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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집 공장
8살 때까지(1989) 우리집은 부잣집이었다. 당시 살던 원자력 병원 앞의 공릉동 <한도 주택=""> 전체에서 두번 째로 포니2라는 차를 샀다. 아빠의 말을 종합해 보면 당시에 아빠는 한 달에 200만 원 정도는 벌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연봉 5천만 원은 넘었던 돈은 되는 듯하다. 아빠는 개집 공장 사장님이었다. 산업대 맞은 편에 가건물로 된 개집 공장을 생각하면 페인트 냄새와 물기를 머금은 각목들(사실은 목재일텐데) 냄새가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어느 비오는 밤 영철이 삼촌(친 삼촌이 아니고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이 끓여주었던 이백냥 라면 냄새와 빵냄새. 진흙 위에 쌓여있는 각목 냄새는 단팥빵 냄새와 비슷했다. 공장 안에 있는 단칸 방에는 영철이 삼촌의 <필승! 검정고시> 문제집이 있었다. 어떤 과목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낚시대와 물고기가 나왔던 그림이 생각난다. <물리>였을까?물리>한도>
개집 공장의 공정은 단순한 것이었다. 목재를 사다가 톱으로 적당한 크기에 맞춰 썰고 그것들을 망치와 못으로 조립하고 노란색과 파란색 페인트로 칠하는 것이었다. 페인트가 마르고 나면 니스를 발랐다.
유치원 때 나는 그 옆에서 남은 각목들에 못을 박으면서 놀았다. 지금도 망치질이 자신있는 것은 순전히 그런 이유다. 왠지 낯설지 않음. 우리집에 여전히 못이 많은 이유도 그 때 우리집이 개집 공장을 했기 때문이다.
한참 망치질을 하고 있다가 공장에서 개집을 배달하느라 바빠지면 아빠는 나한테 5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고 주택단지 앞에 있는 한도 슈퍼가서 초콜릿 하나 사다 먹으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초콜릿을 들고 아빠가 있는 공장으로 다시 가면 만들어진 개집들은 윤기사 아저씨의 봉고 1톤 트럭에 다 실려있었다. 난 아빠와 윤기사 아저씨 사이에 타서 아빠의 배달현장을 돌아다녔다. 종종은 봉천동 큰 아빠(아빠의 사촌)의 차로 다니기도 했다.
배달이 끝나면 아빠는 공장 앞에 있는 맥주집으로 윤기사 아저씨와 가곤 했다. 난 거기서 통닭을 먹었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건 그 켄터키 할아버지의 그 KFC가 아니다). 아빠와 윤기사 아저씨는 통닭은 거의 먹지 않고 맥주만 마시곤 했다. 아빠는 항상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통닭을 포장해서 엄마한테 갖다 주라면서 날 집으로 보냈다. 통닭을 들고 집에 들어가면 항상 엄마는 “아빠는?”하고 물었다. 엄마는 통닭은 동생과 나눠먹으라고 신문지를 깔고 펼쳐서 먹게 해주고 나가곤 했다. 아빠 찾으러. 엄마는 동네 스탠드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더 하고 있는 아빠를 잡아(?) 오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대리운전도 없을 때인데 윤기사 아저씨는 항상 그렇게 달큰하게 취해서 차를 몰고 집에 갔다. 음주운전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을 때여서 그랬으리라. 종종은 아빠와 엄마가 술 때문에 싸우는 것도 본 것 같은데, 그 때마다 엄마는 아빠 앞에서는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나한테는 “승훈아 뭐해! 빨리 가서 아빠 바짓단이라도 잡으라고!”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가 허리디스크로 몸져 눕고 집안의 가세는 기울었다. 아빠는 1년간 쉬었다. 영철이 삼촌과 엄마(엄마도 매일 머리 질끈 묶고 가서 똑같이 일했다)와 선희 삼촌(외삼촌)과 태동이 삼촌(지금 막내 작은 아빠)가 일을 했지만 아빠의 ‘영업’이 부재했기에 점점 공장은 쇠락의 길로 가고 있었다. 종종 엄마가 점심에 라면을 30봉씩 끓여서 공장 식구들과 나눠 먹을 때가 있었다. 난 안성탕면을 너무 좋아해서 엄마가 끓여내는 그 라면이 너무 좋았지만, 생각해 보면 라면의 빈도가 늘어갔었고 난 좋았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이 좋아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더 문제는 아빠가 아팠다는 것 말고 다른 데에도 있었다. 당시 플라스틱 개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마 88년쯤 부터였던 것 같은데 목재로 만드는 개집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시작했다. 플라스틱은 그냥 그대로 찍어내면 되는 것이었고 인건비가 별로 들지 않는 대형 공장의 상품이었으니까. 그에 반해 아빠 공장의 개집은 순전히 숙련 노동자 여럿이서 수공업 형태로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발달의 경로를 정확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요즘은 또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아빠가 그 개집 공장을 지금까지 했으면 힘들긴 했겠지만 요 몇 년전부터 불었던 ‘웰빙’ 바람 때문에 다시 공장이 흥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때의 그 단팥빵 같던 각목 냄새가 그리울 뿐이고, 영철이 삼촌 귀를 당기면서 졸라서 먹었던 이백냥 라면이 생각날 뿐이고, 엄마한테 통닭을 들고 걸어가면서 느꼈던 바람소리와 ‘슁~’하는 몇 안되는 차 소리가 아련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