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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을 보며 웃게 만들다 – PIFAN 13th in 2009 <노르웨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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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7 – [Reviews / Previews/Films] – 13회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
기껏해야 몇 회 되지 않지만 지금까지 영화제를 다니면서 본 영화중에 가장 재미있었다. 호러나 스릴러 둘 다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노르웨이의 숲="">노르웨이의>
시체(?)를 파묻기 위해서 등장한 얼빵한 건달 둘. 본드랑 가스 좀 불어보겠다고 학교 땡땡이 치고 모인 양아치 셋. 즐거운 ‘정사’를 위해서 산까지 밀월 여행을 온 유부남과 내연의 여자. 그리고 간을 찾는 지그프리드 같은 야성의 살인마.
[#M_영화 속으로 | 접기 | 죽고 죽이는 살육의 장이 시작된다. 흥미 있는 것은 그 죽음이 어떠한 ‘원한’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데에 있다. ‘죽음’ |
자체도 목적이 아니다. 거기에는 의학적 ‘적출’의 의미가 더 강하고 어쩌면 장기기증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살인자는 자신이
살해한 인간이 죽는 지의 여부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는 묵묵히 밭에서 감자를 캐는 농사꾼의 마음으로 일을 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아이히만 같은 경우는 그나마 이상한 신념이라도 있지만 그에 비해예루살렘의>
<노르웨이의 숲="">의 살인자는 훨씬 더 순수하다. 그에게는 ‘살인’의 관념이 없다. 집에 돌아와서 살아있는 사람을 보고서 하는 말이 그래서 “아, (낫을) 다 씻었는데(씻껐는데)”이다. 하지만 살인자에 주목하지 않아도 영화는 눈을 떼지 못하게끔 호흡을 가쁘게 전개한다. 그리고 각자의 조건들이 다르다. 건달들은 빨리 시체를 묻고 뜨고 싶지만 ‘시체’가 사라진다. 시체를 찾아야 일이 끝난다. 그리고 이 일은 어디에도 발각되면 안 된다. 따라서 그것을 본 사람은 역시 같이 묻어야 한다. 그러기에 뜨지 못한다. 그건 그들의 ‘힘’에 대한 자신감과 크게 상관이 없다. 유부남과 내연의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자는 운전을 못하기에 남자가 있어야 하고 또 자신들의 섹스를 누군가에게 들키기 싫다. 남자는 그 놈을 찾아보겠다고 나서고 그 남자의 부재 상태에서 여자는 산을 떠날 수 없다. 떠나려 해 보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고삐리들의 이야기. 한참 성욕이 왕성하고 호기심 많은 사내놈 둘과 ‘걸레’로 소문난 여자애 하나가 산에서 본드와 가스를 분다. 한 놈은 ‘욕망’은 강하지만 그 순수한 이드(id)와 에고(ego), 슈퍼에고(super-ego) 사이에서 이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본인도 “한 번 대줘”하고 빌지만 싫다는 여자에게 완력을 쓰지는 못한다. 오히려 완력을 써서 장악하려는 놈을 계속 말리고 말리다 안되면 완력을 써서라도 그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고 싶다. _M#] 서로는 각자가 살기위해 뛰어다니다가 만난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발견하면 되지 않아야 했기에 그들의 만남은살육제(카니발carnival)를 만들어 낸다. 모두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나름의 제약조건들은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게 두질 않는다. 그리고 문제 전체의 구조를 명확하게 알법하면 그는 죽는다. 살아남은 이들은 가장 얼빵한 이들이다. 정경호가 벌이는 애들립은 쉴새 없이 웃게 만든다.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대낮이라는 조건과 구태여 세밀하게 보여지는 살인의 장. 토할 것 같다가 정경호 덕택에 영화에서 다시 눈을 떼지 못하고 그 현장을 보고야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