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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06
노동, 작업, 행위
<인간의 조건="">은 무슨 말일까?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일까? 동시에 인간을 둘러싼 조건들을 의미할 수는 있다. 아렌트가 주목하는 건 전자이다. “지상의 삶에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조건들 이외에 그렇지만 부분적으로는 그것들 중에서 인간들은 부단히 (스스로 만든) 자기 조건을 창출한다. 인간에 기원을 가지며 그래서 변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조건들은 자연적인 것과 똑같이 인간을 조건짓는 힘을 가진다.”(p.58) 아렌트는 인간의 세 가지 근본활동으로 노동, 작업, 행위를 이야기한다. 노동은 “인간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 노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본조건은 삶 자체이다.” 작업은 “인간실존의 비자연적인 것에 상응하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인간종’의 되풀이되는 생활주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사멸성도 이런 생활주기에 의해 보상되지 않는다. 작업은 ……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해준다.”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이다.”(pp.55-56) 고대 그리스에 있어 노동은 노예의 것이었다. 시민은 노동을 하지 않았고 그것을 법으로 보장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소유’였다. 우리는 소유를 부와 구분하지 않지만 소유는 법적인 자기 처분권이고 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재화들을 이야기한다. 어쨌거나 시민은 그러한 노동과 상관없이 행위의 영역에서 활동했다. 폴리스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위는 인간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장이었다. 고대 소피스트 시대의 그리스는 행위를 예찬했다. 노동은 가장 비천한 것이었고 그 다음이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행위의 장에서 ‘활동적 삶’은 ‘정치적 삶’으로 나타난다. 모두는 공적 영역에서 문제들을 논의하고 설득한다. 시민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노동이나 장인의 작업이나 상인의 탐욕적인 삶 모두를 배제해야만 했다(p.61). 노동과 작업은 기껏해야 “필요와 욕구에 구속되어 필요하고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까닭에 자유로운 활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p.62). 이를테면 이명박이 말하는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은 순전히 노예의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기원된 사유는 ‘관조’가 행위를 초월해 버린다. 곧이어 행동에 대한 구분이 상실된다. 노동, 작업, 행위에 대한 물음이 사라져버린다는 말이다. 정치적 ‘행위’에 의해서 구성되었던 폴리스는 “철학자의 탁월한 통찰에 의해 지도”받아야 하고, 가장 좋은 것은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는 것이 되었다. “전쟁이 오직 평화를 위하여 수행되듯이, 모든 종류의 활동은 심지어 단순한 사고의 과정도 절대적 고요의 관조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진리는 인간의 완전한 정지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p.64) 관조가 중시되자 행동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 자체가 사라진다. “활동적 삶은 근대의 전통과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맑스와 니체에서의 종국적인 전통 위계질서의 전복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p.66).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왜 행위에 대해서 아렌트는 강조할까? “행위만이 인간의 배타적 특권”이기 때문이다(p.74).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과제이자 잠재적 위대성은 …… 작업, 행위, 언어의 능력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인간은 불멸적인 행위업적과 사라지지 않을 흔적을 뒤에 남길 수 있는 능력에 의하여, 인간은 자신의 불멸성을 획득하고 스스로를 ‘신적’ 본성을 가진 존재로 확증한다. ‘가장 뛰어난 자'(aristoi)만이 참된 인간이다.”(p.69) 노동에서 벗어나기 – 맑스에 대한 공박 아렌트는 연보에서도 보이지만 꾸준히 맑스를 연구했다. 그리고 에릭 홉스봄과 폴 스위지 같은 미국 내의 좌파 거장들과 함께 신사회연구원New School of Social Research의 거물이 되었다. 최소한 아렌트가 좌파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아렌트는 <자본>에 나온 맑스의 전략을 공격한다. 맑스는 작업과 노동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labour과 work, arbeiten과 werken의 차이는 엄밀하게 존재한다. Arbeit는 노동을 의미하고 Werk는 작업을 의미한다(p.134 원주3). 