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서 쓴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마라, 낮은산, 2009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10점
엄기호 지음/낮은산

 2009/09/14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겉도는 이론, 헛도는 삶을 벗어나기 위한 지도 – 조한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
2009/09/06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감응적 개념 – 조한혜정, 글 읽기와 삶 읽기 1

<88만원 세대>, 책을 사기, 억울한 책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를 출간하려 했을 때 2가지 상황이 놓여있다고 판단했단다. 하나는 2,000부 판매, 다른 하나는 10만 부 판매. 물론 사후적 해석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이유가 있다. 사회과학의 전통적 독자층을 2,000명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사회적 현상이 된다고 하는 지점을 10만 부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그 사이 중범위에는 시사에 관심이 있는 386 세대와 대학생들도 있을 것이다(그들까지 읽으면 강준만처럼 1~2만 부 팔리는 책이 된다).

그런데 책을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선택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책을 ‘찾아서’ 읽는 사람과, 서점에서 ‘집어서’ 읽는 사람을 볼 때 ‘집어서’ 읽는 사람은 고려하는 것이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일단 책 표지를 볼 것이고, 제목을 보고, 저자를 확인한 다음, 출판사를 보는 경우는 좀 드물지만 있다 치고, 그 다음에 내용을 훑어보거나 목차를 볼 것이다. 그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책의 구매가 결정된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야말로 ‘읽을 만한’ 책이지만 그 만큼은 ‘안 팔린’, 그리고 ‘안 팔리고 있는’ 책이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억울한 책이다. 책 제목의 문제일까. 출판사의 문제일까. </p>

지식인으로서 사회과학자

지식인으로서 사회과학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회과학자는 무엇일까? 자신의 프레임으로 자기가 연구한 것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으면 된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매체로 전달할 수 있으면 된다. 두 차원이 필요할 것이다. 직접 뛰면서 현장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해 개념화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기존의 논의들을 잘 정리하고 그것을 통해서 현상을 구성해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두 가지에는 위계가 없다. 어느 쪽에서 시작하든 결국 만나게 되어있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가든, 추상에서 구체로 가든 결국 가긴 가야한다. 맑스의 방식이든 헤겔의 방식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학자의 위계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대가大家’는 모두 전자이다. 자신만의 특이성이 없으면 학자가 아니라 지식매판상이다. 하지만 이론들을 잘 구성해내는 작업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신의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왈 맹자왈 하듯이 ‘맑스 왈’, ‘들뢰즈 왈’하면서 훈고학 하는 시도는 자신의 ‘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맑스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맑스는 그의 연구를 돕는 ‘동료’가 될 뿐이고, ‘들뢰즈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들뢰즈는 마찬가지로 그의 벗이 될 따름이다. 이론들을 인용하고 필요에 의해서 재구성하는 것과 이론들의 구성체계에 맞춰서 현상을 짜맞추는 행위는 그야말로 식민지적 지식매판상의 모습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응적 개념’이 중요하다. 자신의 논의의 감을 잡고 거기에 관련된 이론을 사용하고 또 그 이론에서 어느 순간 벗어나 자신만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겪어서 쓴 신자유주의의 얼굴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span> </p>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를 읽는다. 신자유주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레톨릭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이미 모든 지식인들의 입에 붙어있는 듯하다. 진보진영의 정치인들도 ‘신자유주의’를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구체화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국내의 논의들은 별로 없었다.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이야기하는 저작을 번역하거나, 저널리스틱한 논의에서 멈추곤 하였다.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진 ‘신자유주의’는 어떤 것인가? 엄기호의 저작은 구체적 사례들과 이론들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서 신자유주의를 우리 눈에 보여준다. 겪고 생각한 신자유주의의 실체가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p>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팽창이 위기에 도달했을 때(케인즈주의, 브레튼우드 체제의 위기 국면)의 ‘탈출구’로 제시되었다. 물론 모두의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미국과 영국의 특정한 이익들이 매개되어 시작된 것이다. 싱크탱크의 입장들은 미국과 영국의 집권과 함께 정책이 되었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헤게모니에 의해서 전지구적으로 각 국가에 이식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펼쳐진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빨간 저금통에 동전을 모아 통장을 만들던 아이들의 고사리 손이 떠오르는 국민 경제 시스템은 시장에 의해서 재편되었다. 산업자본주의는 금융자본의 헤게모니에 의해서 해체되었고 국가의 역할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전환되었으며 시장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국가의 자국 산업을 지키고 사회적 안전망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들은 ‘규제’라는 이름으로 점차 해체되었다.

노동의 유연화와 노동자들을 한 명 한 명의 ‘자본가’로 만들어버렸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을 보라. 그들은 한 명 한 명의 자영업자로 호명되고 그들의 파업에 국가가 ‘업무개시명령’으로 강제노동을 시킨다. 다른 한 편 자기계발서는 각자의 자기 관리를 신격화했다. ‘부자 아빠’가 되던지 ‘가난한 아빠’가 되어 배제되던지. “20대에 재테크”에 미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모두는 그 경쟁에서 각자 살아남을 것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크게 저항하지 않지만, 이제는 기존의 보편적이었던 것들이 ‘예외’가 된다. 이제는 실직이 보편이고 ‘취직’이 예외적 상황이다. 모두는 돈을 굴려 더 많은 돈을 벌게 하는 자본의 논리의 노예가 되었다. 내가 넣은 보험은 펀드투자의 종잣돈으로 투신사가 운용하고 있고, 연금도 국가가 주가를 방어하는 데 쓰이고 있다. 모든 것은 돈놀이로 밀려 들어간다.

