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 무기력한 이유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06

인간의 조건10점
한나 아렌트 지음/한길사
한나 아렌트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서평</p>

 2009/07/07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악의 평범성 : 희생양 제의 뒤 추악함들에 대한 묘사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006

독서노트

2009/07/24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독서노트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06 </td> </tr> </tbody> </table>


겁없이 고전에 덤비다

지행 네트워크에서 ‘예사인’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다. 이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처음 읽은 <한길 그레이트북스="">였다. 항상 구경만 하다가 도망가고, 사다가 집에 진열용으로만 보관하는 책을 처음
읽어냈다. 고전을 점령하지는 못했어도 끝까지 다 읽어냈다는 뿌듯함에 포만감이 느껴졌다. </p>

고전을 읽는 여러가지 길이 있을 것이다. 그 다양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왜 읽는 가?”에 있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적당한
방법은 ‘고전’에 대한 ‘부담’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간추려질 필요가 있다. 먼저 고전을 여러 사람이 강독하면서
차분하게 읽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그냥 다른 여타 단행본을 읽듯이 죽 읽어내는 방법이다. 어떤 방법이 더
적실할까?

전공자에게는 항상 전자의 방법이 더 주효할 것이다. 본인이 칸트 전공자인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의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세세한 내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그것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기 떄문이다. 또한 수업시간에 칸트를 읽겠다고 결심할 경우는 당연히 그렇게 천천히 읽어도 된다. 그리고 참고문헌이 있으면 다 찾아 읽으면 된다. 시간이 많고
강제적으로 숙제처럼 할 수 있으며 장시간 해도 흐름이 그 때 그 때 복원될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p>

하지만 고전을 한 번 읽어보고 그 맛보기라도 조금씩 느껴보고 싶은 이에게 그러한 방법은 적실하지 않다. 부담감 때문에 어느 순간
책을 던져놓고 다시금 캐주얼한 책들을 읽고 있는 본인을 발견할 것이다. 그냥 책상에 앉아서 큰 부담없이 쉽게 읽어내는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다 꽂히면 다시 읽으면 되지 않나. 그 때는 더 꼼꼼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통독해라. 빠른 시간 안에. 우석훈 선생에게 들으면서 공감했던 방법이고, leopord, 후배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세미나에서 그 방법으로 고전을 읽고 있다. 겁대가리 없이.

르네상스적 지식인 한나 아렌트

2002년 <서양정치사상> 시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황주홍 선생이 읽어주고 있었다. 그의 교재를
볼 때 의아했던 점은 이 세 명 중 누구를 이야기할 때에도 한나 아렌트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마치 아렌트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강의록을 읽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수업 역시 한나 아렌트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전개했다. 매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이야기는 ‘공적 영역’, ‘시민성’, ‘윤리’ 이런 말이었다. 안 그래도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못이 박혔던 그 버전으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정치학 수업 시간에 그런 꼰대같은 이야기를 듣는 게 좀 싫었다. 그래서 난 항상 <맑스/엥겔스
선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읽어가서는 아렌트를 후려쳐 보려고 애쓰기도 했다. </p>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그 이후로 아렌트의 이야기는 잊혀졌다. 그녀가 생각난 건 순전히 ‘예사인’ 세미나 덕택이었다. 그리고 아렌트에 꽂혔다. (또 곧 돌아오겠지만. 난 맑스가 아직은 제일 좋다.)

꼬장꼬장한 성품이 담배를 통해 묻어난다.
어설프게 공부하고 “선생님. 그거 이거 아니에요?”했다가는 담배빵을 당할 것 같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렌트의 모습. </div>

한나 아렌트의 글은 정치하다. 읽기 난해하지 않다. 그녀의 저작을 읽으면서 난독증을 느낀다면 그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고대와 근대의 역사와 철학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변증으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루소, 맑스 같은 굵직한 사조가 모조리 그의 논의 전개를 위해 등장한다. 그
것만은 아니다. 갈릴레이, 뉴턴, 라이프니츠, 하이젠베르크 등 자연과학의 굵직한 논의들도 최소한 스쳐는 간다. 거대한 사상사를
옆에 껴안고 읽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아마 거의 마지막 세대의 ‘르네상스적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C. P. 스노가 <두 문화="">를 통해서
자연과학도와 인문사회과학도의 간극을 지적하던 시절에도 아렌트는 그들과 교분을 갖고 그들의 논의의 세세한 면들을 공박하고 반증할
수 있는 학식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미’에 대한 예찬을 보면 예술적 감각 또한 그녀에게서 빼놓을 수는 없다. 사실 아렌트는
발터 벤야민의 친구였고, 야스퍼스가 주례를 봐주었고, 하이데거의 지도를 받기도 했었다. 진선미를 겸비할 수밖에 없는 조건. </p>