위에서 언급한 대로 노동은 노예의 것이고 작업은 장인의 것이다. 노동은 필연성의 영역이고 사용의 영역이며 작업은 반대로 불멸의 영역이다. 작업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사용하지 않는 이상 영속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위계에서 노동은 언제나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일 뿐 지향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가 …… 모든 가치의 원천인 노동을 예찬하고 전통적으로 이성적 동물이 차지했던 지위로 노동의 동물을 상승시킨 근대가 노동하는 동물과 제작인, ‘신체에 의한 노동과 손에 의한 작업.’ 이 양자를 분명히 구별하는 하나의 단일 이론을 제시하지 못했다”(p.140). 맑스 역시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 맑스 역시 노동의 ‘생산성’에 우선적으로 주목할 따름이다. (다만 잠재적으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에는 작업과 노동의 보다 근본적인 구분이 포함되어있다.) 헤겔도 작업의 측면을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의 측면에서 검통하지만 그가 쓰는 용어는 역시 ‘노동’이다. “숙련과 비숙련 작업, 정신노동과 신체노동 사이의 구별이 …… 맑스의 저작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p.144) 로크가 구태여 화폐를 도입했던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전근대적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들은 사용에 의해서 파괴된다.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더 영속적인 것이 필요한 데 거기에서 화폐가 도입되는 것이다. 노동은 필연적인 인간의 삶을 산출할 따름이다. 거기에 인간’세계’는 없다. 즉 행위의 영역은 없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천한 일과 서비스는 그것을 완수한 순간 사라지며, 좀처럼 어떤 흔적이나 가치도 남기지 않는다”(p.159). 하지만 근대적 의미에서노동이 예찬될수 있는 것은 그것을 측정할수 있는 화폐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노동의 본원적 성격을 발견하기 때문에 맑스의 ‘혁명적 테제’ 하나를 끄집어서 이야기한다. 네그리도 종종 이야기했던 것이지만. “노동을 철폐할 때만, ‘자유의 영역’이 ‘필연성의 영역’을 대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의 영역은 욕구와 외적 유용성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만’ 즉 ‘직접적인 육체적 욕구의 지배가 끝나는’ 곳에서만 시작하기 때문이다.”(p.160) 노동하는 인간은 “자기 신체의 사적 성격 속에 갇혀서, 즉 누구와 함께할 수도 없고 온전하게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필요의 충족에만 사로잡혀서,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노예제와 가정으로의 추방은 대체로 근대 이전 모든 노동자들의 사회적 조건이었다. …… 노예제가 삶 그 자체의 자연적 조건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동시에 노동계급의 사회적 조건이 되었다. 모든 삶은 노예이다(Omnis vita servitium est).”(p.175) 아렌트가 ‘노동’을 넘어서야 한다는 이야기는 순전히 인간 본연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근대가 도래하고 “‘생계유지’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과 무관한 모든 활동은 하나의 ‘취미’가 된다.”(p.185) 그렇기에 이명박 시대는 그야말로 근대적이라 말할 수 있겠다. “노동의 해방과 이에 뒤이은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노동계급의 해방은 비폭력의 관점에서 확실히 진보를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의 확대라는 관점에서도 그것이 여전히 진보인지는 덜 확실하다.”(p.186) 맑스는 이러한 일을 보고 오락가락한다. “맑스는 혁명의 목적은 이미 거의 성취된 노동계급의 해방이 아니라, 노동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p.187) 하지만 그의 기계론적인 경향은 현실 사회주의와 그 잔존태(소비에트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 중국, 북한)를 통해서도 볼 수 있지만 인간의 해방에 얼마나 많은 가치를 주었는 지에 대해 의구심을 받는다. “맑스가 죽은 지 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런 추리가 오류라는 것을 안다. 노동하는 동물의 여가시간은 오로지 소비에만 소모되며 그에게 남겨신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의 탐욕은 더 커지고 더욱 강해진다. 이들 욕구가 보다 정교해짐에 따라서 소비가 더이상 필수품에만 한정되지 않고 주로 사치품에 집중된다는 점은 이 사회의 성격을 변화시키기보다 오히려 이 사회의 심각한 위험을 은폐한다. 그 위험은, 종국에는 세계의 모든 대상이 소비와 소비를 통한 무화(annihilation)로부터 안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p.190) 베블렌의 말을 아렌트는 경청했다. 대안의 가능성, 호모 파베르? – 작업, 행위 아렌트는 아무래도 필연적인 삶을 (재)생산하는 노동보다 작업과 행위를 통해서 대안을 말하고자 했다. 물론 그녀는 아직 밝히고 있을 뿐 전망하지 않고 있다. 