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기고하려다가, 담당자 W 기자와 이야기하면서 이게 발글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난 원래 원고지 잘 안 찢는 소심한 필자라. 기록으로 남겨둔다.
1주일 정도 ‘10대 여학생 폭행 사건’이 뉴스의 한 꼭지를 장식했다. 10대의 여학생들을 같은 여학생이 감금한다. 알몸으로 벗겨진 무력한 여학생을 다른 여학생이 괴롭힌다.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슬리퍼와 손바닥으로 패고 면도칼이 동원된다. 인사를 시키고, 서로 간에 때리게 한다. 그리고 ‘심지어’ 성매매를 시키려 했단다. 사람들은 놀란다. 세상이 망조가 들었단다. ‘충격’에 빠졌단다. ‘일부 몰지각한 어른’들의 ‘롤리타 콤플렉스’가 언급된다. ‘10대 성매매’에 대한 비판이 쏟아진다.
하지만 전혀 놀랍지 않다. 아니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진 사람들의 반응조차 놀랍지 않다. 사람들은 짐짓 놀란 척하면서 도덕의 회복을 외칠 것이다. 그리고선 집의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서 ‘10대 여학생 폭행 사건’의 동영상을 찾으려 웹폴더를 이 잡듯이 뒤질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폭행을 저지른 여학생의 미니홈피를 찾아서 방명록 테러정도를 할 것이다. 자신은 확실히 가해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몇 해 걸러, 아니 이제는 몇 달 걸러 10대들의 폭행 동영상들에 대한 뉴스가 올라오곤 한다. 그 때마다 양상은 항상 같다. 선정적인 언론은 그 사건의 디테일을 정확하게 보고해 줌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대중은 욕하면서 뒤에서 음탐한 시선으로 즐긴다. 이러한 사건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선을 돌려보자, 성매매는 경찰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에서 만연하고 있다. 또한 폭력은 일상적이다. 단순한 폭력 사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더 뿌리 깊게 구조적인 폭력이 사회 전반에 넘쳐흐른다.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가하는 체벌이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에 나오는 ‘폭력적’인 경쟁은 완화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청담동 엄마’들의 똑똑한 자녀 교육법은 학원을 위시한 사교육과 더불어 교육 자체를 계급투쟁의 장으로 만들었다. 저소득층의 아이들은 ‘무력감’을 껴않고서 경쟁의 장에서 살얼음판을 맨발로 걷고 있다. 교육은 이제 누가 더 버틸 만큼의 미네랄과 가스를 갖고 있냐는 스타크래프트의 엘리전(자기 본진과 상대방의 본진을 누가 먼저 부수냐의 싸움 양상)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 외의 공간을 찾을 수밖에 없다. 非학생인 청소년들을 받아줄 완충지가 얼마나 될까? 대안학교? 그것 또한 대다수에게는 사치이다. 대다수의 청소년은 알바하면서 어른들에게 착취당한다. 꺾기는 일상이다. 게다가 소비를 권하는 사회는 그들에게 벌기 힘든 큰돈을 요구한다. 선택지에 성매매가 있는 것도 일상적이다. 그래도 그건 안 된다고? 어차피 “안 돼!”를 “안 돼!, 돼!”로 가르치지 않는가? 그걸 10대가 보여줬을 뿐이다.
‘일부 몰지각한 어른’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몰라서 권모술수로 근근이 버티면서 서로 ‘괴물 되기’를 권하는 사회. 그런 괴물들이 넘쳐남에도 아직 ‘경쟁력’과 ‘효율’이 부족하다면서 채찍을 흔들어대는 사회. 해고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경쟁력 부재를 탓하는 해직자들의 사회. 자학과 피학이 넘나들면서 폭력의 시대가 완성되었다. 형성된 폭력은 ‘만만한’ 상대를 찾아다닌다. 남성은 여성에게, 정규직은 비정규직에게 폭력을 구사한다. 미등록 이주 노동자에 대한 혐오도 사회에서 두들겨 맞은 무력감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서로는 어떻게든 ‘괴물’이 되려한다. 괴물들의 자식들이 괴물인 것은 순리이다.
우리는 서로 공모자다. 괴물들의 세계를 서로 묵인하면서 각자가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 세계를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 것들의 현황이 어떤 사건으로 극적으로 나타날 때마다 그 스펙타클에 놀란다. 어떤 특정인이 이 세계를 확정짓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 공모를 깨고 이탈하기, 거기에서 뭔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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