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웨이데이즈awaydays – Pifan 13th in 2009

어웨이 데이즈8점
팻 홀든
어웨이데이즈
감독 팻 홀든 (2009 / 영국)
출연 스티븐 그레햄, 니키 벨, 리암 보일, 올리버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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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1/30 – [Reviews / Previews/Films] – Trainspotting – 날탱이들의 어제와 오늘

내가 영국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영국을 좋아한다.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것같고 law and order에 대한 확신들을 항상 잊지 않는 완고함을 좋아한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그러면서도 의원들이 arena형 의회에서 총리에게 욕을 퍼부으면서 그 자리에서 박살을 내겠다고 덤비는 그 깡다구도 좋아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좋은 것은 여전히 살아있는 비틀즈의 나라, 브릿팝의 나라로서 하위문화가 여전히 흔적이나마 보존되고 그것이 용광로로 아티스트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의 나라이기에, 그러면서도 웨스트엔드의 세련됨이 오락가락하는 나라이기에 그렇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는 것이 가능한 것도 그러한 조건에서다.

영국 영화들은 그런 영국의 복합적인 층위들을 다양하게 표현하며 공존한다. <더 퀸=""> 같은 여왕과 내각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가 있고, 더 전통적인 사극으로 <오만과 편견="">이나 디킨스의 소설들을 영화화 한 작품들 혹은 <비커밍 제인=""> 같은 영화들도 있겠다. 동시에 워킹타이틀 같은 영화는 중산층들의 일상과 노동계급의 일상을 표현하는 영화들을 만들면서도 끌어안는 모습들을 연출하곤 한다. 가장 급진적인 워킹타이틀의 영화가 가장 예술적으로 보였던 <빌리엘리엇>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하곤 한다. (이주연과 내가 본 <빌리 엘리엇="">의 차이에는 그러한 인식론적 단절이 있기도 하다.) </p>

그런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국 영화는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과 같은 하위문화와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그건 영국 드라마 <스킨스skins>를 BBC의 고상한 드라마보다 좋아하는 것과 이유와 같다. 이러한 하위문화를 다루는 영화와 드라마들은 항상 내 어린시절을 연상시키기 떄문이다. 대체로 대처와 메이저의 수구 꼴통 우파의 시대에 망가져버린 그들의 삶의 기억이 있다. 김애란의 접근처럼 내밀한 이야기들을 구태여 숨기지 않지만 영화의 배경엔 항상 공공성이 파괴되고 노동자 계급이라는 영국의 유구한 역사의 또 한축이 붕괴되었을 때의 모습들이 드러나곤 한다. 지금 이명박이라는 신자유주의 전도사의 시대를 살아가는 상황에서 다시금 그 시절이 도래될 까 경고를 주는 측면도 없다곤 할 수 없다. </p>

1979년 리버풀. 패거리의 시대의 기억


노동자의 도시 리버풀. (난 참고로 FC 바르셀로나를 응원한다. 바르셀로나와 카탈로냐는 스페인의 전라도니까. 그리고 좌파의 땅이고 해방의 땅이니까.) 예술학교를 다니다 돈 좀 벌어보겠다고 나선 Cathy(카씨라고 읽는데 아마 미국식으로 읽으면 캐시가 되겠지). 카씨가 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멋져’ 보이는 거다. 남자들의 세계에서도 여자들과 맞대면하는 수컷 본능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 모든 지점에서 카시는 멋져보이고 싶다. 하지만 아직 카씨는 김현진의 표현따라 ‘토이남’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하는 건 축구장 놀러가는 일, 그리고 레코드나 좀 모으는 일 등이다.

멋져보이고 싶은 카씨가 선택한 것은 패거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축구장의 훌리건 노릇을 하는 패거리에 찾아간다. ‘더 팍The Pack’에 들어가려한다. 앨비스라는 멋진 녀석을 발견한다. 카씨는 앨비스에게 더 팍에 가입시켜달라고 조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카씨는 계속 거절한다. 카씨와 앨비스의 우정은 점차 커지고 앨비스는 카씨가 원하는 더 팍에 가입시키는 일보다 카씨와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결국 카씨는 더 팍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멋져’보이고 싶은 카씨는 점차 ‘마초’가 되어간다.

