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 희생양 제의 뒤 추악함들에 대한 묘사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006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0점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한길사

PD저널 헨드릭스의 책읽기

2009년 7월 4일 지행네트워크의 예사인(예술, 사상-사회, 인문) 세미나의 두 번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한길 그레이티스트 북스에서 나온 책을 완독했다. 책은 손의 질감과 눈으로 느끼는 두께보다 훨씬 빽빽했다. 다른 사회과학서를 읽을 때 보통 시간당 100페이지를 읽는 데, 이 책은 시간당 30페이지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집중력의 탓도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의 유일한 르포-기사집이다. 물론 읽을 때 이게 과연 잡지에 어울리는 글인가 싶기도 했다. <뉴요커> 정도니까 그래도 실었나 보다. (생각해보면 <월간조선>의 조갑제도 이 정도의 분량의 글을 싣기는 한다. 물론 쓰레기 묶음과 보석함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 <뉴요커>에는 여전히 그 기사를 읽을 수 있게 준비해 놓았다. ([http://www.newyorker.com/archive/1963/02/23/1963\_02\_23\_040\_TNY\_CARDS\_000273540](http://www.newyorker.com/archive/1963/02/23/1963_02_23_040_TNY_CARDS_000273540))

한나 아렌트는 예정되었던 대학 강의를 다 집어치우고 예루살렘에 <뉴요커> 특파원의 이름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녀가 보려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악마 찾기 게임 – 아이히만, 유대인, 나치, 독일, 다른 국가들, 그리고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흡사 퍼즐을 푸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다.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납치되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이 있다. 그는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p.74).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법정에 선다. ‘최종해결책'(가스실에서의 학살)을 위하여 ‘이주와 소개'(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것과 그것을 알선하는 일)의 행정적인 일을 했던 이가 아이히만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 유대인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오니즘의 이름으로 유대인의 국가를 2000년 만에 세운 유대인들은 히틀러, 나치, 홀로코스트에 대한 단죄를 시도한다. 히틀러는 이미 자살한 후였고, 다른 전범들에 대해서는 뉘른베르크 재판과 각 서유럽 국가들에서의 나치 부역자 색출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통로가 필요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던 아이히만이었다. 물론 문제의 중심에 독일 역시 위치해있다. 히틀러의 독일은 어찌되었건 유대인들의 학살을 주도한 국가이고, 나치는 그런 일을 거침없이 자행했다. 반유대주의의 신념과 유대인을 보지 않는 것이 소망이었던 지도자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박멸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또 다른 한 편에는 나치 시절 독일과 접하고 있던, 또 독일의 속국이 되었던 국가들이 있다. 이들은 나치 독일 치하에서 반유대주의에 공감했다. 아렌트는 책의 주인공 아이히만에 주목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아이히만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더 큰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과연 아이히만 만이 죄인일까?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분신이었나? 아니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도대체 이 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얼개는 흡사 ‘악마 찾기 게임’을 보는 듯하다. 검찰은 아이히만을 이미 유죄로 단정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아이히만은 다른 업무를 하지 않고 오로지 유대인 담당 업무만을 수행한 군인이었고, 최종적으로 유대인들의 아우슈비츠행을 알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판사는 그나마 기계적 중립을 유지한다. 그 때문에 그나마의 논의들이 가능한 상황들이 벌어진다. 아이히만의 변호사 세르바티우스는 아이히만이 나치 독일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말하며 그를 변호한다. **희생양 제의의 뒤 나타나는 추악함
**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성장부터 일에 개입하게 된 이야기까지를 차분하게 풀이한다. 아이히만에게 “분명 허풍은 언제나 가장 큰 죄”이긴 했다. 그는 잘 하지도 못하는 이디시어(독일어와 유대어의 혼성 발언)을 잘하는 척하기도 한다. 그의 과장하는 습관은 법정에서 그의 입지를 더욱 안 좋게 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정말 ‘빌어먹을'(아렌트의 표현) 기억력을 갖고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방어할 기억들을 잘 떠올리지도 못했다. 심지어 몇 년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던 점들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아이히만은 악마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기껏해야 진급을 빨리 하기 위해서 항상 전전긍긍했던 사람이었을 따름이었다. 히틀러의 명령이 법에 앞서기 때문에 그의 명령을 따랐을 뿐, 그는 유대인 학살의 원흉으로 일컬어지기에 너무나 유대인을 좋아했다. 시오니즘을 공부하려 했고,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해서 그는 언제나 존경을 표했다. 그리고 그는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폴란드에서 자행된 유대인에 대한 총살과 타살을 보면서 그는 독일 정부에 탄원하기도 했다. 아이히만은 오로지 독일제국의 법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잔인하게 살해되느니 당시’안락사’라고 일컬어지는 가스실의 죽음이 훨씬 더 덜 잔인하고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업무에 대한 죄책감을 잊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신에게 단죄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는 그의 진술은 일리가 있다. 