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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실어증 : 2PM 재범 사건을 떠올리다
시작은 마이스페이스의 2PM 박재범의 글이었다.
동아일보 : ‘2PM’ 재범 “한국 역겨워…美 가고싶다(9월 5일)(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909050188)
1. 지식인들의 ‘겉도는 말, 헛도는 분석’
득달같이 네티즌들이 몰려들었다. 사실 어떤 네티즌들인 지에 대한 분석과 상관없이 그들은 전체 네티즌들의 대의를 업었다. 물론 이러한 범주화는 황색 저널리즘이 만들어 낸 것이다.
담론은 그 대상이 실재하는 지와 상관없이 형성될 때에 효과들을 만들어낸다. 담론의 기준은 배제와 포섭의 메커니즘을 발생시킨다. 세상에는 ‘한국이 싫다는 새퀴’와 그것에 반대하는 애국자들만 놓이게 되었다. 회색지대는 소멸했다. 회색의 공간에서 말하는 부류의 인간들은 넋나간 좌빨, 즉 담론의 공간이 없는 비존재가 되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번 현상을 파시즘으로 규정하고 바라보는 것은 적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지식인들의 대화법이다. 이 현상을 바라보는 진보진영의 식자들은 여전히 ‘가르치려는 태도’로 대중을 바라보고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를 계도하면,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이해를 가르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시선을 재범에게도 가르친다. 이건 윤리싸움이 되는 것일까? 문제는 헛다리를 짚었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김갑수의 글의 제목은 전형적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 22세 청년을 쫓아냈다” 여기에는 대중을 바라보는 식자들의 프레임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지식인들의 담론으로 이것을 진단해보겠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담론은 대중의 현상을 이미 구성된 지식체계(민족주의/파시즘/대중)의 범주로 나누고 자신들의 말을 통해 ‘대중’을 그 범주 어딘가에 배치하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고 ‘파시즘’의 주체는 누구이며 임지현의 ‘우리 안의 파시즘’이 지칭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리고 심지어 김갑수는 재범을 가르치고 있다. 파시즘의 역사를 강의하고 계신다. “겉도는 말, 헛도는 분석”이 벌어지고 말았다. 대중은 분노하여 독을 뿜어내고 있는데 식자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말로서 대중을 진단하려 한다. 대중과의 대화는 없고 지식인들끼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2PM 재범에 대해 논하려면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와 임지현의 <우리 안의="" 파시즘="">을 읽어야 하나? 아니면 자신의 요약판 버전을 읽어야 하는가? 그게 싫으면 다 파시즘의 바이러스에 감염 되는 것인가?우리>파시즘의>
이러니 대중과 소통이 될리가 없다. 우리편과 함께 합리성의 아성을 쌓아보겠다는 건가? 그러기엔 너무 초라한 우리의 행색을 윤리로서 자위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차라리 변희재의 <박재범과 네티즌에="" 책임="" 몽땅="" 떠넘긴="" JYP=""></a>만도 못한 글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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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중의 실어증과 꼰대들의 꾸짖음
그렇다면 대중은 도대체 왜 분개한건가? 그 지점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한 발언일까? 대중이 다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왜’에 있다. 어떤 지점에서 도대체 대중이 열이 받고 어떤 지점에서 분기하는 지 말이다.
“나는 한국인이 싫어, 돌아가고 싶어~”, “여기 사람들은 내가 랩을 잘 못하는데 잘한다고 생각해. 멍청이 같아”이라는 말에 도대체 왜 대중은 분개했을까? 그것은 민족주의 담론과 파시즘에 대한 분석으로 오롯이 정리될 것인가? 짜놓은 각본 안에 대중을 끼워맞추는 시도가 적실했던 것들은 그 각본이 현실에 정합하는 이론일 때에만 가능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지금의 진보진영의 식자들은 읽어내고 있긴 한건가?
군대 가기 싫어하는 남성들의 심리와 동시에 군대를 뺀 남성에 대한 극한적인 분노, 또한 군대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도 여성의 시선에서 이루어지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마초들의 궐기를 민족주의로 읽어낼 수 있는가. 군대의 주체형성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왜 입을 싹 닫는가. “외국인 근로자는 꺼져라”라고 말하는 맥락은 순전히 파시즘의 징후라고 선언함으로써 접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파시즘을 이해시키고 민족주의를 가르친다하여 그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을까.
민족주의를 말하고 파시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대중이 그러한 실천을 말하고 있는 지를 선명하게 보이고 그 약한 고리에 대해서 대안적 접근을 하는 것은 아닐까. 대중의 불안한 구조에 대해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쉽게 선동에 휩싸이는 구조에 대한 구체적 접근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려 맞는 것은 민족주의고 파시즘이라는 거대담론 안의 하나의 카테고리일 뿐 그 안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대중의 모습의 결절점들은 묘사되지 않는다.
대중은 자기언어를 잃고 매스미디어와 학교 교육을 통해서 습득한 말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실어증 상태이다. 자신의 말을 적실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20대는 취직이 안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스펙 쌓기’ 신공을 “날 살려줘” 대신 말한다. “토익 몇 점 자격증 몇 개, 사회봉사 몇 시간, 인턴 몇 번 어디에서 했어요.”라고 말하는 표현 때문에 스펙 쌓는 20대를 욕하는 것는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그 밑바탕에 깔린 문제를 짚어주는 게 지식인이 할 일 아닌가. 자신이 쌓아올린 지식의 아성을 지키기 위해서 “20대 니들은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김용민과 같은 표현의 향연이 펼쳐진다.
“나 지금 열받아”를 “2PM 박재범 그 새끼는 매국노야”라고 말하고 있을 때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열받은 대중의 구조일까, 아니면 ‘매국노’라는 민족주의적 시선에 의한 표현일까. 문화연구자의 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판의 날은 허공을 찌르면서 괜시리 푸념만 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비판 바깥에서 구축해야할 구체적 대안들에 대한 제출이 방기되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