캐릭터들이 재미있다. 카씨는 전형적인 ‘성인식’을 원하는 ‘소년’이다. 마초가 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수함이 카씨에게는 있다. 아직 엄마의 품속에서 하지 말라고 터부시되던 것들을(마약) 택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른이 되고 싶다. 그의 choices는 전형적이다.

카씨는 더 팍에서 잘 나가는 앨비스와 ‘우정’을 원하지만 사실 앨비스는 더 팍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조직은 그를 원하고 동질화를 원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아웃사이더다. 그가 원할 때 놀아주면 조직이 좋아할 따름이다. 조직은 그를 컨트롤 하지 못한다.

조직 안에는 전형적인 가부장 마초 존 고든이 있다. 자신이 소대장이나 중대장인냥 행동하고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규율을 강조한다. 그가 열어주는 조직원들에 대한 쾌락은 술과 여자이다. 그것을 넘어서서 일탈을 꿈꾸거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놈들은 항상 응징한다.

카씨가 점점 깡이 좋아져서 고든의 지시 없이 먼저 ‘선빵’을 날려 우위를 점하려 했을 때 가차없이 주먹을 날려 카씨를 제압하는 것은 고든의 행동에 있어서 필연적인 수순이다. 카씨는 자신이 ‘오야붕’이 되지 않는 조직을 거부한다. 카씨가 원한 건 순전히 가장 멋진 놈이기 때문이다. 앨비스는 조직 내에 가장 매력적인 존재이고 가장 능력있는 존재이지만 구태여 조직 내의 위상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앨비스는 단지 ‘사교적’ 의미에서 조직을 활용할 따름이다. 앨비스는 마초가 아니고 게이이고 그의 ‘과장된 마초성’은 순전히 그 사회에 발을 걸치고 있으려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둘의 운명은 대체로 청춘물이 그렇듯 비극으로 흘러간다.

영화를 보면서 영국의 1979년의 가족이라는 의미와 지금 대한민국의 가족을 대비시켜보게 된다.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영국의 부모들은 특별한 제약을 아이들에게 두지 않는다. 그 덕택에 한 편으로 아편쟁이들이 많긴 하다. 하지만 그들은 ‘놀 곳’이 있다. 항상 내 지론이지만 “놀아봐야 놀 줄 안다” (2009/04/21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놀아봐야 놀 줄 알지 – 마쓰모토 하지메, <가난뱅이의 역습="">, 이루, 2009</a> ) 그 놈들은 제대로 놀아본 녀석들이다. 한국의 아이들은 상류층 몇을 제외하면 특별하게 문란할 것도 없이 엄마 품안에서 잘 자라곤 하는 데 영국의 사회라면 좀 노는 아이들이 그들을 가족으로부터 격리시키지만 한국의 양아치들은 특별하게 자기 바깥의 또래를 가족에서 일탈시키지는 못한다. 그게 ‘손해’라는 것을 모두 다 알기 때문이다(2009/06/03 – [Reviews / Previews/Films] – 마더(2009) – 내 새끼즘). </p>

그래서 영국이 부러웠다. 그들은 그러한 환경에서 지들 x대로 모여서 약빨면서라도 음악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발현하는(모드족, 펑크족, 라스파테리안 등등 2009/02/24 – [Reviews / Previews/Culture Books] – 딕 헵디지, 이동연 옮김 – <하위문화 Subculture=""></a> ) 문화양식을 만들어 냈다. </p>

하지만 한국의 2009년 청년/청소년 문화는 어떤 것일까? 안개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겨보고 깨져봐야 뭔가라도 만들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비극적인 결말이라도 계속 반복되야 다른 방향의 탈출구를 찾을수 있는거 아닌가?

<어웨이데이즈>의 노래들이 귀를 떠나지 않는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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