 분과학문에 익숙치가 않아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인데. 최소한 단단하고 차분한 번역을 조금 만 더 신경썼다면 달리 번역했을 것 같다. 그리고 읽기 훨씬 좋았을 것 같다. 물론 80~90년대 사회과학의 시대에서 ‘헤겔’적 맑스를 읽었던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장문’이 쉽게 읽혔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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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자 자신이 말했듯이, ‘영어문장이 그렇게 꼬여있지도’ 않았던 이 책의 번역을 다시금 어루만지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그리고 당시의 이동연이 하려던 일들이 ‘문화’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을 담론 지형에서 하는 것 아니었나? 서태지에 대한 그의 대안적 해석들이, 그리고 심의 폐지에 뛰었던 그의 발걸음들과의 괴리가 느껴진다.
의문이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내가 좋아했던 문화연대의 ‘이동연’이 이런 발글로 책을 냈었다니.
화가 났다. 그리고 곧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90년대의 <문화과학>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그룹의 책들이 죄다 이런 식으로 나오진 않았겠지? (아무나 답 좀 해주세요!)</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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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들의 라스타파리언 운동(the Rastafarian movement), 그리고 영국의 노동자 문화 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펑크족(Punk), 힙스터족, 비트족, 테디보이 들에 대한 해설을 읽어볼 수 있었고(몇 가지만 남고 대부분은 금방 증발된다. 너무 난해하다), 하위문화, 그리고 스타일에 대한 여러가지 담론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거기까지다. 그 것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책의 저자가 추천한 것들을 원어로 찾아보는 게 더 속시원할 듯하다.
이 한권의 책을 열흘이 넘게 끼고 앓아가면서 읽었는데, 허탈했다. 다른 읽을 만한 책은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