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의 사회학 – Arnold Hauser를 읽다 ①

 2009/04/19 – [Reviews / Previews/Culture Books] – 처음 잡은 문화연구 입문서 – 존 스토리,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현실문화연구
2009/05/10 – [Reviews / Previews/Culture Books] – 교과서를 읽다가, 문화의 시대를 생각한다- 원용진,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한나래</a> </td> </tr> </table> 문화연구자로서의 첫 학기 이상길 선생의 <문화예술의 사회학="">을 수강하고 있다. 첫 학기를 봄에 시작했다면 <문화연구입문>이라는 수업을 수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을에 학기를 시작했기에 <젠더연구입문>이라는 젠더 연구 수업을 듣고 있다. 가치관의 전복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어쨌거나 ‘문화연구’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크기 때문에 관련된 수업을 찾는 편이었고 <당대비평>과 <문화과학>에서 자주 접했던 필자. 그리고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의 필자이기도 했던 이상길 선생의 수업이 궁금했다. 이번 학기 조한의 <한국의 문화연구="">까지 해서 모두 빽빽하고 굉장히 도전적인 수업들이다. (2009/09/14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겉도는 이론, 헛도는 삶을 벗어나기 위한 지도 – 조한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 2009/09/06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감응적 개념 – 조한혜정, 글 읽기와 삶 읽기 1) 연대 안에서 이상길 선생의 수업은 꼼꼼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텍스트를 지독하게 많이 읽히는 것으로도 물론 유명하고, 그 만큼 준비해오는 수업이고 2시에 시작하는 수업은 정규적으로 5시에 끝나게 되어있으나 6시가 되는 일도 이미 겪었다. 특별한 렉처가 아니라 참여관찰하면서 적절한 시점에 개입하는 강의의 형태가 펼쳐진다. 모든 이들은 발제/토론을 3번 씩 학기 중에 해야하고, 매주 쪽글을 써야 한다. 월요일 대학원 수업이 어떤 의미인 줄 알았다면 고민을 좀 했을 텐데 이미 엎어졌다. 내게 주 5일 학습 노동은 없다. “우리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 하루는 07 to 02로 재편되었다. 고3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2년이 이럴 계획인지는 좀 생각해 봐야겠다. 주말에 10시간 씩 자두어야 한다. 살려면. <문화예술의 사회학=""> – 아놀드 하우저를 읽다</span> 첫 주와 둘째 주에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의 사회학="">을 읽고 있다. 난독증을 불러일으키는 80년대판 번역이다. 혼자 생각하기로는 일본판 번역을 중역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데 독문과 석사과정 마친 사람들이 번역했으니 그래도 독일원판을 보긴 했을 거라고 생각은 한다. 어쨌거나 한 시간에 평균적인 사회과학서를 100페이지씩 읽다가 이걸 시간당 30페이지를 못 넘기고, 밤을 꼴딱 새면서 읽고 있다. 이제 한 챕터 남았는데, 내 발제다. 차라리 영어 논문 발제가 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하우저 이야기(http://www.kirjasto.sci.fi/hauser.htm)를 하자면, 하우저의 명제 하나. 수용자의 소비가 생산자의 ‘예술’을 결정한다. 수용자가 없으면 예술도 없다. 누군가 봐줘야 예술이다. 따라서 예술은 수용자와 문화생산자(예술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예술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을 정초한 사람이기에 하는 이야기가 된다. 하우저의 시대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하우저는 TV를 ‘바보통’으로 생각한 사람-전형적인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공유하는 바가 많은 엘리트 주의자다. 베토벤과 빅뱅을 비교하면 지팡이로 때릴 지도 모르는 꼰대다(돌아가셨기에 그러진 못하겠군). 