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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렇게 써라 – 이대근,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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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 – ![]() 이대근 지음/후마니타스 |
글쟁이들은 고민한다. 자신만이 읽을 글이 아니라면 언제나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읽게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때는 어느 순간에서 끊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다. 물론 학술논문을 쓸 때에야 상세한 설명과 정확한 뒷받침 문장을 구비해야 할 때가 있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긴박하게 한 방의 임팩트를 가지고 글을 써야할 경우가 있다. 저널리스트의 글쓰기가 그렇다.
신문을 보다보면 24면 이후의 ‘칼럼란’을 쓰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200자 원고지 11매라는 공간에 당신은 매주 한 편의 글을 써야 한다.
2200자가 넓어 보이는가, 좁아 보이는가? 이 2200자의 예술을 보여주는 글을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신문 맨 뒤쪽의 오피니언 페이지를 보면, 사진액자와 같은, 틀에 잘 들어맞는 칼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액자 밖으로 나온 부분이 있다면 잘라내야 하듯 더 쓸 게 있고, 더 말할 게 있어도,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고 끊어야 하는 그런 형식에 얽매여서 쓴 글들이다. 그 때문에 늘어질 여유가 없다. 거두절미, 스타카토와 같은 글쓰기라고 할까. 문장을 절약해야 한다. 차분하게 하나하나 짚어 가며 따지고 설명할 여유가 없다(p.8).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는 <이대근 칼럼="">을 모아놓은 책이다. 본인이 “평소 그런 책에 호의적이지 않”았으나(p.7) 이 책을 냈다. 그리고 성공적이다. 이제 리영희의 날카로움과 정운영의 교양을 갖춘 칼럼리스트가 한 명 더 등장했음을 선포한다. </p>
<한겨레>의 글쓰기가 진보진영을 대표하던 시대가 있었다. 리영희와 정운영은 엄청난 지식과 교양, 그리고 세계를 읽는 눈으로 진보진영의 글쓰기를 업그레이드 했다. 손석춘은 족벌언론에 대한 지적과 본인 자체가 동아투위의 ‘투사’였다는 입지를 가지고 글을 써냈다. 하지만 그들의 시대는 실패했다. </p>
그들이 글을 쓰던 시대는 독재의 시대였고, 민주화를 이루느냐 마느냐의 시대였다. 민주화의 ‘상징’을 그들은 언제나 인용했다. 독재자는 겉으로 양보하고, 실리를 채갔고 그것을 ‘민주화’라고 길거리에서 싸우던 ‘재야세력’은 호명했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이뤘다. 김대중-노무현의 시대는 리영희, 정운영의 글쓰기를 먹고 자란 이들이 정권을 장악한 시대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민주화’를 예찬하는 동안 대한민국은 정글자본주의로 빨려들어갔다. 아이들은 사교육 천국에서 19세기 영국의 어린이 노동자 수준의 ‘교육 노동’을 한다. 회사에서 해고 당한 노동자는 본인의 ‘경쟁력 부재’를 자학한다. 그 동안 ‘민주화’의 상징은 둥둥 떠다녔고, 아무도 ‘민주화’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2007년의 대선, 2008년의 총선, 교육감 선거였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를 비교해 봐라. 명분과 당위가 필요했던 ‘민주화’라는 시대가 허무해 지자, 그들의 글은 ‘난독증’을 불러일으키는 ‘애국자’들의 주장글이 되어버렸다. 자꾸만 손석춘이 떠오른다. 손석춘은 자신을 ‘진보’라고 하지만, 주체사상파(자주파-NL)까지 끌어안아야한다며 ‘잡탕’으로 끓여도 다 맛있다고 먹어줄 줄 안다(여전하다. 2009년에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여전히 산술적 덧셈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 문제는 그 이야기만 몇 년째다. 구체적인 담론을 형성할 만큼의 정책에 대한 디테일을 짚어내지 못한다. 노무현 정부 내내 허우적 대기도 했다. <경향신문>이 “다르다”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 것도 노무현 때부터다. 서민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고, 관심 갖지 않을 것이다.<한겨레>의 독자수도 늘기 어려울 거다. 열독자 이후가 없다. </p>
