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 아니라 정치다.

매번 문제 설정이 틀렸다. 문제는 개혁이 아니라 정치다.

쉽게 이야기하자. 우리가 매번 문제 삼는 대부분의 일들은 ‘개혁’되지 않아 생기는 일이 아니고 ‘정치’가 없어서 생기는 일들이다.

‘정치’ 그 자체를 비판해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어떤 ‘정치’를 ‘선택’하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먼저 정치인들의 차원을 보자.

노빠들이 ‘개혁’을 화두로 떠들 때 쉽게 보수주의자들에게 깨지는 이유도, 그들이 ‘정치’를 우회하려 하기 때문에 있다. ‘개혁’은 쉽게 보수주의자들이 ‘효율성’이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다.

이런 명제를 보자.

정치는 효율적이지 않다. 기업은 효율적이다. 따라서 정치논리 말고 기업의 효율성을 따르자.

이 말이 개혁세력에 의해서 반박된 적이 있었나? 그들은 “맞다. 그래서 우리가 개혁하려는 거다”라면서 SERI의 레포트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읊기 시작하고, 자유기업원 경제 강의를 듣고 회개를 했다.

모든 정치제도에 대한 ‘개혁안’이라는 것들이 ‘효율성’, ‘저비용’의 담론으로 치장되는 순간, 개혁세력의 ‘정치’는 박살이 났다. 그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개혁세력’은 다시 회복할 수 없다.

우파학자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은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인 분배”라고 했다. 간단하다. 정치는 ‘가치’를 다룬다. 순진하게 ‘효율성’이라는 하위적인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가치라는 그보다 상위적인 개념을 다룬다. ‘효율성’이 가지는 위계역시 가치라는 상위개념에서 결정된다. 그 과정을 포기하고 그냥 그 설정에 따라 분배만 하는 것이다. ‘권위’는 그 가치들을 작동시킬 수 있는 ‘권력다툼’을 내재한다. 심지어 경제조차 ‘계급투쟁’을 내재하지 않는가? 수요와 공급의 곡선이 예쁘게 그래프로 그려지는 뒷면에서 핏자국이 낭자하다.

그런데 그러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뒤로하고 ‘개혁’이라는 한정적인 수사로 상시적인 싸움의 장에서 자신의 반대편에 헤게모니를 쥐어주는 것이 그 ‘개혁주의자’들의 작태이다. 그들에게 불덩어리를.

일상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가치’라는 영역에서 맞붙을 수 있게 ‘정치’의 영역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정치인의 몫이다. 그것을 방기하고 무엇을 개혁하겠다는 것인가? 매일 해고당하는 노동자들의 애환이, 입사할 수 없어 이력서 100개씩은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턴자리를 구하는 88만원 세대의 고통을 다루는 것, 그것이 정치이다.

두번 째로 일상인들의 차원이다.

정치에 대한 혐오가 가득차 있다.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의 정치에 한정되어야 한다. “정치인들, 이 개새끼들”이 “정치는 할 수 없어”의 담론으로 가는 순간 지옥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각자의 이익은 정치의 차원으로 개입될 수 없고, 끊임없이 각자의 이익은 실현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각자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정치가 고안되었다.

‘정치’에 대한 혐오를 ‘더 나은 정치’에 대한 희구로 끊임없이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지켜봐야 한다. 그게 일상인들이 “살림 살이 좀 나아지”는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들의 가치를 떠올려, 그 가치 지향에 맞는,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치를 선택해야하고 그들에게 자기 이익을 끊임없이 말하는 것. 거기에서 시작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서민의 이익과 상관없는 소수의 이익이라는 것들을 더 커다란 ‘국가’와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외치는 것이다. 그것들의 유리됨이 문제이지, ‘정치’라는 말 그 자체가 아니다.

‘정치’라는 말을 구해야 한다.

문제는 ‘개혁’이 아니라 ‘정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