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늪에서 벗어나기 – 문화, 지역, 교육을 통한 변화 ① 총론
1. 늪의 원인
1987년부터 1998년까지 김대중을 위시한 평민당-민주당-국민회의가 ‘민주’를 대표했었다. 그리고 2002년 새천년 민주당의 오픈 프라이머리에서 ‘노풍’을 불고온 노무현은 386과 함께 새바람을 몰고 다시금 ‘민주’를 통해서 재집권을 했다. 그리고 2007년 민주당은 철저하게 몰락했다. 한나라당은 10년만에 정권을 되찾았다. 10년만에 정권을 되찾은 현 정부의 강공은 아무도 멈출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야당은 어느 곳에도 없고, 심지어 그들을 찍은 이들도 그들을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한나라당의 ‘잃어버린 10년의 주장’처럼 민주당이 ‘좌편향’이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진보진영이 대체로 수긍하지만, 민주당이 실패한 것은 그들의 ‘지지기반’에 반하는 정치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최장집과 후마니타스의 박상훈, 그리고 이대근-경향신문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 중심에는 ‘무한경쟁’의 담론이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무한경쟁’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 강령인 ‘제3의 길’을 말하면 똑같이 개혁세력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두가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블레어의 노동당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민주당이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삶의 질’을 민주주의로 생각하는 축에서 ‘무한경쟁’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경쟁’이 양산하는 몰락한 사람들을 위한 ‘패자부활전’이 필요했고,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그것을 잊지는 않았다. 그래도 ‘경쟁’ 패러다임은 노동당을 잠식했다. 반면 ‘민주주의’를 투표를 통해서 의회를 구성하고, 투표를 통해서 대통령을 뽑는 다는 것 수준에서 정의한 민주당식 민주주의는 최소한의 안전판의 의미를 망각했다.
새로운 2000년대의 시작이 김정은의 “부자되세요”로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CEO라는 말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과 동일시되는 말이 된 것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지기반’을 배신했다. 그리고 끔찍한 시대가 도래했다. 어떤 정책에 대한 반대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이웨이를 갈 준비가 끝났다. 그들은 오로지 정부 혼자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권부를 쥐고 있는 집단 전체의 총화이다.
2. 늪의 풍경
늪의 세계가 가장 처참하게 망가뜨린 것은 무엇일까? 쉽게 생각하면 고용불안과 양극화를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현상’일 따름이다. 더 문제는 ‘미래’의 봉쇄라고 말할 수 있다. 양극화라는 것이 이미 ‘경제적’ 수준을 훨씬 넘어선 사회의 전영역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미 부의 수준에 따라 대학을 진학하고, 유학을 다녀온 해외파 엘리트들의 헤게모니 장악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홍정욱 뒤에는 10년 넘게 축적되어온 지배계급 자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빙산의 윗둥을 보듯이 우리는 홍정욱에게 재수없다고 하고 있다.
교육영역의 ‘경쟁’담론의 시작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호칭을 통해 기존까지의 보수주의자가 그나마 견지해온 ‘인성교육’이라는 말을 완벽하게 탈색한다. 이제 교육은 화폐로 환산되는 ‘인적자원’을 만드는 한에서만 인정받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10년을 버텼다. 후의 현 정부에서 굳이 그 명칭을 고수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을 우리의 후손이 기억할 수 있을까? 쉬쉬하면서 과외선생을 집에서 하숙시키던 1970년대 성북동 재벌가의 낭만주의는 이제 ‘대치동 엄마’의 전략적 시간표짜기로 대치되었다. 그것과 무관한 이들에게 주어진 통로는 겨우 수능이었지만 이제 그 통로는 ‘3불정책’의 실질적인 무력화로 점차 막혀가는 중이다.
문화영역은 잘 이야기되지 않지만 더욱 더 처참하다. 몇 편의 거대 블록버스터의 흥행성적으로 우리는 한국영화의 ‘저력’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뒤에서 매일 처참하게 헐리우드 키드들이 죽어가고 있다.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서, 그리고 그보다도 못한 영화판의 밑바닥 스탭들은 불완전고용과 저임금에 신음하고 있다. 인디씬의 발흥으로 마치 음악이 굉장한 수준에서 발전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주업은 ‘알바’이고 음악은 언제나 그 일이 끝났을 때 피곤에 쩔어서 겨우 만지작 거리면서 처절하게 버티면서 만들고 있는 중이다.
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3. 늪에 던져진 썩은 동아줄 – 진보의 ‘조급함’과 ‘편협함’
그럼 다 죽자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기존의 ‘민주화 담론’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거다. 구좌파의 ‘혁명론’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그것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최소의 각성된 대중이 없다는 것 때문 만은 아니다. 쉽게 말해 ‘운동권’이 없어서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거대 권력을 날로 먹으려는 ‘조급함’에 있고,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어디에서 출발하는 지를 확인하지 않는 ‘편협함’에 있다.