국가도 국민을 이제 ‘주권자’로 생각하지 않고 ‘고객’으로 생각한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소비할 수 없는 ‘소비자’에 끼지 못하면 곧바로 ‘잡상인’이 되거나 ‘거지’로 전락한다.

문제는 이 무너져 내려 더 회복되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모두는 불안하다. 모두는 공포에 노출되어있다. IMF 사태로 사업이 무너지고 가족이 해체되었으며 반지하방에서 살게 된 민철의 이야기, 무한도전에 놓여있는 중고등학생 조카들의 이야기, 편입에 실패하면 사랑이 해체되고, 해체된 사랑을 복구하고자 서울에 상경하여 비정규직 노동과 파견 노동에 노출되는 지방대생 형석의 이야기, 못 생겨서 트랜스젠더로 인정도 못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방송에서 팔까 고민하는 트랜스젠더 은영의 이야기, 일제고사에서 성적이 떨어져 자살한 여고생 때문에 땅값이 떨어질까봐 흙으로 묻어버리는 어느 아파트 단지의 이야기. 이건 모두 예외인가.

낙오하면 짐승이 된다. 성노동을 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감정노동을 하거나 어쨌거나 돈이 되는 걸 팔아야 된다. 그것도 안되면 장기라도 팔아야 한다. 제약회사의 실험 쥐 대신이 되거나. 미국에서는 고등학생이 홈리스들을 패죽이고선 “게으른 것들 재미삼아서 좀 패줬다.”라고 말한다. 덩달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공격은 편견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미끄러진 사람들은 모두 그 표적이 된다. 이주민에 대해서 우리는 ‘더럽다’고 외치고 ‘게으르’다고 말하며 짐승처럼 다루고 있지 않나. 그리고 사회적 공범에게 “외국인 노동자 꺼져라”라고 외쳐보지 않았나.

민족주의는 상승효과를 낸다. 황우석 사태를 보라. 대한민국의 국익이라는 모호한 이익은 국민 일반 개개의 이익으로 둔갑하고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모든 사람은 ‘민족의 적’이 되었다. 최소한의 자기이익이라는 자본주의적 개인의 맥락도 없어져버린다.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개인의 맥락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정하는 것은 소비할 수 있고, 자본을 증식할 수 있는 ‘자본가’ 뿐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정책, 민족주의적 감성을 활용하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통치술의 본질과 효과를 엄기호는 끔찍한 현실로 풀어낸다.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 세대>가 ‘공포 경제학’이라 불렸는데, 진짜 ‘공포’는 엄기호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시현된다. 현실이 아니길 빌지만, 더 현실적이라 공포스러운 현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대한 포착이 이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국제연대활동의 경험과 사회적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진 것이기에 그의 이론을 무시할 수가 없다.

어디에서 대안은 만들어 지는가.

마지막의 대안부를 읽으면서는 아쉬움이 든다. ‘아무개들’의 민주주의. 배제된 모두의 민주주의의 기획에 동감한다. 하지만 촛불집회에 대한 논의는 좀 엉성한 감이 있다. “치안의 정치, 그 통치의 허용범위 안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민주주의의 정치를 개시한 셈”(p.217)이라 한다. 하지만 그 공간은 누가 열고 누가 전유했는가. 촛불소녀가 공간을 열었다. 그들의 저항주체로서의 가능성과 새로운 신좌파적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긍정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공간은 누가 전유했는가. 386이 전유했다. 사회적 약자의 발언은 단상의 정치에 함몰되었다. 가르치고 가르치려는 민중단체의 메시지는 집회의 활력을 억압했다.

또 그 민주주의의 정치에 미국산 쇠고기를 먹이기 싫은 고가의 유모차를 끈 중산층 여성은 있었지만, 거기에 참여조차 할 수 없는 호모 사케르(벌거벗겨진 인간)들은 그 공간에 없었고 개입해도 주류가 될 수 없었다. 시위대의 폭력에 대해 ‘비폭력’을 외쳤지만, ‘비폭력’을 할 수 없었던, 참을 수 없었던 이들에 대한 공감은 없었다. 거기엔 중간계급의 머뭇거림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민주주의의 기획에 파묻혀 잘 지적되지 않았다. 이택광의 ‘중간계급’ 논의는 이러한 측면에서 적절하다. 결국 이명박이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 부르고 끄떡도 없는 이유, 새로운 정치가 그 프레임에 말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모호한 정치성에 대한 귀결이 노무현과 김대중 서거 이후 기존의 ‘대안’의 축이었던 민주개혁세력이 정운찬 임명 후에 맥을 못추는 이유와 엮이지 않을까.

하지만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이러한 아쉬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단단함을 느끼게 해주는 분석을 보여주는 양질의 논의다. 이 정도로 탄탄하게 이론을 현실에 맞춰 재구성하고 적실한 자기판단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은 드물다. </p>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해야하나”의 고민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구체적 ‘가능성’들이 펼쳐지는 공간과 주체들을 발굴하는 일들에서 시작하고 싶다. 편견을 만들어내는 기제들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를 만들고 신자유주의의 패악에 개길 수 있는 이론을 만들고 싶다. 그 지점은 아무래도 더 낮게 몸을 움츠리고 지평을 넓히는 과정, 그리고 현장에서 겪는 일들을 통해서 보일 것 같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10점
엄기호 지음/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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