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뻣뻣한 정치학도, 인류학의 세계로 풍덩! – 한국문화인류학회,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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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 ![]() 한국문화인류학회 엮음/일조각 |
사회과학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학문은 무엇일까? 경제학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경제 정책 자체를 움직이는 것을 볼 때의 몸사리는 것을 보면, 그 이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지가 느껴진다. 그건 비단 주류 경제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대가들이 만들어놓은 몇 가지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하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야 더딘 한 걸음을 느낄 수 있다. 정치학도 그리 급진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000년 동안 똑같이 ‘권력’의 문제에 대한 관점을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큰 프레임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으니 말이다. 정치학도들은 여전히 마키아벨리를 읽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더 내려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사상을 읽는다. 동양의 고전 공자/맹자도 마찬가지.
사회학이 좀 급진적으로 보이긴 한다. 이론이라는 것들이 항상 백가쟁명하는 상황이고 어제의 잘나가던 이론들의 파산하는 소리가 오늘에는 반드시 들린다. 마찬가지로 한 100년 정도만 버텨주면 완전히 대가가 된다. 뒤르켐이나 베버처럼. 100년 후면 아무도 베버를 안 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런 주장이 온전히 맞는 것은 아니다. 사회과학이라는 장 자체가 굉장히 상호간에 스며들어가 있고(표준 경제학은 어느 정도는 공학이나 응용물리학처럼 조금 다른 궤에 진입한 것으로는 보인다.), 사회학의 대가 중에 경제학의 대가가 있고, 정치학의 대가라는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사회학과 경제학에 물려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를테면 슘페터 같은 이가 있다). 하지만 한정적으로 분과학문의 경계를 지지할 수는 있다. 사실상 20세기 초반 케인즈와 버틀란트 러셀의 시대를 지나면서 르네상스적 지식인이 사라지고, 그 이후의 학문 전개라는 것이 각자의 분과학문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회학이 개중에는 가장 급진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회학에서 튀어나온 문화인류학. 인류학의 분과야 말로 가장 급진적인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왜냐고??
바로 문화적 상대주의 Cultural Relativism 때문이다. 모든 것이 상대화 된다.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을 읽으면서 그러한 ‘상대화’에서 나오는 편견 벗기기를 맛본다. 이를테면 남성성/여성성, 젠더의 문제를 볼 때 그렇다. 우람하고 씩씩하고 책임감 있는 남성, 온유하고 따뜻하고 포용성 있는 여성의 신화. 사실상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질 따름이다. 어떤 섬의 부족에서는 우리가 ‘남성성’이라고 믿는 모든 것들이 여성의 ‘여성성’의 범주에 속하고, 또 다른 부족에서는 ‘남성성’이라는 속성을 남/녀 공히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p>
또 김치의 예가 나온다. 우리는 김치가 한국인의 ‘대표음식’, ‘전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맵고 알싸한 김치를 먹기 시작한 건 최대 잡아야 300년이다. 매운 고추가 들어온 지 300년, 지금 우리가 먹는 포기김치의 배추가 들어온 지 100년이다.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을 다르게 보고 느끼는 방법을 배우며 자라지만, 종종 자신이 자기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망각한다. 마치 물고기가 자기가 살고 있는 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듯이 하나의 문화 속에서 성장한 사람은 자신의 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의식하지 못하기도 한다(p.24).
바로 그 때문에 문화는 흔히 ‘하나의 인간 집단이 공유하는 가치나 신념’ 또는 ‘삶의 디자인’ design for living이라 정의되지만,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오히려 사회 구성원들 간에 ‘공유된 무관심’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그 문화의 기본적인 가치나 여러 특질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 즉 의문을 품지도 않고 질문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p.29-30).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의 범주라는 것들이 사실상은 그리 얼마되지 않은 역사에서 ‘발명되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민족주의가 파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며칠 전 있었던 황석영 파동도 사실상은 민족주의자의 궁극적인 결론이 ‘제국주의적’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민족국가에 대한 담론이 최초에는 저항적인 성격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읽힐 수 있지만, 그것은 곧 민족국가 프로젝트(동일성의 프로젝트 – 국민으로 상징되는)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저항적 성격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을 때, 곧이어 더 큰 ‘우리’를 상징하고 그것은 ‘몽골 + 2 코리아 담론’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을 욕할 것이 없다. 그들의 ‘대동아 공영 담론’이나 황석영의 ‘몽골 + 2 코리아 담론’이나 본질적으로 패권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임은 별 차이가 없다.
“하나된 우리는 더 큰 우리를 상상한다.”