어쨌거나 그녀의 그런 지적 배경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풍성하고 읽는 이에게 많은 정보들을 제공하고 많은 사유들의 선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덕택에 한 번에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있고 읽는 데에 무지하게 애를 먹기도 했다. 그건
순전히 그녀가 아는 게 많아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글은 쉬우니까.

정치의 꿈, 악몽의 현재

1.
2009년 7월 22일 미디어법이 날치기로 처리되었다(2009/07/22 – [Reasoning/Current Issues] – Again 2004? – 니들이 했으니 똥도 니들이 뒤집어 써 : 미디어법과 금융지주회사법 통과에 대해)
.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족수를 채웠는 지 아닌 지도 확신할 수 없다. 사실 한나라당이 그렇게 생겨먹은 존재인 건 18대 총선 이후 명확해 보였다. 청와대 안의 참모들도 마찬가지다. 친박연대와 박근혜가 항상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이명박을 견제하지만 자신들과 한나라당 친이계가 공유할 수 있는 지반-대자본의 이익-과 물려있을 때에는 주저함 없이 똑같은 행동을 한다. 박근혜의 법안 처리 전의 태도와 그 이후의 태도를 대비해보면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억울한 이유는 그와 다른 정치적 지향을 갖고 다른 이익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데에 있다. 민주당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오늘 뽑아든 ‘의원직 사퇴’와 ‘헌법재판소’에 요청하는 방법 밖에 없다. 거리로 나가면 대안이 될까? 물음표에 또 물음표가 쳐진다. 1987년 이후 최대 많은(월드컵 거리 응원 제외) 인파가 모였던 2008년의 촛불도 실패했다. 그 촛불의 스펙타클을 보고 이명박은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불렀을 따름이다.

무력함이다. 우리가 접하는 것은. 도대체 왜?!

2.
한나 아렌트를 읽는 행위는 그러한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을 줄 수 있는 듯하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통해 인간의 ‘활동’의 영역을 분석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한다. </p>

노동은 인간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노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본조건은 삶 자체이다.
작업은 인간실존의 비자연적인 것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인간종’의 되풀이되는 생활주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사멸성도 이런 생활주기에 의해 보상되지 않는다. 작업은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해준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이다(pp.55-56).

고대에는 노동이 천시되었고 노예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노예가 아무 것도 없이 항상 물건처럼 다루어졌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예라는 말은 어느 정도 본인의 선택을 함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시민들은 행위를 했다. 폴리스에 모여, 아고라에 모여 말과 행위를 했다. 폴리스는 인간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장이었다. 그 행위의 장에서 ‘활동적 삶’의 궁극은 항상 ‘정치적 삶’이었다. 시민들은 정치적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소유’를 보장받았다. ‘부’는 별 가치 없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소유와 부는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소피스트의 시대가 끝나고 이러한 활동의 위계는 전도되었다. 가장 추앙받는 것은 노동이었고 가장 비천한 것은 행위었다. 플라톤 이래로 내려오는 관조의 철학이 그것을 만들어 냈다. 이제 폴리스는 “철학자의 탁월한 통찰에 의해 지도”받아야 하고 가장 좋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관조하는 것이 되었다. “진리는 인간의 완전한 정지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p.64)

이 전도의 문제는 곧바로 행위의 중요성을 짚어야만 깨달을 수 있다.

행위만이 인간의 배타적 특권이다(p.74).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과제이자 잠재적 위대성은 작업, 행위, 언어의 능력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가장 뛰어난 자'(aristoi)만이 참된 인간이다(p.69).

