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와 함께 읽은 <마르코 복음> – 김규항, <예수전>, 돌베개, 2009

예수전10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2007/12/31 – [Book Reviews/Theology] – 스물 여섯살의 마지막에 처음 읽은 예수 이야기(이현주, <예수의 삶과="" 길="">, 2006)</a>
2008/01/01 – [Life Log/A day in the life] – 2007년의 평가와 2008년 계획
2008/01/05 – [Book Reviews/Theology] – 장공 김재준을 만나다.
2008/01/05 – [Book Reviews/Theology] – 그리스도인과 사회의 관계 맺음에 대해서 – (이현주, <그리스도의 몸="" 교회="">, 2006)</a>
2008/01/09 – [Book Reviews/Theology] – 우리는 무엇에서 탈출하는 가? – 이현주, <탈출의 하나님="">, 삼인, 2006</a>
2008/01/14 – [Book Reviews/Theology] – 예수에 대한 상식을 전복하기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2007)</a>
2008/01/14 – [Book Reviews/Theology] – 한국의 선교에 대한 포괄적 비판(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무례한 복음="">, 산책자, 2007)</a>
2008/01/16 – [Book Reviews/Theology] – 반제국주의 민중운동가 예수 – (리처드 호슬리, 김준우 옮김, <예수와 제국="">, 2004, 한국기독교연구소)</a>
2008/01/18 – [Reasoning] – 내가 요즘 민중신학에 몰두하는 이유
2008/01/21 – [Book Reviews/Theology] – 생동하는 대안적 신학을 위하여 – (김진호,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1)</a>
2008/01/22 – [Book Reviews/Theology] – ‘분노한’ 신학자의 한국기독교 읽기
2008/01/22 – [Book Reviews/Theology] – ‘당신들의 예수’는 세상에 없다 – (오강남, <예수는 없다="">, 2003, 현암사)</a>
2008/02/12 – [Book Reviews/Theology] – 지금의 한국교회를 말한다(최형묵, 백찬홍, 김진호,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평사리, 2007)</a>
2008/02/19 – [Reasoning] – 나의 기도 </td> </tr> </table>

예수처럼 살 건가? 아니면 예수를 믿을 것인가?

엄마의 종교적 결단에 의해서 뱃속부터 교회를 다녔다. 교회다니는 사람은 더 착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교회를 다녔다. 교회를 다녔기에 욕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고, 교회를 다녔기에 술도 담배도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춘기 시기에 도덕적인 금욕주의를 버렸고, 사사건건 모든 면에서 내가 다니던 교회가 가르쳐 준 신앙과 나는 충돌했다.

가장 결정적으로 교회와 내가 불화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처음에는 내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 난 18살에 정치적 입장이 정해진 이후로 변한 적이 없다. 그 안에서의 경향들의 변화는 있었지만 그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누구의 편에 설 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교회의 10살 터울지는 누나는 대학에서 운동권에 물들어서(마치 귀신 들린 듯 표현했는데) 인생 망치고 신앙이 타락한 자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난 그 예의 사람과 같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나를 똑같이 취급했다. 물론 내가 영악하지는 않았다. 난 그냥 순수하게 내 입장들을 설명했고, 그 교회에서 내 생각들은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21살 신앙을 버렸다.

지금와서 정리해보자면 난 ‘예수’를 믿지 않았다. 아니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적 믿음이 가르쳐주는 ‘그런 예수’를 믿지 않았다. 믿지 않으면 죽는다는 협박보다 더 싫었던 것은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교리의 알량함이었다. 그 알량함이 싫었다. 별로 멋있지 않았다.

26살 다시 신앙을 간구했다.

그리고 ‘예수’가 궁금해졌다. 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역사적 예수론’과 ‘민중신학’에 관심을 두려했다. 성서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6살에 내가 다시 찾게 된 신앙은 ‘예수’를 믿는 것보다는 ‘예수’를 따르는 것의 관점에 서게 되었다. 억눌린 자를 위했던 그 예수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절대다수의 개신교의 신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과 상관없이 자본주의 윤리에 부합하게 칼뱅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부를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예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처럼 살 것인가?

사회주의자의 마르코 복음 읽기 – 왜 마가(마르코)인가?

