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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도는 이론, 헛도는 삶을 벗어나기 위한 지도 – 조한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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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과 남성 – ![]() 조혜정 엮음/문학과지성사 |
처음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그 때는 정치학을 공부하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익힌 학문은 잘 세워진 체계의 분류법으로 내게 다가왔다. 정치학의 분류를 익혔고, 그 결이 너무 나를 옥죄는 것을 느꼈을 때 맑스주의의 체계를 익혔다. 맑스를 읽는 방법이 정해져있었고 그 방법을 대안으로 익혔다. 내 궁금증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기성의 체계에 맞춰서 생각하는 것에 곧 익숙해졌다. 대안적 접근은 매력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했으나 역시 그 나름의 접근 방법에 나를 맞추게 하는 구속복 같아보였다. 정치학 방법론 수업을 들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특별한 방법론적 논의는 없었고 SPSS로 대표되는 통계를 돌리는 방법을 익혔다. R2의 값이 1에 가까워질수록 상관성이 높을수록 내가 보고자 하는 변수들의 관계는 더 유의미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정치학자들은 본인들 스스로 알면서도 그 상관성이 높다는 것으로 인과관계를 무의식적으로 도출하곤 했다. 거기엔 깊은 심연이 있었다. 난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대학교 1학년 여성학 수업을 들었던 시점을 떠올린다. 젠더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모르겠고, 양성평등의 관점과 사례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크게 기억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 급진주의적 페미니즘, 맑스주의적 페미니즘, 사회주의적 페미니즘. 시험을 위해서 외웠던 페미니즘의 입장들이 떠오를 따름이다. 그리고 하나 더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와 자신의 구체적 문제의식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늘 상 겉돌았다. 내게 내 주위의 모순이라는 것들은 내가 배운 학문의 방법들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맑스의 이론에, 그람시의 이론에, 들뢰즈의 이론에, 네그리의 이론에……. 그 이론 틀로 구성된 거시적 세계는 나에게 언제나 명쾌한 결론들을 주곤 했지만 그 결론들이 내가 부딪히는 구체적 모순이라는 것에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미지수다. 겉도는 이론, 헛도는 삶. 구체적으로는 헛도는 나의 공부(여기서 공부는 몸과 마음의 수양을 말한다).
군에 있을 때 내 주장 글을 쓸 수 없었다. 3년 동안 내가 털어놓을 수 있는 글은 언제나 신변잡기에 관한 것이었고, 답답함을 풀기 위해 책을 읽으면 반드시 서평을 썼다. 이는 물론 완결된 형식의 서평은 아니었다. 내 주장을 할 수 없으므로 남의 주장에 빗대어 내 이야기를 곁에 은연중에 숨기는 방식을 택했다. 생각해보면 숨긴 주장이라고 해봐야 “난 좌파다.” 혹은 “난 이명박 정권이 타도되어야 한다고 본다.” 정도였으니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내 감성을 망가뜨리기 싫었고, 군이 대놓고 또, 숨기면서 내게 강요하는 군인의 신체와 정신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의 글쓰기를 선택했다. 책 읽기의 방법도 바뀌었다. 군 복무 전의 책읽기에서 나는 언제나 균형 잡히고 객관적인 독자의 위치에서 책을 읽으려 했다. 거기엔 내가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가 크게 녹아들 여지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채택한 가장 합리적이라고 가정되는 이론의 틀을 가지고, 읽어내는 텍스트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지지하거나를 반복했다. 하지만 군 복무라는 상황에서의 내 글쓰기는 변했다. 난 내 이야기가 하고 싶었고 내가 읽어낸 그 책과 나의 경험을 언제나 엮으려 했다. 그러한 글쓰기가 3년을 겪은 후, 다시는 객관을 가정한 글쓰기를 하기 싫어졌다. 그렇다고 다시 당파성에 입각한 글쓰기를 맹목적으로 따라갈 수도 없었다. 내 이야기에는 언제나 이론의 결이 묻어있었을 테지만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면서 그 결을 따라가고 내가 겪은 일들과 생각들을 엮어 책에 대한 생각을 적어내려 했다.