3.
이렇게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진 행위의 권위라는 것은 근대 이전까지 복권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해방을 내세웠던 사상가들도 이 문제를 간과한다. 맑스도 마찬가지다. 맑스는 노동과 작업을 구분하지 못한다. 맑스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아렌트가 맑스를 후려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노동과 인간을 해방시키는 동일한 조건으로서의 노동을 맑스는 혼동했다. 생산력이라는 조건으로 그것을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인들이 그랬듯이 ‘노동’에서 해방되어야 행위를 할 수 있지만 그가 말하는 ‘노동해방’은 ‘노동계급의 해방’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인간 본연의 자유의 실현을 위해서 노동을 극복되어야 한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여기서 도출된다.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노동과 무관한 모든 활동은 하나의 ‘취미’가 된다.”(p.185) 그렇기에 이명박 시대야 말로 근대 자본주의의 공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프로파간다와 상관없이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대자본의 ‘부’를 축적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시장주의를 지키는 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것 역시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것에는 항상 사적 소유에 대한 약탈이 있었기 때문이다(용산 학살을 보라라. 그리고 인클로저 운동을 보라.).</p>

하류계층의 소유권 박탈로 시작하여 신흥 무산계급의 해방으로 진행된 근대 이전에, 모든 문명화는 사적 소유의 신성함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반대로 부는 사적으로 소유되든 공적으로 배분되든 간에 결코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원래 소유는 즉 공론 영역을 구성하는 한 가족의 가장이 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와 같이 사적으로 소유한 세상의 한 부분은 이것을 소유하는 가족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어서 시민의 추방은 단순히 그의 재산의 몰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처 그 자체의 실질적인 파괴를 의미하였다(p.115).

</span>이는 맑스 역시 동일하게 지적한다. (이러한 맥락을 살펴보면 아렌트 역시 어느 정도는 ‘독점 자본주의 이론’의 논리에 동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물론 엄밀한 것은 아니다.)

노동의 사회의 끔찍함을 아렌트는 정확하게 지적한다. 베블렌의 ‘과시적 소비’를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한다.

맑스가 죽은 지 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런 추리가 오류라는 것을 안다. 노동하는 동물의 여가시간은 오로지 소비에만 소모되며 그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의 탐욕은 더 커지고 더욱 강해진다. 이들 욕구가 보다 정교해짐에 따라서 소비가 더이상 필수품에만 한정되지 않고 주로 사치품에 집중된다는 점은 이 사회의 성격을 변화시키기보다 오히려 이 사회의 심각한 위험을 은폐한다. 그 위험은, 종국에는 세계의 모든 대상이 소비와 소비를 통한 무화(annihilation)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p.190).

 과시적 소비는 자신들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노동의 맥락에서 탈출할 수 없게 만드는 덫이다. 부르주아들과 그들을 따라하는 중간계급의 과시 소비의 맥락 역시 ‘노동’이 지배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결과이며 동시에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공적 영역에 대한 무관심) 또한 근대 자본주의의 생산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모든 독재자들의 야망은 시민들이 비생산적인 공론과 정치로 시간을 허비하지 못하게 하며, 동양의 전제군주제의 바자(bazaar)와 비슷한 가게들의 집합소로 아고라를 변형시키는 것이었다.”(p.219)

대중이 지쳐 죽을 때까지 일만할 수밖에 없게 만들면 성공이다. 독재하려면. 이를 위해서 과시 소비를 유도하면 되고. ‘먹고살리즘’과 ‘명품 열풍’은 동전의 양면이다. 또한 언론이 유도하는 ‘정치 혐오증’ 역시 그러한 목표의 프로파간다다. “정치인들은 일 안하고!” 혹은 “정치인들은 항상 싸움질만 하고!” (2009/03/23 – [Reasoning/Current Issues] – 개혁이 아니라 정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지배층의 ‘정치 게임’이 우리의 일상을 장악하고 우리로 하여금 노동기계로 일하게 만든다. 끔찍한 역설.

4.
근대 자본주의에서 자신 만의 개성을 녹여놓을 만한 작업의 공간은 예술가에 한정되어 개방되었고 정치의 영역은 폐쇄되었다. 기독교가 그리고 노동의 패러다임이. 하지만 동시에 관조의 전통 역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노동의 세계(자본주의)에서 빠져나가는 것과 관조의 패러다임 극복(엘리트주의 극복)이 근대적 목표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던 ‘행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