그 작업을 위해서는 일단 작업과 노동이 구분되어야 한다. “명확한 시작과 예상할 수 있는 분명한 끝을 가진다는 것이 제작의 특징이다.”(p.201) 그리고 모든 제작물은 “삶의 과정이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작자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으며 파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제작인은 군주이자 지배자이다. 그가 자기 자신과 자기 활동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p.202) 작업의 영역에서 인간은 노예가 아니다. 하지만 근대 사회에서 “필요한 도구의 자유로운 처분과 사용이 이제 노동하는 육체와 도구의 율동적 결합으로 대체되었”다. 맑스는 그것을 생산수단를 갖지 않은 것으로 말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육체의 자기통제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렌트는 미셸 푸코와 입장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기계로 생산을 계속하는 한, 기계의 과정은 육체의 리듬을 대체한다. …… 아무리 원시적인 기계라 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의 노동을 지도하며 결국 그것을 완전히 대체한다.”(p.205) “기술은 사실상 더이상 ‘물질적 힘을 확장시키려는 의식적 인간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차라리 인간 유기체의 내적 구조가 점점 더 인간의 환경으로 이식되는 인류의 생물학적 발전인 것처럼’ 나타난다.”(p.211) 여기에서 근대적 노동의 파괴성이 도출되고 생산수단을 노동계급이 점령한 현실사회주의 역시도 억압적일 수 없었던 이유가 설명된다. 근대는 이러한 기계화된 노동을 전면적으로 인간에게 훈육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인간, 즉 행위하고 토론하는 인간을 공론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데 열중했다.”(p.218) 모든 독재자들의 야망은 “시민들이 비생산적인 공론과 정치로 시간을 허비하지 못하게 하며, 동양의 전제군주제의 바자(bazaar)와 비슷한 가게들의 집합소로 아고라를 변형시키는 것이었다.”(p.219) 정치는 이렇게 붕괴된다. 광장에 대한 이명박의 공포 역시 이러한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공론의 장이 형성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회는 당연히 거수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어디 그런가?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과 프로타고라스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으며 만물의 척도가 신인가 인간인가를 결정할 필요도 없다. 확실한 것은 생물학적 삶과 노동의 강제적 필연성은 그 척도가 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제작과 사용의 실용적 도구주의도 그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p.234) 자기에 대한 통제를 기계에 맞추기 시작하고 정치의 영역을 상실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만물의 척도 역시 자본주의 근대가 생산해낸 가치에 의해 매겨진다. “자본주의 fuck!”이라고 책에 써 놓았다. 아직 되찾지 못한 정치-행위의 시대 자본주의 근대가 만들어놓은 노동과 사회의 패러다임에서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 만의 개성을 녹여놓을 만한 작업의 공간은 예술가에 한정되어 개방되었고 정치의 영역은 여러가지 이유로 폐쇄되었다. 기독교가 그리고 노동의 패러다임이 이를 선도하였다. 거기다가 플라톤적인 관조의 전통은 ‘활동’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박살낸 채로 봉합하지 않고 2000년을 지내버렸다. 하지만 인간은 활동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능성 또한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정치의 영역은 차이와 동등성에 의해서 담보된다. 인간 개개인의 차이가 없다면 이는 곧 동물이 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아니 사실 동물도 각각 개체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눈으로 구분하지 못할 뿐이다(2009/07/10 – [Reviews / Previews/Essays] – 공감으로 ‘발견’한 천재 앵무새- 알렉스와 나, 이렌느 페퍼버그, 2009, 꾸리에 ). 이러한 차이 덕택에 우리는 서로 말과 행위를 통하여 소통한다. “말과 행위가 없는 삶은, 문자 그대로 세계에 대해서 죽은 삶이다.”(p.237) 말과 행위의 세계는 생성의 세계이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선 우리는 혼자 골몰히 생각하는 것만으로 할 수 없다. 자신과 다른 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해야만 한다. “말과 행위의 이러한 계시적 성질은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서 또는 대항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곳에서만 전면에 나타난다. 즉 순수히 함께함에서 나타난다.”