김규항의 블로그에 종종 놀러간다. 그가 <예수전> 작업을 한다는 이야기는 몇 해 전부터 들어왔는데, 그의 책의 출간의 확인은 지난 주말에서야 할 수 있었다. </p>

안상수체의 제목의 간결함이 눈을 끌고 소박한 편집뒤에 오롯이 새겨져 있을 김규항의 비타협주의가 기대되었다. 머리말의 이야기부터 강렬하다.

오늘 예수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교회가 인간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 버렸기 때문인데, 반말하는 예수는 교회의 그런 의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예수가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졌던 것처럼, 백인들의 성화聖畵에서처럼 날 때부터 머리 뒤에 둥근 불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살아생전 랍비, 혹은 기껏해야 예언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신성을 공식 인정한 건 그가 죽고 무려 300여 년이 지나서다. 인간 예수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도 기독교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pp.13-14).

사회주의자 김규항이 읽어내는 마가복음(마르코복음)은 철저하게 ‘인간예수’의 궤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왜 마가복음일까? 그건 마가복음이 가장 예수에 대해서 양념이 덜 가미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신의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주장하는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을 믿는 멍청한 광신도들들의 관점에서만 벗어나서 성서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4복음서의 차이들에 대해 발견하게 된다.

‘인간 예수의 삶’은 어땠을까? 누구의 관점에서 보았을까? 그것이 기독교에서 4복음서의 차이점들을 만들어 주는 지점이다.

마태(마태오)의 관점과 마가(마르코)의 관점, 누가(루카), 요한의 관점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이걸 엉성하게 굳이 이어서 문자 그대로를 사실로 끼워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는 진영의 노고는 알겠지만, 사실 애당초 관점이 다르다. 그리고 마태-마가-누가-요한 식의 순서도 아니다. 마가가 가장 먼저이고 마태-누가-요한 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예수의 어록(Q 자료)이 있었다.

마태의 복음에서 구태여 “‘마음이’ 가난한자”라고 쓰면서 ‘마음’을 첨가한 이유도 그가 속했던 공동체의 관점이 들어가 있음을 증명한다. 마가(마르코)가 가장 먼저 형성된 복음서라는 사실은 그것이 가장 ‘종교적’ 첨가라던가 윤색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한다. 요한복음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와 ‘빛’, ‘생명’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도 당시의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과 기독교 진영 내부의 격렬한 논쟁의 시대였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어쨌거나 반복하자면 김규항은 많은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이 채택하는 방법과 같이 ‘마가’를 채택한다. 예수의 행적에 대해서 가장 각색없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함이다.

혁명의 예수

예수는 그런 하느님상을 뒤집는다. …… 예수에게 하느님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엄마와 같은 존재다. ……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은 행여 진노할까 두려워 엎드려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주 보며 대화하고 위로받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p.32).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낳는 사람들과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p.38).

한국의 교회가 가르치는 하나님(하느님)은 진노의 신이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목사들은 항상 ‘진노’하고 누구든 죽일 수 있는 신임을 상기시킨다. 그래야 교회에 붙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을 구태여 상기시키는 이유도 거기에 있듯이. 믿지 않으면 파멸만이 있을 뿐임을 환기함은 교회의 성장주의를 지지하는 축이된다. 하지만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만약 그런 하나님이라면 그건 유대인의 신이다. 이방인 우리 모두에게 지옥이 있기를……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찾는 이유도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엄마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그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세상이다.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우애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수고와 고통 덕에 안락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인권을 회복하는 일을 기초로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회복이 세상의 회복이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도정에서 주인공인 것이다(pp.62-63).

그렇기에 또한 예수는 기존 질서의 전복자이다.

예수는 바로 그 ‘죄의식의 체제’에 주목한다. 예수는 그 체제를 깨트리기 위해 기존의 생각을 뒤집는다. …… 예수는 하느님의 관심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이고 기존의 모든 가치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재정리되어야 한다(p.49).

예수는 단식은커녕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 루가 7:34)라 불릴 만큼 세속적인 모습을 보였다(p.52).

예수는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기 위해 율법을 준 게 아니라 사람을 더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율법을 준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는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다.'(p.56)

예수는 유대교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뒤집어 다시 세우려 한다. 예수는 사회에서 배제되고 나아가 제거될 위험 속으로 발을 디딘다(p.57).