정치의 영역은 ‘차이’와 ‘동등성’에 의해 담보된다. 인간 개개인의 차이가 없다면 이는 곧 동물이 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아니 사실 동물도 각각 개체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눈으로 구분하지 못할 뿐이다(2009/07/10 – [Reviews / Previews/Essays] – 공감으로 ‘발견’한 천재 앵무새- 알렉스와 나, 이렌느 페퍼버그, 2009, 꾸리에
). 이러한 차이 덕택에 우리는 서로 말과 행위를 통하여 소통한다. 말과 행위의 세계는 생성의 세계이다. 자신과 다른 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하여 함께함으로써만 나타나는 것이다. 새로운 것들은 지배층의 ‘확실성’의 영역과 상관없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의 영역에서만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정체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좌우파 상관없이 운동가들과 정치인들은 대중들 개개인의 구체성을 지워버리는 경향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떡볶이와 순대를 좋아하고 남자친구 엉덩이의 점을 좋아하고 머룬 5의 노래를 들으면서 철학책 읽기를 좋아하는 어떤 여자의 개성과 상관없이 그들은 그냥 대중의 일원 혹은 유권자가 될 따름이다.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그러한 특이성을 가지고 공적인 활동을 하고 설득을 통해서 공동선을 ‘만들어 가는'(구성) 일이다. 자신이 ‘지도’하고 대중이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위가 온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시작과 끝까지 시종일관 장악해야 한다. 즉 통치자의 특권인 명령을 하는 기능과 신하의 의무인 이 명령을 수행하는 기능으로 분리 되었다(pp.250-251).

다시 정리하자면 영혼없는 공무원, 지 맘대로 행동하는 행정수반, 먹고살기 바쁜 노동계급, 노동계급을 더 굴리기 바쁜 자본가와 재벌. 거기에 정치의 영역이 없다. 그리고 그런 건 ‘정치인’들이 하는 거다. 관심 꺼.

5.
차라리 이렇게 맘대로 할 거면 엎으라고 아렌트는 이야기한다. 그래서 아렌트는 확실히 좌파 전통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인민의 항쟁은, 거의 저항할 수 없는 권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이것을 ‘수동적 저항’이라고 부르는 것은 확실히 역설적 생각이다. 인민의 항쟁은 가장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행위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 항쟁은 …… 오직 대량학살에 의해서만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승자조차도 패배자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죽은 자를 지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p.263).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아렌트는 경계한다. 자본주의하에 포섭된 ‘이익집단’으로의 노동조합은 맑스가 이야기했던 자본주의를 넘어선 형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노동조합이 세운 정당은 이해관계 정당에 불과하고 다른 사회계급의 당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내세웠던 정당들은 곧 노동조합의 이해를 정확하게 대변할 수 없게 된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노동계급의 문제가 ‘공론 영역’으로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가치부여를 한다. “예외적인 것을 일상생활의 평범한 사건으로 만드는 것”. 즉 정치의 핵심이 실현되었으니 말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아렌트에게 중요한 것은 누구의 편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과정’ 속에서 ‘움직이는 가’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6.
하지만 ‘행위’의 영역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인간은 “행위를 통해서 시작된 모든 과정들을 원상태로 복구하고 통제하는 능력은 여태껏 가진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가지지 못할 것”(p.297)이라고 말한다. 이제 지구도 위험해 진다. 여기서 인간은 어디로 가야할까?

그 실마리를 예수에게서 꺼낸다. 용서라는 “예기치 않은 형식으로 일어나는 유일한 반동”에 주목한다. 바울이 세운 교리의 체계 바깥의 원석으로써의 예수는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근대 정치체제들이 발견해낸 이러한 ‘행위’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예측불가능성의 제거”였다. 홉스적인 가상모델이 염두하는 것은 자연상태에서의 상호 학살이다. 이들은 정치와 행위의 여역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계약을 통해서 법의 체계를 확립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인간사의 예측불가능성과 인간의 신뢰불가능성을 그대로 내버려두며, 그것들을 단순히 매개체로 사용하여 그 안에 예측가능성의 섬을 만들고 신뢰성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고 믿은 거다(p.309). 하지만 그것들이 가능했을까? 지금 우리는 예측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7.

마지막 장의 이야기는 당시의 아렌트가 처한 상황에 기인하는 이야기들이다. 근대 과학의 발달은 다시금 ‘행위’를 복권했다. 근대 인식론은 진리를 ‘확실’하게 찾아내려 했지만 그 ‘확실성’ 덕택에 자신들의 논리의 기반 하나가 망가질 때마다 완벽하게 몰락했다. 자신들이 세워놓은 체계를 자신들이 붕괴시켰다.

