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들의 폭동 – 주원규, 열외인종 잔혹사, 2009

PD저널 : 헨드릭스의 책읽기

열외인종 잔혹사10점
주원규 지음/한겨레출판

며칠 전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한 논문을 읽었다. 과세의 대상도 아니고 특별한 징벌도 없지만 그를 누가 죽여도 유죄가 아니다. ‘발가벗겨진 생명’ 호모 사케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주위에 이미 수 많은 오다쿠들과 히키코모리 집단, 노숙자, 학교를 다니지 않는 10대, 또 70넘어서 군복을 입고 우익 데모에 동원되는 할아버지들. 수많은 사람들이 눈 앞에 ‘발가벗겨진 생명’으로 느껴졌다.

주원규의 <열외인종 잔혹사="">를 읽으면서 다시금 ‘발가벗겨진 생명’을 찾아낸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부류의 인간군. 70kg이 나가는 체형 때문에 토익/토플, 자격증, 인턴경력, 어학연수경력 등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윤마리아는 외국계 제약회사의 인턴 사원이다. 정규직 전환 대상자 발표일 전날. 그녀는 죽으라는 거 말고 뭐든 지 할 수 있는 상태다.

스물여덟 살의 미혼인 그녀의 전공은 정치외교학이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에서 학교나 전공이 무슨 상관일까. 그녀 역시 ‘이태백’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모두 실천한 여자다.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일도, 철마다 토익, 토플 시험 보는 일도, 국가 공인이든 민간단체, 협회 주관이든 가리지 않고 소위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자격증 시험을 죄다 치러낸 결과가 이렇듯 외국계 제약회사 인턴사원 자리인 것이다(p.15).

노숙자 김중혁은 자신의 냄새를 못 느낄 정도로 ‘악취’에 쩔어있다. 처음에 서울역 광장에서 하루를 아무것도 안 하면서 버티는 것은 그에게 고문이었고 시간은 정말 더디게 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하루는 모두 똑같은 하루이고 멍하니 보내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고 세상이 부과하는 것과 상관없는 그의 삶은 그냥 매일 똑같다. 그는 맛있는 밥을 주는 봉사단체를 찾아다니는 의욕을 갖춘 오광록이 신기할 따름이다.

5년째 지속된 노숙자 생활. 처음 2년은 시간이 그처럼 더디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차라리 소주 세 병 시원하게 몸속에 들이붓고 그대로 지옥행으로 돌진했으면 싶던 체념과 좌절의 악다구니가, 놀랍게도 2년이 지난 뒤부터는 그 나름의 초연함으로 대치되었다.

 목적도, 이유도 없다. 보이는 건 지하철이요, 사람이요, 건물이요, 계단이요, 소주병일 뿐이다. 광록의 표현을 빌리면, 노숙자들이 이러한 상태로 몰입하는 것은 적멸의 경지였다. 뇌의 모든 기능이 멈춰버리는 경지, 생각이란 게 더는 필요 없게 된 상태. 그 경지에 이른 것이 바로 지금의 김중혁이다(pp.22-23).

우익 단체 데모에 나가는 참전 용사 장영달, 그리고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양갱 몇 개를 “뽀려다” 주는 여자친구 돌순에게 “이 씨발년”을 외치면서 질펀하게 다양한 체위로 섹스를 하는 10대 노랑머리 남자 아이 기무. 기무는 PC 방비가 항상 없기 때문에 화장실 창문을 통해서 도망칠 구멍을 찾아다니곤 한다. 그에게 수치 같은 말은 없다.

모두가 각자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기무는 온라인 FPS 게임 사이트에서 사이버 머니 20000포인트를 준다는 말에 총을 들고 코엑스로 향하고, 윤마리아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부리라는 상관의 말을 듣고 ‘쉽 헤드 카니발’(sheep head carnival : 양머리 카니발)에서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대표 ‘론’을 만나기 위해서 코엑스로 향한다. 김중혁은 단속반에게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 도착한 역이 삼성역이고, 장영달은 윤마리아 회사 약의 테스터가 되어 7만 원의 알바비를 받으려고 코엑스로 향한다. 우연적인 만남은 아비규환을 연출한다.

주원규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모두가 우리 시대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얄팍한 이기심을 잘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도덕, 윤리 따위가 이미 작동하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놀라지 않지만 그들의 적나라한 행태라는 것들이 단순히 잔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해 무기력함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살육의 카니발이 끝난 후, 그들의 이야기는 신문과 방송에 나오지 않는다. 어디에도. 그들은 ‘비존재’이다. 누구도 그들의 생존과 죽음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사실상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지만 순간순간을 관통하는 호흡은 굉장히 빠르고 긴박함이 느껴진다. 마치 <스페셜 포스="">의 한 캐릭터를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주원규가 총신대 신학대학원(신대원)을 나온 것도 재미있다. 그래서 이교(異敎)에 대한 디테일을 잘 꾸몄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상황에 대한 질박한 묘사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뭐 물론 명계남도 신학생이긴 했다.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발언권이 없는 자들에게 사실상 무서운 것은 ‘먹고 사는 것’ 뿐이다. ‘먹고사니즘’만을 내장한 인간들에게 잔인함은 그냥 ‘귀찮음’이 될 따름이다. 수십 명을 총으로 사살하면서도 그것이 게임인 줄 아는 기무는 최근의 서민들의 잔인함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먹고 살려면 뭔 짓을 못해”가 이제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지 않나.

코엑스 폭통의 장본인인 양머리들은 ‘혁명’을 말하지만 기껏해야 그들이 하는 일은 70kg이 넘는 ‘비만’ 여성을 사살하는 것과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죽이는 일이다. 자코뱅적인 똘기는 있지만 거기에 ‘혁명의 순수함’ 같은 건 없다. 그들이 꿈꾼 세상은 아무래도 유토피아는 아니었을 듯하다. 자신들의 세상에 대한 보복이 아니었을까. 나머지 인간들은 그저 “똥 밟았을 뿐”이다. 그리고 똥 밟은 인간들은 그게 정말 그냥 재수없는 상황임으로 정확하게 인지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그 상황에 처한 이유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궁리만 생각하게 한다. 진짜 실용주의 말이다. 장영달도 윤마리아도 기무도, 김중혁도……

본 만화는 내용과 크게 상관 없음

사실 곰곰히 생각하면 섬뜩한데 소설을 잡고 있는 동안은 엄청난 속도로 사람들의 시선의 이동과 장소의 이동에 몰입하게 된다. 코엑스에서 어느 날 정말 좀비들의 폭동이 일어나게 될 건가?

열외인종 잔혹사10점
주원규 지음/한겨레출판

그리고 ddibo님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