문화연구자들이 종종 이야기하는 좌파 엘리티즘의 시초가 아놀드 하우저라고 볼 수도 있겠다. 첫 주 수업에서의 논의는 1)먼저 ‘예술’은 도대체 뭐냐는 거였다. 문화 연구자들이 ‘예술’을 최근에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예술에 담겨있는 엘리트주의적 시선에 대한 이야기들. ‘문화생산자’ 이야기는 나오되 ‘예술가’ 이야기는 크게 울려퍼지지 않고 있지 않나. 문화 컨텐츠 논의는 있지만 예술 컨텐츠 논의는 없다. 2)또 하나는 예술에 대해서 생산자/수용자 관점에서만 볼 거냐 이거다. 사실 문화와 예술을 어떤 행위자agent가 가장 크게 좌우할까? 사실 알고 있지만 잘 떠올리지 않는 문화산업/미디어/문화적 매개물(박물관, 콘서트홀, …). 기술의 발전이 제약과 구조 창출에 있어서 미치는 영향들. 예전에 케임브리지 <대중 음악의="" 이해="">에서 나왔던 논의들이 떠올랐다. 예술을 말하기 위해서 설명해야 할 요소들. 3)역사적 관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들인데. ‘예술’과 ‘예술 아닌 것’도 역사적 맥락에 의해서 결정되고 또 ‘공간’의 배치를 놓칠 수 없을 거다. ‘장소’에 따라 읽히는 맥락이 다르다. 내가 던진 문제틀은 ‘블로거’ 그리고 ‘소수자들의 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비평’의 문제였다. 비평에 있어서의 권위는 누가 어떻게 무엇을 통해서 확보하는가? ‘블로거’를 이야기할 수 있다 ‘나름대로의 인지’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해석’들을 가지고 리뷰를 쓰는 블로거들이 증가하고 있고, ‘지식 생산’의 영역에 있어서 나름의 문제틀거리가 등장한다. 수업 중에 받은 문제제기는 블로거들의 비평 행태가 사실상 ‘일차원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거나 ‘copy and paste’의 행태에서 크게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비평‘이 될 수 없지 않냐는 거다. 그러면 ‘진정한 비평’은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 당연히 ‘수준’과 ‘위계’의 문제가 발생한다. 오롯이 그것을 상대화시킬 수는 없다. 다만 위계들의 ‘역사성’을 지적할 수 있고 그것들이 사실은 ‘트렌디’하다는 것까지는 지적할 수 있다. 비평을 바라볼 수 있는 세 가지의 기준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 째는 내재적(혹은 미학적) 관점을 들 수 있다. 둘 째는 시장중심적 관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평점이 높은 비평이 최고의 비평이다. 셋 째는 정치적 기준(외재적 기준)이라 볼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갖춰야(물론 여기엔 당파성이 개입한다) 한다. 여기서 정량적으로 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두 번째의 시장중심적 관점 밖에 없다. 내재적 가치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역사성’과 ‘장소성’에 의해 귀속되며 이는 잴 수가 없다. 정치적 입장도 말할 것도 없다. 이야기로 돌아오면, 블로거들의 ‘수준’과 ‘위계’라는 것들이 설치형 블로그/가입형 블로그 블로거들에 따라서 다르고, 블로그라는 것들이 매스 미디어와 달리 어느 정도는 social network의 폭과 높이가 좁고 낮기 때문에 다른 층위로 접근해야 한다. ‘나름의 해석틀’을 공유하고 인정하는 사람들 끼리의 ‘비평공간’을 블로그스피어는 분명 열어주는 측면이 있다. ‘기회구조’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셋 째의 관점과 둘 째의 관점을 가지고 생각을 해보면 ‘파워블로거’라는 웹상의 담론과 ‘좌파 오덕’들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바라볼 여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것들은 얼마나 유의미 하고 올바른가? 나름의 네트워크들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다원화된 비평과 예술가들의 공간. 나는 단순한 다원주의의 ‘차이를 인정’하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양화의 힘으로써 자본 너머까지로 나아가자는 거다. 블로그의 힘은 ‘정치적 포지션’과 ‘정치적 활력'(puissance)까지 포함한 다양성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의 지점들을 정교하게 할 필요가 있다.