(p.240) 인간끼리의 소통이 필요하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모든 목적을 위해서 확실성을 제공하는 통계법칙과 확률의 지배적 가능성과 상반되게 발생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언제나 기적으로 위장하여 나타난다.”(p.238) 그리고 행위하고 말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세계와 교류한다. ‘내’가 존재한다. 그리고 옆에 타인이 있다. 각자의 인격적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도처에서 나타난다. “이런 바람의 좌절과 전쟁의 주체는 실제로 누구도 아니었다는 야만적 사실에 체념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무명의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게 했던 것이다. 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무명의 용사로 남게 되었고 또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업적은 박탈당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인간존엄을 약탈당했던 사람들이다.”(p.241)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잃고 국가에게 ‘무명용사’로 호명되었다. 인간의 행위가 온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시작과 끝까지 시종일관 장악해야 한다. “그리스어 두 동사 archein(‘시작하다’ ‘지도하다’, 마지막으로 ‘지배하다’)과 prattein(‘이루다’ ‘달성하다’ ‘완성하다’)에 상응하는 라틴어 동사는 agere(‘움직이게 하다’ ‘지도하다’)와 gerere(이것의 본래 의미는 ‘낳다’이다. 여기서 각각의 행위는 두 부분으로, 즉 한 사람에 의한 시작과 다수가 참여하여 일을 ‘실행하고’ ‘완성하며’ ‘완전히 이루어낸’ 업적으로 나뉘는 것과 같다. ….. 본래 행위의 두번째 부분인 행위의 성취만을 가리키던 단어가 행위 일반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반면 행위의 시작을 지시하던 단어는 적어도 정치적인 언어에서는 극히 특수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Archein이 특수하게 사용될 경우, 그것은 주로 ‘지배하다’와 ‘지도하다’를 의미하게 되었고 agere는 ‘움직이게 하다’보다는 ‘지도하다’를 의미하게 되었다.”(pp.250-251) “(행위는) 즉 통치자의 특권인 명령을 하는 기능과 신하의 의무인 이 명령을 수행하는 기능으로 분리 되었다.”(p.251) 이제 노예처럼 따르거나 혹은 공무원이 되어 지시를 받아서 집행하거나 행정부의 수반이 되어 지시하는 상황만 남게 되었다. 이는 베버의 관료제와 같은 맥락이다. ‘영혼없는 공무원’이 이런 식으로 탄생되었으리라. 우리는 정치를 생각할 때 국회를 떠올리고 ‘입법’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실 그리스의 정치체계에서 입법은 큰 가치부여를 받지 못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법률 제정자는 도시성벽을 쌓는 자, 즉 정치적 활동이 시작되기 이전에 일을 끝내야만 하는 자와 같다.”(p.256) 그들의 정치는 “예외적인 것을 일상생활의 평범한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었다(p.259). “행위는 자신의 진정한 의미, 막연하고 극히 연약한 의미가 파괴된다는 조건에서만 최종의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다.”(p.258) 이러한 정치의 공간이었던 폴리스의 박탈은 인간의 실재를 박탈당했음을 의미한다. 이명박은 그나마 생겼던 인간의 실재 광장을 박살낸 거다. <혁명론>에서 더 전개되겠지만 아렌트는 인민의 항쟁을 지지한다. “인민의 항쟁은, 거의 저항할 수 없는 권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이것을 ‘수동적 저항’이라고 부르는 것은 확실히 역설적 생각이다. 인민의 항쟁은 가장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행위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이 항쟁은 …… 오직 대량학살에 의해서만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승자조차도 패배자이다. 그 이유는 누구도 죽은 자를 지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p.263) “권력은 강자를 파멸하기 위해 약한 자가 함께 연대할 때 비로소 부패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부패하지 않는다. 권력에의 의지는 약자의 악덕에 속한다.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약자의 가장 위험한 악덕이다.”(p.266) 이명박이 하는 짓거리도 역시 이러한 두려움에 근거한다. “두려움은 오이혈 전제정치가 통치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선고하는 무능과 무상함 때문에(자신들에게 전제정치를 극복할 힘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다.”(p.265) 행위는 한국 사람들의 ‘겸손함’이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굉장히 오만하다. 행위는 오직 “위대성의 기준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p.268). 하지만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남이 따라할 수 없는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을 공적 영역에서 말과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기에 정치는 또한 위대하다. 