근대를 구출한 것은 오히려 과학이었다. “관조와 행위 전도를 가져온 인간의 근본적 경험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정확히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망이 그의 손의 재간을 신뢰한 후에만 진정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관조가 아닌 ‘행위’를 통해서만 진리와 지식은 획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p.357) “철학자들은 인식론자가 되어 모든 과학 이론을 걱정하였다. 이것은 과학자에게 전혀 필요없는 일이었다.”(p.362)

하지만 이렇게 도래한 행위의 시대가 우리에게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가? 그렇다면 왜 홀로코스트는 발생했을까? 아니면 다시금 ‘단죄’는 예루살렘 재판소의 아이히만에게 등장하였는가? 원시적인 질서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도대체 왜 이명박이는 저러고 대중은 무기력한가???

그 무기력함이 여전히 느껴진다. 아렌트는 그 혐의를 기독교에서 찾는다. 정치를 하찮은 것이면서 또한 위험한 것으로 추락시키는 기독교의 이야기를 한다. 죽음 앞에 무기력한 인간이 ‘삶’ 그 자체의 ‘복음'(기쁜소식)을 추인하는 순간 인간이 겪는 ‘최고선’, ‘행위’의 영역은 상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는 노동, 작업, 행위가 현세의 필연성에 똑같이 예속되는 것으로 보았다.”(p.385)

“근대는 최고선이 세계가 아니라 삶이라는 가정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해 왔다. 근대는 근본적 전도에 결코 도전하지 않았다.”(p.387)

이명박이라는 악의 표상

아렌트는 특별히 누군가를 탓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문제지만 거기에는 다시 ‘예수’의 가능성이 있다. 행위의 가능성을 알았던, 그리고 용서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소통법을 확인한 예수가 있다. (이명박의 소통법이 궁금한가? 2009/07/21 – [Reviews / Previews/Literature] – ‘그들’의 소통법 – 공지영, 도가니, 창비, 2009)

이명박이라는 악의 표상 앞에서 2008년과 2009년이 흘러가고 있다. 이명박에 대한 욕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리고 “그걸 찍은 국민이 개새끼”라는 국개론 역시 할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언사은 언제나 무력하다. 기껏 대안을 만들어 ‘민주개혁세력’이라는 대안적인 전선을 만들어봐야 ‘개새끼 국민’이 이명박을 찍은 이유에 대한 정확한 반박을 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가장 능동적인 대중이 있을 때 이명박은 등장할 수 없다. 항쟁의 경험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먹고살리즘이 작동하는 근대 노동의 체계가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담론들에 대한 공박이 필요하다. 거대한 ‘신자유주의 체제’는 쉽게 비판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질서’와 ‘획일화’에 대해선 저항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같은 기준으로 엮어버리는 태도는 우리의 무기력을 강화시킨다. 똑같은 ‘국민’인데 뭘 더 할 수 있나? 이질성heterogeneous에 한해서 정치는 작동한다. 우리 안의 동질성homogeneous가 이명박을 만들어 낸다. 차이의 정치가 필요하다. 차이 그 자체가 정치를 추동하므로.

일단 잊혀진 것들을 챙겨보자면, 일상의 정치를 복권시켜야 한다. 필요한 것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서 ‘이익집단화’ 좋게 말해 ‘전선’으로 엮는 것보다 각각의 차이들을 균등하게 품을 수 있는 대안적인 공동체의 필요성이다. 대단위 정치(Politics)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무너지지 않는 울타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정치-민주주의, 그리고 꼬뮌-의 공간이 필요하다.

정당의 차원에서 볼 때 미끄러지는 중간계급에 대한 고려는 불가피할 것이다. 항상 그렇기에 ‘국민’을 입에 달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역동성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면 행위-정치가 가장 잘 실현되는 곳, 즉 일상의 정치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 잠재성의 원천에서 항상 시작해야 한다. 그렇기에 항상 능동적으로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영리해야 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아직 대안적인 정치체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조건="">을 쓰면서 아렌트가 겪은 마지막 세상은 그러한 자신의 이상과 반대되는 대중정치의 시대, 포디즘의 시대, 조합주의의 시대였다. </p>

<혁명론>을 읽어봐야겠다. 그가 생각했던 대안정치체계에 대한 비전과 내가 꿈꾸는 상상력의 세계에 대해서 말이다. 그를 위해서 난 고립된 공간에서 계속 ‘작업’을 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멈춰서 책상에 앉아있지만 역설적으로 항구적으로 움직이는 것일 지도 모른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