『한국의 여성과 남성』을 읽는다. “궁극적으로 여성 해방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억압당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스스로 통제하는 경험 주체자의 시각에서 자신의 경험을 표현 · 설명 · 성찰할 수 있고 공유된 경험에 근거하여 역사를 변화시켜나가는 상태이다.”(p.24) 개인의 체험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사회과학(여기에는 분명 젠더편향이 있다.)은 도구적 합리성에 입각하여 그것에 포섭되지 않는 대상들을 주변화 시킨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엄밀하게 구분하고 사적 영역의 것들을 직접적으로 무시하기보다 ‘넘나듦’을 차단한다. 여성에 대해 특별하게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대신 여성들의 문제가 공적 영역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빗장을 걸고 진입장벽을 쌓는다. 초창기의 여성들은 직접적으로 ‘사람이 아닌 존재’로 인지되었지만, 근대가 도래하면서 점차 이러한 ‘넘나듦’에 대한 통제의 방식으로 젠더의 문제는 은폐되어왔다. 그렇기에 개인의 체험들, 아주 사적인 영역의 메시지가 학문의 영역에 공적으로 개입되는 것은 충분히 전복적일 수 있다. “대안적 해석 체계를 제시하는 작업을 통해 혁명은 이루어진다.”(p.37) “이러한 억압은 개인의 의미체계와 초개인적인 억압 구조가 일치하는 한 지속되므로 여기서 ‘진실’의 효과가 재생산되는 구체적 영역의 분석이 중요한 작업으로 대두되는 것이다.”(p.38)
논의는 따라서 한국의 젠더의 문제가 발생하는 영역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이어진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 이게 과연 80년대의 복판에 나온 이론이란 말인가? 푸코와 데리다가 나오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그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선도적인 인식론적 전환과 방법론적 열림이 있다.
전문직 활동을 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1980년대의 상황에서 40대 이상은 예측으로 일관되게 한국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가정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예측과 상관없이 그들은 세대에 따라서 다층적으로 자신의 일과 가족의 문제를 이해했다. 엄마의 이야기를 생각해 본다. 엄마의 세대는 “세 번째 세대”이다. “일을 쉬면 퇴보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있”는 엄마가 떠오른다. 나에겐 점심 도시락을 종종 빼먹고, 학교에 상담하러 올 수 없는 엄마였지만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언제나 주어진 사회 활동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임했던 엄마를 구성된 집단의 한 명으로 발견한다. 독립된 주체인 엄마를 받아들이는 아빠의 사회화 과정을 떠올려본다. 겉옷을 벗겨주는 것과 양말을 벗겨주는 일을 당연스레 생각했던 아빠는 가사분담이 필연적이 된 순간부터 밥을 짓고 몇 가지 찌개를 끓일 수 있게 되었고 빨래를 할 때 세제의 양과 피존의 양을 잴 줄 아는 사람으로 변했다. 아빠는 엄마의 친구가 되었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데에는 처해진 경제적 상황 말고도 16학년을 이수한 고등교육의 경험자라는 면이 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내 일상과 이론들을 적용시켜본다.
다른 한편으로 제주도 해녀사회의 사례가 흥미롭다. 용섬 사람들의 사례는 사회경제적 원인과 정치적, 문화적 원인이 다층적으로 개입해있고 그 변동에 있어서 한국사회가 경험했던 압축 근대의 전개과정이 걸려있다. 밭농사 중심의 농업구조는 남성의 노동을 주변화시켰고 남성은 경제적 헤게모니를 쥐지 못했다. 남성은 제례에서의 독점을 통한 이데올로기를 장악하지만 사실상의 여성과의 ‘양편 비우세의 사회’를 형성한다. 경제활동의 주를 차지하는 해녀들의 1차 노동이 그러한 결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온전한 근대 이후에 맞이하는 ‘양성평등’과는 거리가 있다. 공고하게 구축된 것은 아니다. 압축근대의 과정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양편 비우세의 사회’를 붕괴시킨다. 근대교육의 확산과 직업윤리의 변동, 경제구조의 재편은 남성과 여성들의 권력관계를 역전시킨다. 고학력을 획득한 여성들은 해녀일을 기피하고 그것은 동시에 문화적 차원이다. 이명랑의 소설 『삼오식당』에서는 영등포 시장 상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사실상 시장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얻는 생선가게 주인은 언제나 과일가게를 하나 열기를 소망한다. 그 이유는 경제적이지 않다. “고상한” 과일장사가 자신의 품격을 높여 주리라는 믿음이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해녀들의 생각도 거기에 맞닿아 있다. 또한 중앙에서의 지방을 배려하지 않는 정책들은 공적영역을 통한 개발과 산업재편을 장려하고 거기에서 공/사영역에 대한 준거기준이 다른 여성들은 주변화된다. 권력은 역전된다. 개개의 지방의 구체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개발과정은 언제나 인간의 서식지를 파괴한다. 그 파괴는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대하는 태도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미 구획 지어진 전제에서 시작할 것인가 부딪히는 현실에서부터 찬찬히 성찰할 것인가. 양자가 모두 필요할 텐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구체적 사례를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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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과 남성 – ![]() 조혜정 엮음/문학과지성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