읽으면서 계속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계보학과 고고학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사실상 담론 층위 밑바닥의 ‘일상세계’는 일관되지 않고 차이들이 분출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 차이들을 걷어내고 자꾸만 공통적인 무언가를 뽑아내려 한다. 서울시 안에 살고 있는 1000만이 넘는 다양한 사람들을 향해 ‘서울시민’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하지만 그 1000만 명 각각은 서로 다르고 그것들은 합칠 수 없는 다양성을 갖고 있다. 그것을 묶어내는 것들(고고학으로 묶을 수 있는 권력의 방법)에 대한 연구는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에 대한 연구는 사례의 차이들로 인해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p>
각각의 사례라는 것들은 그 자체로 ‘공식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만나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우리는 새로운 ‘오늘’의 발견을 통하여 또 다른 ‘내일’을 기획할 수 있는 것이다. 늘 새로움. 변화. 접속과 분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 속에서 변화를 추인한다. 그리고 서로의 인정은 ‘신뢰’를 만들어 내고 문을 열게 해준다. 라뽀rapport가 형성되는 것이다. “신뢰에 바탕을 둔 친밀한 관계”(p.36).
몇 번 이야기했듯이 나는 내가 자라온 면목동의 하위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다. 그런 작업을 ‘민족지’라고 말하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인류학자가 민족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현지조사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인류학자라는 개인을 필연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으로서의 체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p.45).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에서 주로 하는 설문 조사 위주의 통계적 연구들에서는 연구 대상인 개개인들이 수많은 표본들 중 하나에 불과한 익명적 개인들로 취급된다. 그러나 인류학자의 민족지적 연구에서는 개개인들의 말과 행동의 맥락까지 제시되기 때문에 행위자들이 익명적 존재가 아닌 구체적 존재로 등장한다(p.45).
문화인류학이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다. 정치인류학, 인류의 진화에 대한 연구들도 있다. 인류의 진화에 대한 연구들은 언젠가는 진화생물학자들과 함께 이야기해볼 만한 소재가 될 것이다. 유전자와 환경의 이야기. 계속 미뤄두고 있지만, 내가 바랬던 접근 역시 인류학자의 그것이었다. 사실 유전자 결정론자가 가장 격하게 싸울 만한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인류학자일 거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사실 어떻게 ‘인간다움’을 설명해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과학으로써 규정하기보다는 인간이 이제까지 축적해 온 역사적 경험과 윤리 의식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해 나가야 하는 문제이다(p.73).
정복과 경쟁의 표상으로서의 남성성이 해체되어야 할 지점에 온 것이다. 상호 협력과 네트워킹이 중요해지는 사회에서 사실상 근대적 남성성의 덕목인 독립성과 경쟁, 권력은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도 걸림돌이 된다. 인류가 멸종할지도 모를 현 위기 상황에서 일고 있는 선각자적 논의들은 모두 소통과 보살핌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p.90).
대안적인 사회과학의 접근을 위해서 문화인류학의 방법들, 상대화의 관점이라는 것들을 차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지막 장 역사인류학의 이야기가 굉장히 큰 울림을 준다.
인류학적 역사 쓰기에서는 마치 인류학자들이 낯선 문화를 탐구하듯 역사가들이 과거 속의 낯선 문화를 찾아 나선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낯선 세계관을 탐색하고 그들의 낯선 정신세계를 탐구한다. 그러면서 그들 사고의 사회적 차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기록된 문서의 시대적 맥락을 명확하게 인식해야만 가능한 작업이다(pp.274-275).
지금까지 역사인류학에서는 주로 소외되었던 집단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역사가 없는 사람들’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이고, 역사의 주변에 머물고 있는 계층, 민족, 사회를 새롭게 조명하여 이들의 입장에서 본 역사를 서술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구, 남성, 엘리트 중심으로 씌어진 획일적인 역사로부터 탈피하여 역사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p.276).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말하고, 씌어지지 않았던 것들이 말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억압했던 ‘권력’의 작동방식을 살펴보는 것. 거기에 인류학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분과학문의 결들을 뛰어넘어 횡단하는 사유. 거기에 인류학이 있다.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그람시를, 푸코를, 맑스를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렇게 다 묶어놓고 보니, 세상 모든 것들에 ‘인류학’이 개입하지 않을 여지가 없다. 어느 정도 ‘도학’으로 상상해버린 인류학. 미시적 영역에서의 ‘행태주의’적 관점의 기술자 같은 태도와 도사 같은 태도의 중범위에 인류학이 있지 않을까? 입문서는 모든 분야에 다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많은 학생들에게 인류학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그것은 주효했지만. 그 한계점에 대해서도 조금의 주의를 주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입문서’로는 굉장히 잘 쓰여진 책이고(나 같은 문외한이 읽어도 술술 읽히는 것을 보면, 그리고 많은 관심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할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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