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 김대중을 이해하기 위하여 – 김대중,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8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8점
김대중 지음/김영사

 PD저널 : <헨드릭스의 책="" 읽기=""></a>
2009/08/20 – [Reasoning/Current Issues] – 강원용과 김대중
2009/08/20 – [Reasoning/Current Issues] – 한 시대의 종언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2009/04/29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아빠의 ‘해태 타이거즈’와 나의 ‘LG 트윈스’ – 김은식,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이상, 2009</a></p> </td> </tr> </table>

정치인의 저작

한국의 정치인의 글을 읽었던 것은 고등학교 때 읽었던 <개나리 아저씨="">가 처음이었다. 물론 미국 대통령 들의 글을 읽은 적은 있다.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의 자서전들을 읽었다. 그건 순전히 영어공부를 위해서였고 그나마 부시 일당의 네오콘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싫어서 고민 끝에 고른 것이었다. </p>

한국의 정치인들의 글에 대한 신뢰가 없다. 우선 그들이 얼마나 글을 잘 쓸 수 있는 지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썼는 지의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마지막으로는 그들의 사상의 깊이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정동영의 글을 다 읽고 “다시는 정치인들이 쓴 글은 읽지 말아야지”하는 다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다짐이 무너진 것은 강금실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쓴 글이 확실했고 그녀의 생각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강금실의 글이 마지막이었다. 몇 년간 책을 1년에 100권 가까이 읽으면서도 정치인들의 글은 잡지 않았다. 돈을 버리는 것 같았다.

서른의 당신에게8점
강금실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콘트라스트 : 지식인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비

민주당이든 한나라당이든 정치인들의 ‘지적 능력’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나에게 그 기준은 자기 정치 철학을 명료한 한 권의 책으로 낼 수 있느냐 혹은 한 편의 완결된 논문으로 제출할 수 있는지이다. 그런 기준으로 볼 때 그나마 인정해줄 수 있는 것은 강금실 정도였고, 한나라당의 이한구 정도인 듯하다. 물론 아직 내가 잘 못 알아뵈었을 수도 있지. 노회찬과 심상정도 인정할 수 있는 지적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되면 노무현과 김대중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노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노무현이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가 자신의 정치철학을 공고하게 구축했다는 것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알고 하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를 노무현은 명백하게 보여준다. 김대중이 선택한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알고 하는 것’이었다면 노무현은 그냥 받아들였고 그에게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은 ‘모르는 것’에 가까웠다. “좌파 신자유주의자”라는 무지막지한 말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도 거기에 연유한다.

노무현이 좋은 대중 정치가였는 지에 대해서는 더 논쟁할 수 있지만 그가 ‘똑똑한 지식인’의 소양을 갖췄느냐고 묻는다면 거기에는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김대중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김대중은 이미 1955년에 사상계에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에 대해서 기고했고, 1970년에는 다시 사상계에 <70년대의 비전>을 기고했다. 1986년에 <대중경제론>, 1997년 <21세기 시민경제 이야기> 등을 출간하면서 한국의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다.(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5609.html) 책을 못 읽어서 다시 감옥에 가고 싶다는 것이 김대중이었다. 그는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와 ‘아시아적 가치’를 가지고 논쟁을 했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외치며 자본주의의 승리를 외쳤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에게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반박할 수 있는 지식인이었다. </p>

20대 초반의 김대중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김대중의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를 잡고 읽는다. 처음 이 책이 출간된 것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 패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 1993년이었다. 그 이후 1998년에 대통령에 당선되고 개정판을 출간했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현재 작업중인 새로운 자서전에 나오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김대중의 1998년 이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정희와 싸우던 시절의 심경은 마음을 짠하게 한다. “‘저들에게 협력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면 나를 죽일 것이 뻔한데, 그렇게 죽으면 나의 이 갈등과 고통은 누가 알아주겠으며, 그런 나의 삶과 죽음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 무참한 죽음을 당할 필요가 있는가.'”(p.44) 하지만 그는 한번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사후 공개된 일기장의 독재정권에 대한 일갈은 그의 그러한 신념이 죽을 때까지 지켜졌음을 보여준다.

“2009년 1월 16일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독재’냐 ‘민주주의’냐의 문제에서 김대중은 확고한 민주주의자였다. 대중의 저항이 독재를 결국에는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보편적 인권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했다. 그 밑바탕에는 화해의 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명백하게 실천했다.

