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단상 – 근대 과학과 근대 인식론. 그리고 신

교회 클럽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다. <호부호형>이라는 제목이다. 이 형의 논지의 에센스가 간만에 나왔다. 나 역시 이 글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 구경이라도. @.@

믿음과 맹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신뢰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아프면 무당을 찾아가지 않고 병원을 간다.

하지만 무당을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말릴 수는 없다. 그의 선택이다.

미국에는 여전히 지구가 네모낳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믿겠다고 하면 그것을 말릴 수는 없다. 그들의 선택이다.

중동에 어린이들을 보내서 그들을 다 개종시키는 것이 예수의 뜻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믿겠다고 하면 그것을 말릴 수는 없다. 그들의 선택이다.

 

증거가 있으면 전진하고 없으면 멈추는 것을 합리라 한다.

믿음은 증거를 초월한다. 그런데 초월은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껀덕지도 전혀 없고 완전 쌩진공 상태라면 믿음이라는 것이 생길 수가 없다.

무수히 많은 표시들. 최소한 표시는 필요하다.

그것은 굳이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 언어적일 필요도 없다. 음악과 빛도 그 표시일 수 있다.

심지어 역설적인 증거, 반대를 지향하는 증거도 표시일 수 있다.(증거일 수는 없어도)

초월하는 믿음은 이 모든 것들을 자양분 삼아 자란다.

바로 여기서 2가지 열매가 자란다. 자유와 불안함이다.

우주의 모든 것을 표시(증거가 아닌)로 삼기 때문에 광활한 자유가 열린다.

하지만 이 표시들은 서로 호환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같은 믿음으로

연합국 병사를 죽이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열매와

히틀러를 죽이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열매가 같이 나온다.

 

이 모든 불안함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렴.”이라는 문장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길이 보인다. 아울러 성서는 보고의 원천이 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인생에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

유치원을 졸업한 후의 인생에는 통한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의 인생에도 통한다.

어쩌면 대학을 졸업한 후의 인생에도 통할 지 모른다.

하지만 그 후에는 통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의문이 커지는 사람이 있다.

살다보면 성서에서도 딱부러진 답을 못 찾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런 누적된 문제가 점점 증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모여 옛 가르침에 귀 기울일지어다.

믿습니다. 아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듣보잡을 듣보잡이라 부르지 못하고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부르지 못하는.

그 모든 불확실한 것, 불안한 것으로부터

깨끗하게 차단당한 아늑한 광장.

이런 곳에 있으니까 넘흐 아늑하네요. 아이 좋아라-

1. 인식론의 문제

그의 주장을 떠 받들고 있는 건 무엇일까? 몇 가지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1) 합리론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Rene Descartes)

2) 근대 민주주의 이론이 떠 받드는 ‘자유의지’ (Free Will)

근대 합리론의 명제와 자유의지가 결합할 때 기독교의 ‘신론’은 증명되지 않는다. 신의 영역은  선험A priori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했던 ‘피안 너머’의 세계인 것이다. 우리가 입증할 수 있는 세계 ‘밖’의 것은 세계 ‘안’의 논리로 증명되지 않는다.

스피노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절대적인 것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상대적인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전략이라는 것들이 기독교를 상징화하려는 중세 카톨릭의 교권주의에 대한 반박이었다는 맥락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대의 맥락에서 바라볼 때도 스피노자의 주장은 참고해볼 만 하다.

현대과학이 ‘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불가능하다. 신의 영역은 탐구의 영역이 아니라 직관의 영역일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말하기 위한 모델 자체게 신에 의존하기도 한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의 함정은 ‘생각하는 나’를 누가 담보해줄 것인가다. 인식 모델은 자기 완결성이 있어야 하는데 근원적인 ‘생각하는 나’는, 주체는 아무도 그 객관성을 확보해주지 못한다.

완성된 인식론이라고 볼 수 있는 칸트의 그것조차도 본인이 오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이 그 바깥이 없다는 말일까? 인식론의 외부는 존재한다.

따라서 인식론 외부의 ‘절대자로서의 신’라는 개념을 인식론 내부의 인식틀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했고 실패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주의 구조를 파악함을 근거로 ‘신’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유추’일 뿐. ‘절대자-신’ 모델에 접근하지 못한다. 이 문제는 인식론적 문제의 기반인 존재론적 사유의 문제이다.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은 어떻게 상존하는 가??

그렇다면 신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나? 그건 아니다. 위의 주장의 현격한 문제는 아무도 그의 입을 막지 않았건만 그것을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신이 믿음의 영역이라는 말이 나왔었는데 그 말이 ‘과학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 주장은 기존의 근대과학의 인식론이 ‘신’을 증명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야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