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매혹하는 상상력의 원천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주경철 옮김
<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60 align=center>
<TD style=”TEXT-ALIGN: left; PADDING-TOP: 10px” id=htmlRenderResult align=middle>
<DIV class=ttbReview>
<IMG border=0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8932452512_1.jpg"> |
</DIV></TD></TABLE>
<TABLE style=”BORDER-COLLAPSE: collapse” cellSpacing=1 cellPadding=1 width=600 bgColor=#d6f3f9>
<A title="[http://leopord.egloos.com/4220451]로 이동합니다." href="http://leopord.egloos.com/4220451" target=_blank>leopord의 유토피아 서평</A></TD></TR></TBODY></TABLE>
<FONT color=#112a75>방학 세미나, 마지막 책 : <유토피아></SPAN></FONT></STRONG>
</p>
방학 동안(나한테는 제대 후 입학 전) leopord와 학교 후배 한 명과 <고전 읽기=""> 주제로 세미나를 했다. 한나 아렌트를 읽다가 한 달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으면서 마무리를 했다. 세미나 자체에 대한 평가는 나중에 하겠지만 어쨌거나 쉽게 잡지 않을 책들을 읽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다.
</p>
이번에 읽은 <유토피아>는 주경철 선생의 번역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대학교 4학년 수업 시간에 읽은 적이 있다. 전체사로서의 자본주의를 조망하는 브로델, 그리고 그의 논의의 연속선상에서의 월러스타인을 읽으면서 브로델을 한국에 소개시킨 주경철 선생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p>
보통 고전들에 대해 맑스의 <자본> 같은 방대한 분량이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같은 난해함 때문에 읽기 어렵다고 마음 먹기 쉽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소설책처럼 쉬이 읽히고 분량도 적다. 그리고 보통 주석들의 압박 때문에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에 대해 난독증을 일으키기 십상인데 주경철 선생의 주는 정말 친절한 해설이고 뒤에 달려있는 <참고자료>가 굉장한 도움이 된다.
</p>
<FONT color=#112a75>매혹하는 상상력의 원천 <유토피아></FONT></STRONG>
</p>
범죄에 대한 유토피아의 관점도 혁명적으로 전복되어있다. 범죄자에 대한 처벌(푸코의 전근대)에서 범죄에 대한 예방적 조치를 언급하는 것은 근대의 도래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범죄자의 의도를 추정하는 것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나왔던 근대적 훈육질서의 측면에서 언급된 바 있다. 이제는 범죄자의 머릿속으로 마음으로 들어가 그를 처벌한다. 또한 공리주의적으로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느니 노동을 형벌로 주는 태도는 한나 아렌트가 보여주었던 고대 그리스의 노예를 떠올리게 되며, 필연에 얽매이게 살게하는 처분이 다른 사람들의 우월함을 확보할 여지를 주는 것을 보여준다. 필연성의 노예가 있는 덕택에 나머지 자유인은 자유롭다. 그리스적인 태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신학의 시대가 끝나고 도래한 인문주의의 시대에서 가톨릭 사제였던 토마스 모어도 그리스 전통의 손을 들어줌을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인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p>
<유토피아>를 통해서 이야기할 거리들은 굉장히 많은 듯하다. 움베르토 에코를 읽었던 leopord의 이야기들이 <유토피아>를 당대의 지식인들의 ‘근사한 구라’라고 하는 것도 굉장히 매력적인 시선이다. 다만 <유토피아>의 도덕에 대한 관점들이 ‘금욕’에서는 벗어나고 당대 중세 기독교의 ‘마녀사냥’의 패러다임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쾌락에 대해서 에피쿠로스 학파의 ‘아타락시아’ 수준에서 규정짓는 것들을 볼 때 아직 더 꿈꿀 것이 많았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을 두려워하진 않지만 여전히 ‘절제’ 혹은 ‘제약’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여전히 그 때는 기독교가 절대적인 시대였으니 말이다.
</p>
이러한 꿈을 꾸던 토머스 모어가 기껏 이혼을 위해 종교를 버리려는 헨리 8세에 반대하다 참수당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정말로 책 속의 모어의 입장이 진짜 모어의 입장이고, 유토피아를 설명하는 히슬로다에우스의 입장을 가진 사람이 따로 있었을 지는 모른다. 물론 구라일 수도 있겠지만. 완벽하게 읽어낼 수는 없고 우리는 아이디어들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모어를 차용했는 지를 바라보는 일이 재미있을 듯 하고, 에코처럼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하다. 우리 중의 멤버 한 명은 인간의 본성을 통해 공산사회가 가능한 지를 탐구해보자고도 했다. 모두 굉장히 재미있는 탐구가 될 듯 하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 : 1478 – 1535)
<유토피아>의 본문 중 토머스 모어가 만난 히슬로다에우스의 이야기(사실은 모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의 상상은 맑스의 입을 통해서, 종종은 애덤 스미스의 입을 통해서 또는 로버트 오웬 같은 이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대안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이에게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매혹하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 모어가 읽었던 원천들은 정말로 유럽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는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시>과 플라톤의 <공화국>과 성서의 이야기가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읽으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노동, 작업, 행위’의 개념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고 자유의 두 가지 속성(freedom vs liberty)에 대해서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최소한의 필요를 위한 노동을 하는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나머지 시간을 교양을 쌓는 데에 할애한다. 한나 아렌트의 ‘행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 순간에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자유롭다.
</p>
유토피아의 지도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자원이 공유되고 자신들의 물적 필요를 넘어선 모든 사치라는 것이 없다. 외국의 사절이 화려하게 치장하고 귀금속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유토피아의 사람들은 외국의 사절이 대동한 하인에게 절한다. 유토피아에서 귀금속(금/은)을 두르고 있는 것은 죄인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