그리고 사실 ‘겸손’의 탈을 쓰고 자신의 오만함을 위선적으로 행하는 경우를 얼마나 우리는 많이 보았는가? 노동조합 운동에 대해서 아렌트는 경계한다. 그리고 노동당 운동이 노동조합의 운동과는 갈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다수가 하나로 되는 이런 결합은 기본적으로 반정치적이다. …… 정치적 공동체의 함께함은 두 의사 간의 결사체가 아니라, 의사와 농부 간의 결사체, 즉 ‘일반적으로 다르고 불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결사체로 이루어진다.”(p.278) “노동조합은 사회를 대표하는 정치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사회개혁을 바란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지 않다.”(p.279) “그리고 노동계급의 정당은 거의 대부분 이해관계 정당이었으며 다른 사회계급을 대표하는 당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노동조합 운동과 인민의 정치적 열망은 일치할 수 없었다.”(p.280) “노동운동의 정치적 의미는 이제 다른 이익집단과 동일하다.”(p.283) 물론 우리는 노동운동 일반이 박살나는 2009년에 전혀 다른 시점을 맞이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렌트는 노동운동의 가능성과 의미에 대해서 부인하지는 않는다. “노동자의 실질적인 해방이 가지는 매우 중요한 부차적 결과의 하나는 전적으로 새로운 부문의 인구가 다소 갑작스럽게 공론 영역에 진입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공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p.281) 위에 언급했던 “예외적인 것을 일상생활의 평범한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실현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의 패러다임의 시대에 이러한 행위의 양상들은 여전히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 능력이 복원된다 하더라도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행위를 통해서 시작된 모든 과정들을 원상태로 복구하고 통제하는 능력은 여태껏 가진 적이 벗었고 앞으로도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p.297) 이제 지구도 위험해 졌다.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가? 여기서 아렌트는 예수를 언급한다. “인간이 알지 못하고 행한 것으로부터 서로를 해방시켜줌으로써만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로 남을 수 있다. 보복은 잘못에 대한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반동이고 행위과정의 환원불가능성 때문에 예상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용서의 행위는 결코 예견할 수 없다. 용서는 예기치 않은 형식으로 일어나는 유일한 반동이다.”(p.305) 영화 <밀양>과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른다. “그러므로 인간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구조적 요소는 인간은 처벌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없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처벌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근본악’이라고 부르는 죄이지만, 이 죄의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조차도 거의 알지 못한다.”(p.306) 근대 정치는 예측불가능성을 제거하려 했다. 이는 홉스의 불안함에서 출발한다. 정치와 행위의 영역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계약을 통해서 법의 체계를 확립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인간사의 예측불가능성과 인간의 신뢰불가능성을 그대로 내버려두며, 그것들을 단순히 매개체로 사용하여 그 안에 예측가능성의 섬을 만들고 신뢰성의 이정표를 세운다.”(p.309) 하지만 이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끝없이 변하는 존재이고 탄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멈춰있는 체계는 계속 새로이 탄생되는 인간에게 자유를 줄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완전히 억압할 수도 없다. 과학의 시대, 행위의 복권? 기술이 발달하고 공간제약은 점차 철폐되었다. 이는 도구 발명의 결과이다. “이 사실이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인간이 지구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고,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지구적 거주환경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소외되는 희생을 치르고서만 지상에서의 모든 거리 축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일반적 현상이다.”(p.316) 인간은 세계 소외를 겪게 되었다고 아렌트는 표현한다. “사회의 등장으로 인해 공론 영역과 사적 영역은 동시에 몰락하였다. 공적 세계의 잠식은 결정적으로 고독한 대중을 낳았으며, 근대의 이데올로기적 대중운동이 무세계적인 성향을 가지는 위험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공적 세계의 잠식은 세계에서 사적으로 소유한 몫이 구체적으로 보다 많이 상실되면서 시작되었다.”