예수는 로마인들에게 ‘유대인의 왕 – 메시아’라는 죄목으로 죽었다. 정치범으로 죽었다. 복음서의 해설은 분명 그가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그리고 유다에 의해서 죽었다고 맥락을 만들지만, 그가 당대 로마제국에 위협이 없었다면 구태여 정치범으로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예수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병들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은 물론이고 식민지 당시의 세상을 뒤집어 엎고 싶었던 ‘운동가’들도 모여들었다. 삼국지 연의에서 유비를 따라 온 형주를 떠돌아 다녔던 유민과, 협의 질서로 엉킨 관우, 장비를 떠올리면 쉽게 설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과 함께 피의 혁명을 모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메시아로서 봉기를 일으켜 로마제국의 압제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그리고 부활한다.

“예수는 혁명가였다”라고 김규항은 주장한다. 그리고 나 역시 동의한다. 그 혁명이라는 말에 대해서 ‘정치적 혁명’, ‘정치적 해방’과 ‘영적 해방’이라는 양자를 함께 취해야한다는 김규항의 말에 동의한다. 예수는 당대의 착취와 억압의 체제에 대해서 비타협적으로 저항했다. 다만 폭력을 수반하지 않고, 그 현장에서 억눌린 자들과 함께 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문제설정 자체를 바꿔놓고 ‘회심’, 삶의 방법을 바꿔버렸다는 점에서 ‘영적’인 해방자가 된다.

복음주의와 그 기반에 깔려있는 근본주의적인 개신교의 교리는 자꾸만 ‘인간’을 거세하고 이미 다 정해져있는 예수에 대한 ‘규정’들을 가지고 성서를 읽게 했고, 맥락이 거세된 상태에서 문자 그대로 읽는 예수는 그를 믿어야만 할 ‘하나님의 아들’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덕택에 그가 행했던 실천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명에 불과하게 되고, 그의 메시지는 사회적 맥락이 거세된 채로 ‘그냥 진리’가 되어버렸다. 성서의 기록은 그 자체로 역사가 랑케의 말처럼 ‘사실 그 자체로서의 역사’인 것처럼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E.H. 카가 지적하듯이 역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자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가 된다. 마찬가지로 ‘그냥 진리’로 작동시킨 것은 기독교의 헤게모니를 쥐고 해석할 권한을 쥐고 있었던 ‘기득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발언들은 거세될 수밖에 없었고, 필요하다면 첨언도 가능했다. 그들에게 ‘정치적 혁명’이라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했을까? 그들이 모든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설정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덕택에 ‘인간 예수’는 사라져버렸다. 그건 순전 권력과 지식의 독점의 효과에 불과하다.

마가복음이 보여주는 예수는 철저히 인간적이다. 귀를 닫은 사람들 때문에 답답해하고, 혁명 이후의 논공행상을 미리 벌이는 제자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 아프고, 그러면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체포되지만 십자가를 지고 얼마 걷지도 못할 만큼 몸과 마음이 황폐해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쓸 <예수전></span></span> </p>

김규항은 철저하게 사회주의자의 관점으로 예수를 읽는다. 그에게 예수의 이웃 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고, 진정한 기독교인은 그에게 ‘선량한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특별한 사회주의자’인 것이다.

그는 신학자의 아카데믹한 관점이 아니라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명의 평신도로 <마가복음>을 읽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 그 호소력이 있다. 물론 신학적으로 위태로운 발언들이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책을 재단할 수는 없을 듯하다. </p>

김규항의 이 한마디는 내가 종종 빼먹는 부분에 대해 아프게 찔렀다.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지 않을 수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이지 않을 수 없다. 기도든 명상이든, 하루에 30분도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제 심리적 평온뿐이다(p.123).

세상을 바꾸려면 내 밖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 안의 적과도 싸워야 한다(p.122).

책을 덮고 김규항을 떠나 내가 읽을 예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기회가 된다면 나도 <예수전>을 써보고 싶다. 내가 만나는 예수는 어떨까가 궁금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나름의 <예수전>을 읽어보고 싶다. </p>

요 몇 주 <요한복음>을 다 읽었고, 이번 기회에 <마가>를 다시금 읽게 되었다. 아직 내 생각들이라는 것들은 남들이 첨가해놓은 생각들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순전히 내 나름의 생각들을 정립하는 시간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을 하고, 내 생각을 많은 부문에서 해왔지만, 오히려 내 가장 내밀한 영역인 신앙의 영역에서는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 시간들을 좀 갖고 싶다. </p>

우석훈의 서평 : 생태주의자가 본 <예수전></a>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