 “그런데 정말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사형이 집행됩니다.
도조 같은 전쟁 범죄자에게는 교수형이 처해집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에게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실사회의 질서를 지키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로 이러한 일을 집행합니다.”(p.83)

“1992년
박정희 씨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나는 미루어 둔 숙제를 푼 것 같은 홀가분함을 느꼈습니다. 나를 가두고 사형선고를 한
80년대의 신군부 세력들에 대해서도 진상을 밝힐 것과 회개할 것을 촉구할 뿐, 그 밖의 어떤 보복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성격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나의 정치철학이 용서와 화해의 원칙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정치’는 용서할 수 없으나,
그 ‘나쁜 정치’를 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p.76)

김대중은 대중의 저항은 추인했지만 그것은 정치체에 대한 전복까지는였고, 개개 인간에 대한 복수심은 극도로 경계했다고 볼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경계했던 프랑스 혁명 식의 악순환의 패턴을 김대중도 경계한 것이고 이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영국은 1649년 청교도 혁명 때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습니다. 그 같은 정적에 대한 극한적 처벌과 보복은 극심한 혼란과 내분을 초래했습니다. 그 결과 크롬웰이라는 더욱 지독한 독재자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 정치 보복을 함으로써 입게 될 정치 사회적 후유증에 비하면 오히려 그 편(사면)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영국이 관용과 질서 속에서 의회 정치의 꽃을 피우며 순탄한 발전을 해오고 있는 것은 그 밑바탕에 바로 이와 같은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흐르고 잇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pp.76-77).

김대중은 50년 동안 축적되어왔던 극우파의 시대를 간신히 뒤엎을 수 있었다. 그것도 김종필과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다른 극우파 분파 하나가 더 필요했다. 거기에 이인제 효과가 없었다면 새로운 10년은 오지 않았었을 것이다. 수평적 정권교체는 그 만큼 쉽지 않은 과업이었다. 김대중의 ‘실리적 태도’가 항상 세간에 오르내리면서도 불가피했던 이유다. ‘노벨 평화상’, ‘6.15공동선언’등의 기반은 노무현 정부를 출범시킬 수 있는 토양이 갖춰졌음을 알려주는 징표였다. 김대중은 아무 것도 없이 정권을 잡았지만, 또 아들들의 부패로 레임덕을 맞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뒤집히지 않을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다. 거기에는 민주주의자 김대중의 정치철학과 정책이 있다. 그것이 2002년 대선에서 단일 세력으로 한국의 극우파를 처음 이기는 사건을 연출한 것이다. 노무현 효과 밑의 토양을 노빠들은 알고 있을까.

이택광은 김대중을 “한국 사회에 합리적 보수의 의미를 각인시키고 실천했던 인물”이라고 평한다(http://wallflower.egloos.com/1941620) 그렇다. 김대중을 ‘친북좌파’라고 평했던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수구 꼴통’임은 외신을 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대중은 보편적인 기준에서 볼 때 보수주의자였다. 그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선들이 ‘사회안전망’에 대한 정책을 실천하게 한 것은 맞지만 1990년대 이후의 김대중의 정책은 ‘좌파’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블레어보다도 더 우파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김대중과 노무현의 시대가 끝났다. 그나마 ‘개념잡힌 우파’의 시대와 ‘선상님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절정’이 끝나고 명박시대가 도래한 셈인데. 여러가지 측면에서 대안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논의가 필요한데 여전히 논의는 ‘결집하라’라는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무엇을 위한 연대인지에 대해서 ‘독재정권 타도’ 식의 감성에 매달리고 있다. 이명박이 서있는 지반은 박정희와 다르다. 이명박이 보여주는 스펙타클의 뒤에는 박정희 식의 확고한 토대가 없다. 이명박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 과잉된 공포들이 오히려 이명박이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고전적 구도에서의 ‘독재/민주주의’론은 김대중의 시기에 종료했고, 그 프레임 바깥에서 현재 이명박의 정책은 진행된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개혁세력’은 선상님의 유지를 잇기는 커녕 여전히 무조건 모이면 장땡이라는 식이다. 어떤 디테일을 가지고 합종연횡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포스트 DJ’, ‘포스트 노무현’의 전망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전멸이다. 새로 펼쳐진 이명박의 시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가. 책을 못 읽어 감옥에 가고 싶어했다는 그들의 선상님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찾을 때라는 말이다. 한국의 철지난 ‘민주개혁세력’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신들의 능력을 보고 싶다. 김홍일에게 한 말이 당신들에게도 해당되는 듯하다.

“너는 아버지의 정치와 삶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배운 것을 모두 너의 것으로 만들어야지 내 흉내나 내고 있어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 너는 너로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p.172)

다른 한 편으로 1970년대 이전의 ‘급진적 민주주의자’ 김대중을 발견하는데 그의 사회민주주의적인 경제정책과 대중의 변혁능력에 대한 신뢰를 보면서 그 때 그가 집권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멈추기 어렵다.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