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The Reader, 2008)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감독 스티븐 달드리 (2008 / 독일, 미국)
출연 케이트 윈슬렛, 랄프 파인즈, 데이빗 크로스,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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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리뷰를 보고 굉장히 궁금했다. 이택광은 ‘수침심이 어떻게 윤리를 구현하는가’로 제목을 뽑았다. 그 수치심이 구현하는 윤리가 희생양 제의를 통해서 사회와 국가를 구제해내는 의미라면 나 역시 동의한다.

어쨌거나 그의 리뷰를 읽다가 <더 리더The Reader, 2008>를 보았다. 송탄에 횡하니 있는 멀티플렉스 롯데 시네마에는 역시 사람이 없었다.

사춘기 부르주아 소년, 누나를 보고 남자가 되다.

10대 잘 배우고 잘 자란 부르주아 소년과 전차 승무원의 로맨스가 펼쳐진다. 하지만 로맨스의 시선은 따뜻하지 않다. 보통 성장기 영화라면 보일법한 성장통의 승화는 잘 보이지 않고, 여자는 <봄날은 간다="">의 은수같이 어른을 상대하는 연애패턴으로 소년을 상대한다.

여자는 팜프파탈의 정서를 굳이 숨기지 않고, 아이는 놀아날 수밖에. 그녀가 옷 갈아 입는 것을 보고 발기한 성기를 보면서 자신이 ‘수컷’임을 확인한 소년은 그녀에게 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겉으로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지만, 별로 놀라지 않는다. 그냥 기다리면 될 뿐.

찾아온 아이가 얼마나 허겁지겁했는 지는, 옆의 연탄을 삽으로 푸는 도중에 새까매진 얼굴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여자가 피식하고 웃는 것은 당연하다.

<봄날은 간다="">에서 라면이나 먹고 가라는 은수의 말처럼, 한나(여자)는 목욕하고 가기를 권한다. 욕망은 불타오른다. 서투른 남자의 키스와 섹스가 여자는 재미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영화는 어린 남자애를 가지고 논 한 팜므파탈의 이야기로 종결이 되었을 것이다. 한나는 마이클(소년)에게 책 읽어주기를 바란다. 잘 배운 부르주아 소년 마이클은 그녀에게 책을 읽어준다. 호머의 <오디세이>를 읽고, 도리스 레싱의 책들을 읽는다.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마이클이 읽어줄 때 한나는 ‘Disgusting!'(불결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는 순수한 연애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떠한 책 읽기보다 관능적인 낭독과 욕망의 밤이 동시에 구현된다. 한나가 마이클을 대할 때 마음 가는 대로 표현하고 배려하는 듯 하지 않는 듯 하는 것을 볼 때 그녀가 능숙하게 벼려진 30대의 여자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마이클이 읽어주는 이야기에 펑펑 울면서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녀가 갖고 있는 연약함과 순수함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둘의 연애는 어떤 시점에서 바라볼 때에도 연장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10대 소년과 30대 여인. 부르주아 소년과 노동계급의 여자. 둘의 로맨스는 파경에 이른다. 하지만 둘이 떠났던 여행의 장소에서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도 저런 자전거를 타고 함께 여자친구랑 놀러가야 하는데 하고 부여잡고. (응? -_-) 그 파경의 순간, 영화는 하고 싶은 이야기의 복선을 깐다. 그녀가 떠나는 시점은 그녀가 승진을 하는 시점이다. 영화를 다 보고 헷갈리긴 했는데, 한나가 마이클을 떠난 시점이 나치 치하인가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둘이 만난 건 1958년이다. 어쨌거나, 그녀는 그렇게 잊혀져가고, 낭독을 통해서 학습능력을 배가한 덕택인지 집안이 먹고살만 해서인지 마이클은 법대에 진학한다. 법대에서 나치 시대의 전범 재판하는 것을 관람하러 간 날부터 이야기는 중심으로 뛰어들어 간다. (트레일러 끝. ㅋ) 수치심, 문맹. 그리고 희생양 제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서 손해를 감수할 때가 있다. 사람마다의 정도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치명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과연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치욕스럽지 않기 위해서 결단할 수 있을까? 영화는 ‘문맹’임을 감추기 위해서 ‘전범’임을 시인하는 여자의 모습을, 또한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주위의 남자에 대해서 묻는다. 남자가 말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어렸을 때 그런 여자와 관계를 맺은 것에 대해서 수치스러워지지 않기 위해서다. 잠시의 수치심을 견딜 수 있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글을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고, 홀로 그렇게 다 죄를 뒤집어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남들에게는 쉬운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자신이 ‘문맹’인 것은 치명적인 문제였을 터. 그녀는 그것이 가장 소중했고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문제였다. 나치와 함께 유태인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거대 서사’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대한민국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해방직후 ‘반민특위’로 상징되는 ‘친일파 숙청’의 이야기는 ‘민족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절차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그 ‘증오’의 장치는 끊임없는 갈등만을 추구했고, 자신들의 ‘증오’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많은 경우 활용되었다. 황석영의 <손님>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갈등은 한국전쟁 당시에 펼쳐지는 데, 노동자 농민들은 친일파/친미파에 대한 개인적 원한으로 그들을 죽창으로 찌르고, 다른 한편으로 숨어있다가 돌아온 지주들은 노동자 농민들을 ‘빨갱이’라고 덧씨워 미군 치하에서 죽인다. 문제는 누가 더 ‘정통’이고 ‘선량’한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어쩌면 거기서 가장 취약한 ‘희생양’에 대해 공격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구제받는 그 의식에 있는 것이다. 영화로 돌아가 가장 만만하게 당할 수 있었던 한나를 ‘1등 나치 부역자’로 만듬으로써 나머지는 그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희생양 제의. 이 이야기가 떠날 수 없다. 그렇다고 모두 다 더럽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게 꼬여있다. 한나를 1등 전범으로 만듬으로 빠져나갔던 다른 경비원들을 마냥 비난할 수 있냐는 문제도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다만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나치’에 부역했던 이들을 처단함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선포하려는 ‘국가’의 심리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지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모든 차원에 걸쳐서 펼쳐져 있는데, 한 두가지 스펙터클을 통해서 그것이 해결되었다고 하는 것.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나치가 ‘공산주의자들’만, 그리고나서 다시금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표적삼지 않았는가? ‘나치 전범만’을 외치는 것은 주체만 전도되었을 따름이다. 마치 보이는 ‘A급 친일파’만 척결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듯이(물론 동시에 그러한 이유로 <친일파 사전="">을 만드는 시도에 대해서 이해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영화의 초반부 소년의 성장 스토리가 왜 차가울까 했었는데, 그보다 더 싸늘하게 자꾸만 자극하는 권력의 작동방식을 느끼면서 뒤끝이 시리다. 그녀의 이야기가 아프다. 나치즘의 문제나 한국전쟁과 일제 강점의 문제 등의 거대한 역사적 기억이라는 것이 주는 상흔이 왜 씻겨지지 않는 가를 생각해 본다. 그건 단순히 그들이 지배했다는 것의 ‘정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심리’의 문제, ‘관계’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것들이 극한적으로 절제되지 않고 ‘광기’로 전환될 수 있게 장이 펼쳐졌던 것이 아닌가 하고도 말이다. 이미 한번 열려버린 ‘광기’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 다시금 그것들을 수습하는 방법이 치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결국 다시 문제는 다른 문제 하나를 더 추가할 따름인 것도 순리인 듯하다. 그 당사자들이 죽어야지만 끝난다고 말했던 어떤 회의주의자의 말도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이러한 숙제들을 풀 수 있을까?? 반복하지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