그것은 물론 기성의 중앙정치가 갖고 있는 구심력의 효과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저항하는 이들은 이미 알면서도 그 단맛을 끊으려 애쓰지 않았다. 어느 순간 현장과 괴리되어 선출된 즉시 ‘중앙정치’의 일원이 되어버리는 습속이 문제였다. 지역의 이슈들은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의 영역에서 탈각되어버리고, 당장 1~2년 안에 승부가 나지 않는 중장기적인 변화의 동력들에 대한 지원은 무시해버렸다.
DJ를 찍지 않으면 이회창이 되고, 노무현을 찍지 않으면 이회창이 되며, 정동영을 찍지 않으면 이명박이 된다는 민주당의 ‘비판적 지지론’에 깔려있는 정서와, 당장 정권과 사생결단을 내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진보의 ‘결사항쟁’론은 동형적이다. ‘조급함’과 ‘편협함’의 증거이다.
덕택에 지역에서 가장 밀착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될 수 있던 이들에 대한 무관심은 지역의 대중을 기성정당의 거수기에서 한발자국도 빼내지 못했다(강기갑을 보라. 지역에 밀착한 정치의 힘이다.). 덩달아 노무현 정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지구당 혁파’에 대한 선거법 개정은 ‘비용절감’이라는 말같지도 않은 당위론 덕택에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제 지역을 근거로 자리잡고 정당이 활동하는 것 자체가 퍽퍽한 일이 되었다. 중앙정치에 진입하지 못한 소수 정치세력에겐 악몽이 펼쳐졌다. 정치의 비용은 줄지 않고 진입장벽만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늪에서 빠져나올 희망을 만들어야했던 좌파들과 진보세력은 그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기업 남성노동자 중심의 정규직 노조의 눈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정책을 만들 시간에 정파간 비례대표 나누기에 골몰했다. 거기다가 북한의 핵실험을 ‘자위권’이라고 말하고, 독도문제에서 한나라당과 같은 입장을 견지하느라 시간을 다 까먹어버렸다. 같지 않지만 같이 도매급으로 넘어가버렸다. 이건 순전히 노무현 때문 만은 아니다.
4. 늪에서 벗어나기 – 최소한의 원칙
늪에서 벗어나올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지를 묻기 전에 늪에서 빠져나올 준비에 무엇이 필요한 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세가지의 원칙을 세울 수 있다. 문화, 지역성, 그리고 교육이다.
1) 문화
‘삶’에 다가가는 문화운동. 그리고 그것들을 통한 정치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문화’는 대중예술만을 칭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삶의 양식들을 총칭한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수는 없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고 그것들이 자신의 품위를 형성하는 데에 예술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한 자신들의 소소한 ‘기억’들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고 가꾸는 것을 빼놓는다면 다시 우리는 ‘기계’가 될 수밖에 없다. 하위문화와 ‘스타일’에 대한 고민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순박한 하나로 모아지는 동질적인 ‘군중’과 ‘대중’은 없다. 그들은 모두 다르다. 그 차이 하나 하나를 인정할 수 있는 틀을 묶어내는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2) 지역 – 공동체
또한 그것은 중앙정치의 스펙타클이 줄 수 없는 삶에 아로새기는 기억의 정치이다. 그렇기에 지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무한경쟁’의 신화가 작동하는 것은 현실이 아닌 스펙타클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실제 우리가 땀흘리고 발을 딛고 사는 세계에서는 ‘협력’이라는 것이 어쩌면 더 익숙하다. 친구간의 우정. 선물 주고받기. 여기에 거래는 없다. 규모가 커져 익명성이 담보되어야 거래는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적인 공동체에 대한 고민들을 할 수밖에 없다.
3) 교육
또한 그것들이 기능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정치적 주체로 길러질 이들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기성체제 교육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정치주체화.
가설을 세우고 있다. 문화적 감성을 공공의 공간에서 배제없이 다양하게 겪을 수 있다면, 그 집합적인 문화가 정치를 재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몇 가지의 전제들을 고려해 봐야 한다.
이 세가지의 축으로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이 삶을 만드는 구성의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이 부분의 실험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보고 싶다. 문헌연구와 인터뷰를 통해서 책을 기획하고 싶다(이전의 김원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등의 구술사 같은 기획은 참신했다).잊혀진>
사회과학에서의 ‘자기실현적 기대(예언)’에 대한 경계들을 잊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나는 뻥을 입증하기 위해서 빨빨대며 뛰는 어린아이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움직이면서 그것들을 그 와중에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움직이면서 말하고 보는 것’. 맑스주의의 실천에 대한 규정이 여기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고 볼 수 있다. 레닌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