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안에서 폭발하는 세계 – 이리, 2008
|
책이 안잡히는 날, 영화를 찾게 된다. 원체 블록버스터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스토리 라인 자체의 탄탄함에 집착한다. 빤한 이야기를 피하다 보니 영화를 보는 취향도 마이너로 가게 된다.
장률 감독의 <이리>를 보았다. 머리가 멍하다. <중경>과 연작이라는 데, 그걸 보지 않아서인가 감은 안 잡히고 충격적인 정서들만 머리에 맴돈다.중경>이리>
예전에는 동네마다 미친년과 미친놈들이 몇 씩 있었다고 한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가 보여주는 그러한 세계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들은 정신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나름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광기의>
그 구실을 현재에 펼쳐놓는다면, 그건 <이리>에서의 윤진서의 모습이다. 싸돌아 다니고 월급도 받지 못하면서 학원에서 커피 수발을 들고, 종종 자기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윤간당하고.이리>
그래도 진서는 항상 밝다. 중국말 배우는 게 좋아서 학원에서 일하는 게 좋고, 똑똑하게 가르쳐 주는 채소가게 딸내미가 좋다. 아파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슬프기에 노인정의 오빠들에게 뽀뽀를 건내면서 달래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가 누군가를 위안할 수 있는 방법이 팬티를 내리는 일임을 몸으로 깨닫고 있다. 그녀의 맹목적인 순수함에 대한 답답함 때문에 단순히 착한 마음으로 마냥 그녀를 동정하면서 영화를 볼 수가 없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오빠는 그 ‘시선’을 안다. 그것에 맞서고 싶고 진서를 보호하고 싶겠지만, 그게 맘대로 되겠는가?
삶의 무게에 지친 오빠 역시 그녀를 보호하기보다 어느 새 점점 포기하게 된다. 오빠(엄태웅)이 마지막으로 포기하는 것을 선언하는 순간, 택시로 벌어먹으면서도 마지막까지 희망으로 만들고 있었던 스터디 모델을 폭죽을 붙여 터뜨리는 순간이 온다.
주로 영화가 진행되는 공간인 노인정의 무기력함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짓누른다.
사람들은 순박하면서 무기력하다. 동시에 잔인하다. 그들을 욕할 수가 없다. 다 그냥 그럭저럭 살아간다. 물론 거기에는 사랑 때문에 나이를 잃어버린 노인 양반도 있고, 날 잡아잡숴 하고 누워있는 여자 앞에서 무기력함을 한탄하여 자살하는 노인 양반도 있다.
그리고 부조리하다. 사이 사이 얼치기 인텔리의 자화상이 보인다. 중국어를 조잘거리며 진서에게 모자를 선물해주고 데이트하자고 꼬셔서 강간하는 놈, 그리고 화장실이 급하다며 교회로 달려가서 뒷문으로 도망가는 새끼, 허탈한 마음의 태웅에게 전도를 위한 쪽지를 “형제님”하고 던지는 어떤 년.
영화가 특별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누군가에게 비추지 않듯이, 내용들은 그냥 흘러가고. 확실한 것은 진서와 태웅에게 세상이 깨나 피곤하다는 거다. 그 시선을 따라가는 내 눈도 마음도 피곤해진다.
30년 전 이리의 참사가 이리의 이름을 ‘익산’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 때 진서의 엄마는 임신중이었고, 도망가다가 진서가 잘못되었다고 한다. 산수도 못하다가도 술을 마시면 똑똑해지는 진서의 이야기.
영화 도중에 2007년 대선날이 다가오고, 대통령 당선자가 즐겨 썼던 파란 목도리를 구입하는 진서, 그걸 둘러준 날 태웅은 진서를 바다에 담궈 죽인다(이려 했나?). 파란 목도리 때문이었을까? 또 한편으로 해병대 전우회 할아버지들의 ‘마초’ 근성을 느끼면서 그가 강한 반권위주의자인 것은 확인할 수가 있다.
영화의 말미 엄태웅이 터뜨리는 스터디 모델을 보면서, 이미 안에서 터져가는 이리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