이대근은 그러한 386의 마인드에서 벗어나 있다. <이대근 칼럼="">을 읽으면 알 수 있다. 민주화세력이 뒤집히지 않을 승리를 노무현의 집권으로 확신한 순간부터 그의 칼이 벼려진다. 그의 글을 읽으면, ‘진보’와 아무 상관없는 민주화 세력이 보인다. 그리고 ‘잔당’으로서의 민주당이 보이고, 거기서 어부지리를 얻은 보수진영이 보인다. 양극화와 서민의 기대를 배반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배신이 그들을 몰락시켰다. 자업자득이다.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래놓고 ‘대통합’하면 표를 얻을 거라고 짱구를 굴린다. 어떤 잘 나가는 언론인이나 CEO를 영입하면 다시 ‘민주개혁세력’의 승리가 확보될 거라 한다. 다 개소리다. 그들은 ‘지기’ 싫어서 안달난 쪼다에 불과하다. ‘위대한 패배’, ‘내일이 보장된 패배’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을 뿐이다. 토호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자신의 지역에서 지켜내는 것 말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개혁세력’은 수사에 불과하다. 이대근은 그걸 선명하게 보여준다. </p>
진보진영의 칼럼리스트가 갖춰야 할 것이 아니라 ‘진영논리’가 아니라 ‘리얼리즘’임을 확인시켜주는 사람이 이대근이다. 그리고 ‘리얼리즘’의 차원에서 ‘정치’를 정확하게 진단해 주는 것도 이대근이다.
이대근>한겨레>경향신문>한겨레>경향신문>한겨레>이대근>와이키키>한국에서 ‘정치’ 혹은 ‘정치적’이라는 말은 ‘나쁜 짓’ ‘거짓말’ ‘속임수’의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정 분리 실험도 이런 인식의 결과일 것이다. 국정이 정당 혹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고상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반영됐을 것이다(<노무현 정권에는="" 정치가="" 없다="">, pp.181-182). </p>
정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규칙을 만드는 활동이다. 인간의 견해와 욕구는 다양하고 무한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다 충족시켜 줄 수 없다. 따라서 누가, 어떤 것에 우선순위를 둘지 정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다수가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정치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둘러산 경쟁, 갈등, 협력이기 때문이다(p.183).
분명히 하자.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 부재’에 있다(p.183).
</blockquote>당위로서의 ‘민주화 담론’이 ‘실용주의’와 보수 우파에게 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위’가 흔들렸을 때, 손쉽게 ‘CEO 담론’과 ‘효율성의 논리’는 정치라는 것을 후드려 팼다. 정치인에 대한 혐오가 정치를 혐오하게 했고, 무관심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난 세계는 없다. 그걸 이대근은 가르쳐 준다. 그리고 ‘정치 부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진보진영이 살 수있는 유일한 길인데. 그들은 여전히 ‘명분 싸움’을 하고 ‘정치인의 작태’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한다. 다 죽겠다는 이야기이다.
<경향신문>의 기획기사들을 진두지휘한 정치/국제면 에디터로서 이대근. <경향신문>의 책들이 단단했던 것은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나라당으로부터 국민을 구출할 거냐 말꺼냐는 공허한 논쟁으로 삽질을 하던 시기, <경향신문>의 기획은 밑바닥이 어떻게 붕괴했는 지를 보여주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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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후마니타스
경향신문>경향신문>경향신문>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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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 –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후마니타스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허영심들을 다 죽이고 시작해야한다. ‘찬란함’과 상관없이 <전국노래자랑>을 보는 서민들의 소소함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걸 다시 느낀다. </p>
그의 입장에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후려칠 수가 없다. 왜냐면 이게 진보의 스탠스가 가져야할 최소한의 선이라는 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대근의 뚝뚝 스타카토가 끊어지면서 펀치가 날아오던 글들을 읽다가, 차분히 설명하는 서문과 출판사(아무래도 박상훈 대표가 아닐까?)와의 대담을 읽고 그의 깊이에 더 매료되었다.
사실 이 책의 모든 칼럼은 검색이 가능하다. 이 책을 사는 이유는 오로지 서문과 대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고, 서문 때문이라고 하면 80% 정도 진실이다.
그리고 21세기를 정확히 같은 호흡으로 살고 있는 장년을 찾았다는 것에서 너무 기쁘다. 정체되지 않았기에 그는 젊다.
연필을 들고, 그의 칼럼을 써보자고 원고지를 들어본다. 이렇게 쓰는 거다. 칼럼. </div> </div>
전국노래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