그리고 당대에 ‘의학적 조치’라고 아이히만은 표현하는 데, 그건 당대에 의사들이 가스실에 대해서 그렇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이 자신이 진정 시오니즘에 지지를 보낸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다. 실제로 아이히만에 대해 변호할 수 있는 것은 독일의 정책 변화 전후의 맥락 때문이다. 히틀러의 1941년 ‘학살’에 대한 언급 이전까지 유대인에 대한 공식적인 정책은 ‘추방 및 이주’였다. 아이히만은 행정적 수완을 발휘하여 히틀러의 영향권 밖으로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는 데에 성공을 거듭한다. 그는 열정적으로 일을 했고, 그는 동시에 그러한 그의 업무가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땅을 갖게 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섭정의 형태로 자율적인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개척할 수 있는, 폴란드에서 가능한 한 넓은 지역이었다. 이것은 최고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p.136) 그를 위해 동부지역(폴란드 인근), 마다가스카르, 그리고 테렌지엔슈타트의 이주구상을 진행했다. 물론 “**총통께서는 유대인의 신체적 전멸을 명령**“했기 때문에 그 계획이 멈추었을 뿐이다. 게다가 아우슈비츠보다 더 끔찍한 일들이 그 바깥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폴란드에서는 학살이 손쉽게 이루어졌고, 루마니아에서는 ‘질식사’를 고안해 기차 객차에 사람들을 좁게 몰아놓고 오랜 시간 운행함으로써 그들을 질식시켜 죽이기도 했다. **그런 일들을 보고 아이히만의 행동을 순전히 히틀러의 행위처럼 ‘악마의 것’으로 몰아갈 수 있을까?
** 아이히만에 대한 ‘희생양 제의’가 벌어지고 있는 법정 뒤켠, 추악함을 발견한다.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최소한으로 죄를 묻자면 나치와 그 일파, 조금 더 넓게 본다면 독일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더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유대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신들은 ‘테렌지엔슈타트’라는 A급 전시용 수용소로 들어간다. 그리고 위원회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들어가게 하는 선전을 한다. 마치 1940년대에 최남선, 이광수가 글을 통해 학도병을 모집하던 것과 유사한 양상이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죽었는 지 아렌트도, 그리고 나도 역시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이들의 압도적 다수는 돈 없고 권력과 멀리에 위치한 평범한 유대인들이었다. 귀족의 신분으로 살았던 이완용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들은 2차 대전 이후 살아남아 ‘전 유대민족을 말살하려 한’ 반유대주의와 히틀러에 대해서 공박한다. 역겨움이 들었다. 그들은 자기 변호의 논리로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예를 볼 때 실제로 유대인 위원회로부터 ‘소개’받았던 10만 3000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 중 519명만 살아남았다. 반면 도망쳤던 2만~2만 5000명의 유대인 중에서 1만 명의 유대인은 나치스를 탈출하여 잠적해서 살아남았다(p.197). 이는 전체의 40~45% 정도의 숫자다. 그들은 쉽게 순응했고 쉽게 동족을 팔아넘긴 것이다. 그런 그들이 아이히만에게 죄를 씌울 자격이 있는 자인가? ** 오히려 덴마크의 민중들은 그들로 하여금 도망칠 수 있도록 성금을 모아 스칸디아비아 반도로 이송시켜 주기도 하였다. 누가 그들의 친구인가? “당시 나는 일종의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과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심판할 자가 누구인가?(p.184)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혈족을 또한 멸하였다. 아이히만은 손을 씻었다. **악의 평범성
** 영화 <더 리더="">의 한나 슈미츠 (내가 듣기에 한나 아렌트와 칼 슈미트를 붙인 이름은 아닌 가 했다)가 나타난 법정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히만이 ‘전범의 주범’으로 꼽히게 된 것에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숱한 전범들이 아이히만을 지목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법정에서도 아이히만은 그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책무’를 열심히 했었는 지를 설명한다. 비정상적 국가에서의 ‘성실함’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고려가 없다. 마찬가지로 <더 리더="">의 한나 슈미츠가 결국 재판에서 점점 불리하게 된 것은 다른 재판에 소환된 피고인들이 강경하게 자신의 역할을 부인함과 반대로 한나는 자신이 ‘책무’를 열심히 했는 지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모두다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수치심'(문맹이라는) 때문에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서 인정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수감되게 되지만 그 이야기 뒤에는 순수한 자기 역할에 대한 긍정이 있다. 자신이 나치 독일에서 열심히 일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느냐는 문제이다. 독일이 패망했을 때 그 나라에서 일했던 사실을 부정해야 하는가? 사실 더 많은 공범이었던 모든 이들은 자신의 ‘태만함’과 ‘마음의 거리낌’을 설명했는데 말이다. 결국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이 된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 악의 체제 하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이명박 체제 하에서 우리는 혹여 무력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범죄와 폭력이 예외적이고 경계에 해당하는 사례가 되는 정부기구에 적용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를 우리가 범죄가 합법적인 정치질서와 규칙에도 적용해야 하는가?”(p.396) “아이히만은 ……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는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p.391) “그로 하여금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p.391) 책을 읽다가 한나 아렌트의 ‘유머’를 발견한다. 하지만 뒷 맛이 쓰다. 한국의 지금 이야기와 대보면 어떨까? “독일의 젊은이들은 생활의 모든 면과 모든 행로에서 실제로 죄가 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정부 당국이나 공공기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런 사태에 대한 정상적 반응은 분개하는 것이겠지만, 분개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생명과 신체에 위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취업에 결정적으로 장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