(p.322) 전지구적자본주의 시대를 아렌트는 세계 소외로 표현하는 것 같다. 인류사회는 등장하지만 “세계소외의 과정은 그것이 자체의 내재적 법칙을 따를 경우 보다 극단적인 규모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 나라의 시민이지 세계의 시민이 될 수는 없다.”(p.322) 정치의 영역에서 행위는 복권되지 않는다. 오히려 대안적으로 행위가 나타나는 영역은 자연과학의 영역이다. “갈릴레오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망원경을 사용하여 우주의 비밀을 ‘감각적 지각의 확실성을 가지고’ 인지할 수 있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영원히 파악할 수 없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불확실한 사변이나 상상력에만 열려 있던 것을 신체적 감관을 가진 지구구속적인 창조물의 범위 안으로 이끌어들였다.”(p.325) 이제 세계가 인간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객관적 성질 대신에 도구를 발견하며, 하이젠베르크가 말했듯이 자연이나 우주 대신에 인간 그 자신을 조우하게 된다.” 근대적 인식론의 한계는 언제나 자신들이 씌워놓은 ‘명징한’ ‘진리’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칸트가 오성을 동원해도 소용없었고, 헤겔이 ‘절대이성’을 동원하려 해봐도 사실은 그 밑바탕인 ‘기준’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간 외부의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찾으려 했지만 명백한 것은 그것이 자기 안의 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일 뿐 그것이 ‘객관적 진리’라고 보증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공리들은 수학적 질서로 살펴질 수 있었지만 근본문제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자연에 내재하는 아름다운 질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의 정신이 인식에서 감각을 능가하는 능력을 지녔거나 또는 진리의 인식기관으로서 적합하는 확증을 제공해주는 것도 아니다.”(p.333) 점은 실재하는가? 지동설이나 천동설이나 상이한 관점의 차이일 따름이다. “천문학의 관점에서 자연을 탐구하면 천체계를 가지게 될 것이고, 반면에 지구의 관점에서 천체를 탐구하면 지구중심의 지구계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p.353) “근대인의 세계소외가 현대철학의 주관주의와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것은, 철학자의 정신을 오래된 형이상학적 질문으로부터 매우 다양한 자기 반성들을 지향하게 한 것이 관념들의 자동적인 발전에서 자라난 힘이라고 믿는 것이다. (맑스의 말) 앞에서 말했듯이 관념이나 사건은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p.338) “과학자들은 너무나 바빠서 그 문제로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p.339) 데카르트의 회의는 강력했지만 그 만큼 치명적이었다. “존재는 매우 능동적이고 힘이 있다. 존재는 자신들의 현상들을 단지 이 현상들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창조한다. …… 어떤 기묘한 장치나 도구를 통해 이 힘의 작용을 발견한다기보다 포착한다면, 엄청난 힘을 가진 이 존재가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환상이며 이 존재의 현상들에서 이끌어낸 결론들도 반드시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 존재의 본질로 판명될 것이다.”(p.343) 데카르트 철학은 근대 전체의 악몽이 되었다. “확실성의 문제는 근대 도덕성 전체 발전에 결정적이었다.” “감각적으로 주어진 세계가 사라짐으로써 또한 초월적 세계도 사라졌으며, 동시에 물질적 세계를 개념과 사유를 통해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졌다.”(p.356) 데카르트는 박살났다. “우주는 표상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순수이성의 추리로도 알 수 없고 사유할 수 없다고 판명되면, 자기 정신 안으로의 인간의 도피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는 건 자기 자신 안에서의 사유일 따름이다. 오히려 근대를 구출한 것은 자연과학이다. “성공의 문제는 곧 실천의 문제였으며 이론의 검증은 곧 ‘실천적’ 검증이었다. 이론은 가설이 되었고, 가설은 성공할 때만 진리가 된다.” (p.345)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에 자신의 법칙을 부과하였던 것이다.”(p.354) “과학자는 실험을 하기 위해 가설을 세운 다음, 이 실험을 이요하여 그들의 가설을 검증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들이 가설적 자연을 취급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p.355) 이 인공현실은 마찬가지로 실재계는 아니다. 어쨌든 “관조와 행위 전도를 가져온 인간의 근본적 경험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정확히 인간의 지식에 대한 갈망이 그의 손의 재간을 신뢰한 후에만 진정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관조가 아닌 ‘행위’를 통해서만 진리와 지식은 획득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p.357) “첫째, 지식은 오로지 우리가 스스로 행한 것에만 관계한다. 