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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마주 대하기
고통이 사람을 죽게
하지는 않는다. 살아있기에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죽음을 떠올릴 따름이다. 누구든 고통을 반기지
않는다. 혹여 고통을 즐긴다고 고백하는 마조히스트의 경우도 실은 고통으로 가장한 성적 만족을 희구할 따름이다. 그들에게 일시적인
고통이 아닌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고통이라는 것이 주어졌을 때 그들 역시 거기에서 도망치고 싶어 할 것이다.
고통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보통은 질병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신체의 질병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곤 한다. 하지만 모든 질병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고통의 출발이 질병에 연유하는 것은 아니다. 당뇨나 고혈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
질병과 맞닿아 있지만 관리에 따라서 고통스럽지 않은 삶을 살 수가 있다. 반대로 아무런 신체의 질병이 없다고 진단되더라도 마음의
고통 때문에 자신의 삶을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고통을 다루는 전통적 방법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었다. 삶의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종교가 생겨났다. 선사시대의
사람들은 사냥감을 놓쳐서 생긴 배고픔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동굴에 사냥감을 크게 그려놓고 다음날의 사냥의 성공을 기원했다.
수렵기구가 발달해갔지만 그것은 느끼지 못할 만큼의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제의의 행위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먹거리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이후에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전된 형태의 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손쉽게 고통에서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스도교에서나 불교에서 현재의 고통은 전생의 업보이거나, 인간의 원죄
때문이 되었다. 사람들은 내세의 극락왕생을 위해 혹은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해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를 포기했다.
니체가 ‘노예의 도덕’을 말하는 것도 같은 연유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신의 뜻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불행 때문에 회개했고, 자신에게 벌어지는 기쁨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인간은
신의 자녀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아무런 주체성이 없는 노예로 자신을 호명했다. 고통은 순전히 자기 탓이 되기 시작했다.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
고통은 다른 수단을 통하여 잊혀졌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사회는 고통에 억눌리는 사람에게 소비의 꿈을 심어주었다. 노동의 고통은
멋진 차를 타고, 멋진 집에서 스위트 홈에서 사는 꿈으로 대체되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소비의 맥락에서 작동하는 욕망은 고통을
잊게 하는 마약이 되었다. 이러한 소비의 욕망은 다른 한편으로 모든 고통의 문제를 각자의 문제로만 환원하게 만들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고, 내가 해고당한 것은 내 무능력의 탓이라고 판단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국가와 자본가들이
그렇게 말했지만, 순식간에 그러한 구호는 주체가 흐릿해지고 곧 이어 가장 밑바닥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이들도 그 말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사람들은 점차 둔해졌다. 사람들은 고통이 주는 예리한 아픔이 두려워 한편으로는 다른 욕망으로 치환하고, 다른 한편으로 고통 그
자체를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해버렸다. 현재 한국에서 대학생들은 불안정노동이라는 고통의 근원을 문제 삼지 않고 토익과
자격증에 몰두하고, 체제의 문제에 예민하게 아파하는 사람들을 할 일없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개개인의 고통은 각자가 ‘살아남는
것’이라는 자기계발서의 해법으로 피해갈 뿐이다. 살아남은 이에게는 끝없는 경쟁의 장이 지금까지 겪은 시간보다 더 길게 펼쳐져
있다.
타인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근대적 윤리는 각자의 사생활이라면서 간섭하지 말자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극한적인 경쟁사회가 파괴하는 인간의 존엄성
자체에 대해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이러한 현재에서의 고통의 회피는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엄성을 포기하게 한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포기를 묘사한다. 프롬의 시대에 있어 끔찍한
것은 나치를 비롯한 파시스트 국가였다면, 지금 우리는 시장 전체주의를 목격하고 있다. 각자가 살아남기 위해서 마약을 맞고 고통을
잊은 채 서로를 살해한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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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피할 수 없다.
고통에서 오로지 극복되거나 되지 않을 뿐이다. 동시에 치유되거나 치유되지 않을 뿐이다. 하나의 고통에서 피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다른 종류의 고통을 느끼게 할 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렇기 때문에 고통 그
자체와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은 그 고통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병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왜 내가 마음이 아픈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 고통과 대면하여 겪어내고 나면
불안함이 사라진다. 어떤 병에 걸렸는지를 알고, 왜 마음이 아픈지에 대해서 고통을 겪는 동안 깨닫기 때문이다. 그 불안함이
사라진 상태에서 고통은 치유된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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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벌어지는
고통 또한 사회적으로 대면하고 극복해야한다. 고통에 둔해지고 고통 그 자체를 회피하는 동안 우리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적 고통은 그 고통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 고통을 만드는 체제의 본성에 대해 예민하게
살펴보고 대면할 때에만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언제나 예리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사회적 비빌 언덕인 대안적인 공동체도 필요하고 대안적인 정당도 필요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잃어버린
감수성을 회복해야한다. 감수성은 어쩌면 고통을 더 예리하게 느낄 수 있게 하지만 동시에 예리한 시선으로 고통의 하찮음을 느끼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예민한 사람들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사회가 덜 끔찍해졌다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괴물이 무서운 것은 그 괴물이 힘이 세서가 아니라, 그 괴물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다는 데에 있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싸우다가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