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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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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4일 14:30 롯데시네마 1관 E8 좌석에서 박쥐를 보았다. <A title=”[http://leopord.egloos.com/4129072]로 이동합니다.” href=”http://leopord.egloos.com/4129072” target=_blank>leopord의 리뷰</A>를 읽고나서 기대를 최대한 하지 않고 보기로 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 충격의 잔상이 머리 속에 남는다. 그리고 <A title=”[http://wallflower.egloos.com/1899454]로 이동합니다.” href=”http://wallflower.egloos.com/1899454” target=_blank>이택광의 리뷰</A>가 더 동감이 되었다. 리뷰를 너무 많이 읽어버린 탓에 리뷰들이 규정하는 <박쥐>에 대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박쥐>
마지막까지 ‘정의’와 ‘기독교적 윤리’를 고민하는 뱀파이어 상현(송강호)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생명윤리”라고 말하는 신부. 몸은 점점 뱀파이어의 것이 되어가지만 정신만은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차원을 끝끝내 부인하고 산화해버리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상현의 모습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의 수혈을 위해서 헌신했던 신부의 모습이 가졌던 ‘피/아’의 이분법적 선/악 구도에서 벗어나 ‘자기분열’로서의 ‘선/악’을 보여준다. 다만 끝끝내 자기 욕망의 속성이라는 것을 추인하지는 못하는 그의 모습은 ‘찌질한 꼰대’임에 틀림없다.드라큘라>
그렇기에 대비되는 ‘팜므파탈’ 태주(김옥빈)에 모든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솔직한 욕망을 무의식에서 전혀 필터링하지 않은 채 보여주는 태주. 코발트 블루의 매력을 다시금 느낀다. 죄의식이라는 기독교의 근본에 깔려있는 원초적인 억압기제에 대해서 “난 신앙이 없어서 지옥에 안가요”라고 대답하는 그녀의 대사가 머리속에 남는다. 사실 기독교 신앙의 유기체적 모델자체가 박살나는 거다. 그 세계 바깥의 존재가 있다. 그녀는 끝끝내 상현의 세계에 동참하지 않는다. 자신이 더 이상 신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상현에게 끝끝내 “신부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기독교 세계 바깥의 존재. 순수한 욕망. 그녀의 인간의 생의 마지막이 ‘섹스의 노예’였던 것은 어쩌면 욕망 그 자체를 추인할 수 없는 ‘기독교적 파놉티콘’에 대한 탈주가 아니었을까?
영화의 결말은 최종적으로 상현의 의지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기독교적 가치관이 승리하는 것일까? 죄인은 기어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구태여 부활한 성자는 강간으로 자신이 ‘적그리스도’임을 선언한다.) 회개하는 의미로 자신을 ‘산화’한다. 순수한 욕망의 팜므파탈 뱀파이어와 함께. 하지만 상현은 동반 ‘자살’에 성공했을 뿐이다. 태주가 ‘연애’의 상징이었던 상현의 신발을 구태여 신으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리고 끝까지 절규하면서 죽기를 거부하는 것은, 신의 질서가 그녀를 통제는 했을 망정 완벽하게 ‘교화’는 시키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은 기독교적 세계관 바깥에 있기에 지옥이 없다는 그녀에게 ‘어떤 지옥’을 보여줄 수 있을까?
서사의 아웃라인은 상현의 서사이지만, 결국 그것은 상현의 ‘의지’, 그리고 그 의지를 떠받드는 ‘신의 서사’에 의해 주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분출하는 태주의 욕망에 대한 방어만 하다가 최종적인 심판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최종적인 심판은 기독교적 전통에서 언제나 장엄함과 비장함을 보여주여야 하지만, 감당하지 못하는 여자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찌질한 남편의 모습처럼, 그냥 힘으로 눌렀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leopord는 박찬욱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고 했지만, 난 그래서 흡족하다. 욕망의 분출을 막는다는 것이 결국은 욕망 그 자체의 내파가 아닌 외부의 찍어누름이라는 결론. 푸코가 떠오르면서 다시금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주었으니까 말이다. 혁명 역시 사회적인 욕망이라는 들뢰즈/가타리 식 정치 읽기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뱀꼬리. 1
태주를 찍어누르는 죽은 강우의 모습. 물을 머금은 개구리와 두꺼비의 중간 쯤 되보이는 강우의 캐릭터가 꿈에서 나올 것 같다. 그건 끔찍하고 섬뜩한 것이 아니라, 뭐랄까 조금은 둔탁한 두려움. 예리할 것보다는 두텁게 짓누를 것 같은 가위가 될 것 같다.
뱀꼬리. 2
기자회견장에서 끝끝내 김옥빈에게 노출이 어떠냐 묻던 연예 기자 새퀴들. 좀 영화 공부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