둘째, 지식은 보다 많은 행위를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는 본질을 가진다.”(p.358) 아렌트는 논리 실증주의를 추인한다. 과학철학의 첫 번째 철학자라 말할 수 있는 카르납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플라톤의 세계는 전도된다. 먼저 “본래적 의미에서의 관조는 완전히 제거되었다.”(p.358) “객관적 진리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것만 인식할 수 있다는 확신은 회의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증명가능한 하나의 발견이 낳은 결과물이다.”(p.361) “철학이 조연 또는 그 이하의 역을 맡았던 것은 중세가 아니라 근대의 사유였다.” 이제 철학의 시대는 과학에게 뒤쳐지기 시작한다. “철학은 이 자연과학의 원리를 사후의 사실로부터 발견하고 이를 인간 지식의 본질에 관한 총체적 해석에 끼워 맞추려고 끈질기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은 인식론자가 되어 모든 과학 이론을 걱정하였다. 이것은 과학자에게 전혀 필요없는 일이었다.”(p.362) 둘 째, 과학자는 ‘행위’를 통해서 활동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리를 끊임없이 찾아간다. “과학자는 오로지 알기 위해서 만들었지 사물을 생산하기 위해서 만들지 않으며 그러므로 생산물은 단지 부차적 산물이다.”(p.365) 연구는 계속된다. 플라톤의 세계에서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고 과정은 그것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목적(최종생산물)의 의미는 전도되어 부차적인 것이 된다. 플라톤의 세계는 온전히 전도된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활동에 대한 관조의 우선성에 대항하여 이미 확립되어 있는 관조와 제작의 서열을 단지 뒤엎기만 했다면, 근대는 여전히 전통의 틀 안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틀은 제작 그 자체를 이해하는데서 강조점이 완전히 달라졌을 때 강제로 열려졌다. 강조점은 이제 생산을 이끄는 영속적 모델과 생산물로부터 제작과정에로, 사물의 본질과 생산되는 사물의 종류로부터 방법 및 생산수단과 과정의 문제에로 이동하였다. 관조는 이제 더이상 진리를 산출한다고 믿어지지 않으며, 활동적 삶 자체에서 가지던 지위도 상실한 까닭에 일상적 인간경험의 영역 내에 위치하게 되었다.”(p.372) 그러면 과학의 세계는 우리를 ‘행위’의 세계로 다시 밀어넣었을까? 거기에서 아렌트의 회의적 분석이 도출된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건 왜였을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복을 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전통과 공리주의가 동원된다. “삶의 원리가 그것이었다.”(p.380) “근대에서 삶이 궁극적인 준거점이자 근대 사회의 최고선이 된 이유는 이러한 근대의 전도가 기독교 사회의 구조 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p.382) “‘기쁜 소식'(복음)은 인간 생명을 당시 우주가 차지하고 있었던 불멸성의 지위로 끌어올렸다.”(p.382) “정치적 활동은 이제 필연성에 예속된 저급한 수준의 활동으로 추락하였다.”(p.383) “바울과 같은 이는 정치적 조직체의 정치적 삶을 개인의 삶으로 대체하였다.”(p.383) 사람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은 죽음이었고 이에서 구제시키겠다는 기독교의 신앙은 모든 나머지 것들을 상대화시켜버렸다. “살인자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끝낸자에게 기독교 장례가 치러지지 않았다.”(p.385)(물론 대한민국에서는 기독교식 장례를 치뤄준다.) 바벨탑의 예화는 ‘정치’를 하찮으면서 위험한 것으로 추락시켰다. “기독교는 노동, 작업, 행위가 현세의 필연성에 똑같이 예속되는 것으로 보았다.”(p.385) 예수의 전통과 바울의 전통은 상이하다. 예수의 전통은 ‘행위’를 추인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기독교라는 상황에서 근대는 “최고선이 세계가 아니라 삶이라는 가정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해왔다. 그리고 근대는 근본적 전도에 결코 도전하지 않았다.”(p.387) “활동적 삶은 관조적 삶 내에서 자신의 준거점을 상실할 때에만 이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의 활동적 삶으로 된다. 활동적 삶은 자신의 유일한 준거점인 삶에 구속되어 있다는 오로지 이 이유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노동하는 신진대사인 삶 자체는 능동적으로 될 수 있고 자신의 완전한 다산성을 펼쳐보일 수 있다.”(p.389) 삶의 필연성과 묶여있는 노동의 세계에서 그렇기에 탈출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행위는 곧장 생산과 제작의 관점에서 이해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이 관점에서만 이해된다. 근대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장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수동성의 상태에서 끝날 수 있다는 생각도 매우 가능성이 있다.”(p.391) “ 예루살렘의>밀양>혁명론>자본>인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